56화
외국인 마법사로 탈바꿈한 돈의 정체는 솔레아와 그레이만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노예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은 집안의 가신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손님방에 머무르는 외국인 마법사가 돈이라는 건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어쩌다 머리색이 비슷한 거겠지,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목구비의 느낌도 전혀 달랐고(밥을 잘 먹어서 낯빛이 좋아졌다),
짧게 자른 깔끔한 머리카락의 결도 달랐고(상한 머리카락을 잘라 낸 뒤 솔레아가 몰래 기름을 머리카락에 발라 주며 헤어 클리닉을 때려 박았다),
키도 훨씬 더 컸으며(체형 교정 덕분이다. 숨겨진 키를 찾아 주는 골반 교정 그레이&솔레아 클리닉),
결정적으로 이 잘생긴 외국인 마법사는 노예 돈과 달리 사람의 눈을 피하는 법이 없었으니까(솔레아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 덕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은 편이 낫겠지, 싶어 헤이먼이나 공작님을 비롯한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자며 솔레아가 그레이를 설득했다.
돈을 유심히 본 사람도 없으니 아마 다들 모를 거라는 꽤 타당한 근거가 그를 뒷받침했다.
그레이는 언제나처럼 장난기 넘치게 웃으며 솔레아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럼 이 사실은 나랑 너만 아는 거네?”
그렇게 말하는 그레이조차도 솔레아가 어디에서 마법사를 고용해서 이상한 운동 기구를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솔레아가 중요한 일을 제게 부탁했다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필요한 사람이니까 나한테 왔겠지.
솔레아의 뒤에 서서 싱글벙글 웃던 그레이는 그녀의 정수리에 제 턱을 괴고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은 뒤 머리 위에서 종알거렸다.
“응? 그레이만 아는 비밀이잖아. 그렇잖아. 빨리 맞다고 해.”
“아, 바쁜데 왜 이래.”
말로는 짜증스럽다는 듯 툴툴거리면서도 솔레아는 그레이를 내치지 않았다.
실컷 싸우고, 장난치고, 가끔 서로 번갈아 삐치긴 해도 내치지는 않았다.
바쁘게 종종걸음으로 다니며 이것저것 서류를 확인할 때도 절대로 내치진 않,
“덥다고! 떨어지라고!”
“……알았어.”
짜증은 냈다.
솔레아의 방에서 나온 그레이는 홀로 손님방에 머무르는 돈의 방으로 향했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외국인이라는 설정 때문에 찍소리도 못 내고 있을 테니 심심하겠지.
그레이는 돈의 방문 앞에서 서서 문을 두드렸다.
“나야.”
하지만 방 안은 조용했다.
문고리 역시 잠겨 있었다.
“나라니까, 그레이.”
이상하네, 잠들었나. 나중에 다시 올까.
그대로 뒤돌아서서 가려던 그레이는 우뚝 멈춰 섰다.
남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놀라서 뒤도는 놈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듣는다고?
“문 열어.”
이어진 몇 번의 노크에도 문을 열어 주지 않자 그레이는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돈! 돈!”
문을 세게 두드리며 외쳤다.
돈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기묘한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돈!”
“왜 그러는 거냐, 그레이.”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고, 복도 반대편에서는 헤이먼과 공작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돈이라니?”
“아, 그게…….”
주먹으로 거칠게 문을 쿵쿵 두드리며 돈의 이름을 불렀던 탓에 그레이가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머리를 굴렸다.
그때, 솔레아가 멀리서 후다닥 뛰어왔다.
“아이고! 오빠! 그러지 말라니까! 말 안 통하는 사람한테 왜 그래!”
“레아, 무슨 일 있니? 손님방의 마법사는 네 손님이라 들었는데.”
공작의 질문에 솔레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마치 질타하듯 그레이를 힐긋 올려다봤다.
“이 방의 마법사가 우리 영지에서 장사하는 걸 허락하고, 물건도 대신 팔아 주는 대가로 수익금의 절반을 주겠다고 했거든요. 근데 아직까지 돈을 안 주니까……. 아니, 그래도 갈 곳 없는 딱한 사람이니까 좀 참자고 했는데 그레이가 자꾸 돈 내놓으라며 저 사람을 괴롭히네요.”
하필 그 상황에 그리도 야박하게 닫혀 있던 문이 빼꼼 열리며 돈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쪽 욕실에서 씻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은 상태였다.
“씻고 있었나 봐요.”
돈은 이전에 여러 번 연습했을 때처럼 솔레아를 물끄러미 보다가 생긋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는 영국 마법사 친구들이 상공에서 내려다봐도 ‘아, 미남!’ 할 만한 미소였다.
상황을 전해 들은 공작과 헤이먼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따끔한 눈총을 받은 그레이가 어버버하며 두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돈 독촉 말고는 별다른 핑계가 생각나질 않았다.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는 손님의 방문을 두드리며 돈 내놓으라 소리치다니. 그레이. 이게 대체 무슨 실례니?”
“……아버지, 그게 아니라…….”
헤이먼이 말을 얹었다.
“솔레아와 붙어 지내는 건 알지만, 레아도 자기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으니 네가 다 처리해 주려 설레발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래, 헤이먼의 말이 맞다. 네가 솔레아에게 의지가 되는 오라비인 건 맞다만,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행동하는 게 레아한테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진 않구나.”
“아니, 난 그게 아니라 그냥 돈을…….”
“돈을?”
보랏빛 자안을 깜빡이며 지그시 저를 응시하는 디에르고 공작과 눈을 맞추던 그레이가 입을 달싹이다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헤이먼이 옳다구나 하고 냉큼 끼어들었다.
“그래, 함께 사는 오빠가 둘인데 하나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건 말도 안 되지. 나라면 안 그럴걸.”
핀트를 벗어난 얘기에 디에르고가 헤이먼을 잠깐 혼냈다.
“헤이먼. 중요한 건 솔레아가 너희 둘 중 누구와 더 친하냐가 아니다.”
아, 상황에 맞지 않았군.
헤이먼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수정하려는 순간 디에르고 공작이 진지하게 덧붙였다.
“친한 건 그레이겠지만, 레아가 내심 의지하고 있는 건 나다.”
“예?”
“네?”
“음?”
까딱 잘못하면 돈도 ‘예?’ 하고 되물을 뻔했다.
세 남매가 되묻는 상황에도 디에르고 공작은 뻔뻔했다.
“영지 사업을 구상하며 내 방에 몇 번이나 찾아오지 않았니. 솔레아가 그렇게 행동한 건 내 짐을 덜어 주고 싶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
방금까지만 해도 얌전히 있던 사채업자 꿈나무 그레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솔레아는 우리 잘되라고 영지 사업 하는 거거든요.”
솔레아가 입 다물라며 그레이의 발을 꾹 밟았다.
다행히 디에르고 공작은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너희를 위한 사업이면 너희끼리 했겠지. 하지만 내 보좌관인 라트엘과 함께 양모 사업을 준비하고 있지 않니. 그건 나를 믿고 의지한다는 거다.”
“아빠가 영주시니까 그렇겠죠.”
그레이가 다시 한번 투덜거렸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인사하러 온, 퇴근 귀신 라트엘이 대화를 간략하게 듣고는 냉큼 끼어들었다.
“그런 걸로 따지면 실질적으로 가장 의지하고 있는 건 저 아닐까요.”
“라트엘까지 왜 그래요?”
솔레아가 당황하며 이상하게 번져 가는 싸움을 말리려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 와중에 솔레아의 귓가에서 정령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주인이랑 제일 친한데!’
‘우린 주인한테 마력도 주니까 우리가 제일 친해!’
‘통롤러 만든 건 우리야!’
‘이 저택을 지키는 것도 우리야!’
‘맞아, 우리가 제일 소중해!’
‘주인이 의자하는 건 우리야!’
‘의자 아니야! 의지!’
‘그래, 그래!’
이 와중에 정령들까지 난리라니.
솔레아가 이마를 짚었다.
귓구멍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사채업자 혐의를 받고 있다는 건 까먹었는지 그레이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운동도 같이하고, 밥도 같이 먹고, 어? 같이 다니는 건 난데!”
“그레이, 너는 솔레아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편안하게 쉬게 해 준 적이 있냐? 괜히 자전거나 가르쳐 주겠다고 하다가 동생을 다치게 한 것 말고 말이야.”
“호수 한 번 갔다 왔다고 유세 떠네. 일상을 나누는 사람이랑 더 친한 게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솔레아의 아비다.”
“아버지, 치사하게 핏줄로 끌고 가시깁니까.”
헤이먼이 처음으로 존경하는 아버지를 있는 힘껏 째려봤다.
솔레아는 웃음을 참으려 인중을 길게 늘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곤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버지, 너무하셨네요……. 그레이와 헤이먼이랑은 피가 안 섞여 있어 안 친하다는 거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난 그런 의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아버지라는 거지. 너희가 내 아들이고, 딸이고…….”
디에르고 공작이 당황한 틈을 타 얌전히 있던 돈이 슬쩍 솔레아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이 안 통한다는 설정이니 대화를 못 알아듣는 척해야 맞는 건데 돈은 굳이, 굳이 솔레아의 옆에 섰다.
그러곤 솔레아와 악수하듯 손을 맞잡고 눈썹을 들썩이며 사람들을 하나씩 쳐다봤다.
“지금 동업자라고 생색내는 건가.”
디에르고 공작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하하, 하! 하, 하하……. 마법사님. 왜 이러실까. 하하.”
솔레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빼내자 그레이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돈 내놔.”
“어?”
당황한 솔레아가 뒤에서 되물었지만, 그레이는 모른 척하고 돈에게 일부러 위협적으로 말했다.
“왜 남의 집 귀한 동생 손을 함부로 잡아. 때 되면 주겠다 한 돈을 줘야지. 누구는 땅 파서 장사하나. 돈 주기로 한 날짜는 제때 맞춰야 될 거 아냐. 돈 내놔.”
아주 조금, 약간, 살짝, 솔레아 아가씨가 저를 아낀다는 어필을 하고 싶었던 돈의 두 눈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제가 돈이 어디 있어요. 그게 다 아가씨 돈인데.’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그레이는 막무가내였다.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나가세요, 마법사님. 다 큰 청년이 사업을 빌미로 내 동생한테 이러는 거 썩 보기 좋지 않네요.”
돈의 입이 벌어졌다.
억울해서 금방이라도 변명이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솔레아의 손이 더 빨랐다.
그레이의 등짝을 거세게 후려치며 솔레아가 꽥 소리를 질렀다.
“내 손님이야! 돈 벌게 해 주는 귀한 손님인데 왜 그래! 아니, 그리고 무슨 이런 유치한 걸로 싸우세요, 다들?”
“그거야 네가 내 딸이니까.”
“나를 지켜 준다고 해 놓고 매일 그레이랑만 시간을 보내니까.”
“너 나랑은 한 번도 놀러 안 갔잖아. 나도 노 저을 줄 알아. 말도 헤이먼보다 잘 타.”
“……음, 저도 한마디 해야 할까요? 그럼 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라트엘은 더 이상 이 유치한 싸움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는지 누구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요, 그럼! 이제 매일 오전엔 그레이랑 운동하고, 점심은 헤이먼이랑 먹고, 저녁때는 아버지랑 같이 시간 보낼게요! 놀러 가는 건, 그래! 그레이. 내일 놀러 가면 되잖아!”
“왜 아빠랑은 놀아 주지 않니.”
“아버지는 바쁘시잖아요.”
디에르고 공작의 매섭게 생긴 날 선 눈썹이 아래로 조금 내려갔다.
“시간이야 만들면 되지. 라트엘, 내가 내일 시간이…… 벌써 갔네.”
라트엘이 사라진 빈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디에르고 공작은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솔레아 네 뜻이 그렇다면 손님을 내쫓진 않으마. 네 말처럼 너의 손님이니.”
하지만 그 말을 뱉는 공작의 형형한 눈빛에 돈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일 뻔했다.
딸에게 손대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시무룩해진 돈의 얼굴을 살피던 헤이먼이 기시감을 느꼈는지 작게 ‘어?’ 하는 탄성을 뱉었다.
들켰나, 싶은 순간 솔레아가 얼른 돈의 등을 밀어 방 안으로 집어넣고 잽싸게 문을 닫아 버렸다.
“내일, 일단 내일 얘기해요.”
그러나 솔레아가 애써 상황을 무마시킨 보람도 없이 돈은, 내일이 오기도 전에 헤이먼에게 들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