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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192)

55화

며칠 뒤, 직공들이 영혼을 때려 부어 완성된 옷은 완벽에 가까웠다. 

바느질 상태와 자수를 꼼꼼히 살핀 솔레아는 완성된 옷을 곱게 포장한 후, 첫째 오빠에게 보냈다.

“……설마, 인성이 위로 갈수록 별로라서 헤이먼보다 까칠한 놈이면 어쩌지? 옷을 안 입으면 어떡해?”

옆에 선 그레이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형은 안 그래.”

“헤이먼 까칠하다는 거엔 동의하는 거야?”

실실 웃으며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레이 역시 낄낄거리다 솔레아의 어깨를 툭 쳤다.

솔레아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다시 그레이의 팔을 쳤다.

그러자 그레이가 웃는 얼굴로 다시 솔레아의 등을 툭 밀쳤다.

앞으로 튕겨 나간 솔레아가 그림처럼 웃으며 뒤돌더니 주먹을 꽉 쥔 채 그레이에게 달려들었다.

개싸움이었다.

“야, 놔라! 아! 머리! 머리 잡지 말라고! 솔레아!”

“이 그레이 새끼야! 나는 살살 쳤잖아! 너는 왜 세게 치냐고!”

“네가 먼저 옆구리 찔렀잖아!”

“장난친 거잖아, 이 새끼야!”

“오빠한테 이 새끼? 이 새끼? 이 새끼가.”

“동생한테 이 새끼? 너 이 새끼 내가 아주 오늘 대가리에 구멍을 내 주지.”

그레이는 솔레아를 힘껏 밀치지는 않고, 살짝 잡은 채 웃음기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리카락을 잡은 솔레아의 손이 진심이 되어 가는 것 같아 그레이 역시 솔레아의 뒷덜미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공장 앞 조용한 부지에 엎어져 엎치락뒤치락하기 시작했다.

“내 머리 놔라! 야!”

“네가 먼저 내 옷 놔!”

그레이가 힘을 써서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흙바닥에 한 번 나뒹군 솔레아는 그레이의 팔뚝을 깨물기 시작했다.

“아악! 야! 이 정신 나간!”

“으그그!”

“하나 둘 셋 하면 놓자, 어? 하나, 둘, 셋! ……야! 이 미친놈아! 너 왜 안 놔!”

“으으그극!”

“아아악! 팔! 팔! 살 떨어져 나가! 아! 솔레아아악!”

한편 공장 옆 조용한 공터에서 산책을 하거나 직원 복지로 마련된 통롤러를 굴리던 직공들이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언제 봐도 두 분은 참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러게요. 저렇게 다 커서까지 친하게 지내시기가 쉽지 않은데.”

마음이 약한 제닌이 산책을 하다 말고 멈춰 선 채 솔레아와 그레이를 바라봤다.

그레이가 지르는 비명이 어쩐지 점점 진짜 같아졌다.

“……그레이 도련님 살점이 떨어지면 누가 치료하나요?”

“……글쎄요, 그래도 우리 사장님은 솔레아 아가씨니까 사장님을 응원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자수 장인인 직공들의 눈빛이 조금은 걱정스럽게 바뀔 무렵, 마차를 타고 온 마리에가 보안을 위해 공장 부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내려 홀로 짐 가방을 들고 올라오다 남매의 개싸움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직공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마리에의 인사를 못 들은 건지 솔레아와 그레이가 유치한 싸움을 이어 갔다.

마리에 역시 인사를 받아 줄 거란 생각은 안 했는지 옆 공터로 가 직공들을 불러 모았다.

“들어가서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얘기를 해 볼까요, 동업자 여러분?”

결국 텅 빈 공터에는 그레이의 외로운 비명만 겹겹이 쌓여 갔다.

돌아오는 마차에서 서로 눈도 안 마주치던 그레이와 솔레아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공작에게 혼이 나기 시작했다.

“대체 뭘 했길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밖에 있었던 거냐. 옷은 왜 이렇게 엉망이고!”

“음…….”

염색 양모 사업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기로 한 탓에 솔레아가 얼버무리자 그레이가 얼른 끼어들었다.

“얘가 자전거 타고 싶대서요.”

“……내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그레이를 보다가 얼른 덧붙였다.

“네, 그. 자전거……. 두발자전거. 타고 싶어서. 그, 멋져 보여서.”

혼자 두고 간 것 때문에 삐졌는지 책을 들고 복도를 지나가던 헤이먼이 비웃었다.

“하, 지나가는 사람 자전거를 뺏기라도 했나 보지.”

솔레아는 참지 않았다.

헤이먼을 사랑하고, 그를 구해 주고 싶고, 애정을 가득 담아 아끼고 있는, 그런 애틋한 감정들을 떠나서.

솔레아는 이죽거리는 건 참지 않았다.

“어디 아버지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니 마차 바퀴 빼서 내 자전거에 붙인다.”

“풉!”

“솔레아!”

웃음이 터진 그레이가 입을 틀어막았다.

깜짝 놀란 디에르고 공작은 이마를 짚었다.

지난 몇 달간, 솔레아는 굉장히 밝아졌다.

처음엔 아버지라 부르는 걸 어색해했지만 점차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라트엘과 얘기할 때면 이것저것 묻고, 의견을 제시한다고도 했고.

늘 같이 다니는 그레이와는 이제 누가 봐도 남매 같았다. 불붙으면 쌈박질하는 것까지.

……그래, 솔레아는 너무 밝아졌다.

“오빠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헤이먼이 먼저 얄밉게 끼어들었잖아요! 아빠는 왜 나한테만 그래!”

처음으로 그에게 큰 소리를 내며 씩씩거리는 걸 보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딸……. 건강하기도 하지.

디에르고 공작은 목이 메어 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솔레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조심히 쓸었다.

“아빠한테 말했으면 자전거 100대는 사 줬을 텐데.”

“다리가 두 개인데 100대를 어떻게 타요.”

퉁명스럽지만 장난기가 가득 섞인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전처럼 겁먹고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디에르고는 품에 안은 솔레아를 오래 다독였다.

그러는 동안 솔레아는 공작의 어깨 너머에 서 있는 헤이먼과 입 모양으로 싸우고 있었다.

‘왜 나만 빼고 둘이 갔냐고!’

‘너를 왜 데리고 가야 하는데.’

‘너 요새 맨날 그레이랑 다니잖아!’

‘얘는 힘쓰는 애잖아.’

공작 옆에 서 있는 그레이가 생긋 웃으며 소매를 걷는 척, 형에게 엿을 날렸다.

솔레아와 그레이가 손가락으로 자주 엿 날리기를 하며 노는 걸 봐서인지 헤이먼 역시 저게 대충 부정적인 뜻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 큰 분홍색 어른이 홀로 씩씩거리며 복도를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갔다.

제 방으로 돌아와 씻은 후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솔레아는 다소 지친 몸으로 의자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운동도 매일 하고 있고, 정령들의 주인이 된 후로 돈벌이도 걱정이 없었다.

문제는 딱 하나, 이놈의 일기장이었다.

염색 양모가 궁금해서

‘염색’

이라고 썼더니

염색 안 한 지 오래됐는데. 돌아가면 셀프 뿌염 해야지.

라고 적히질 않나.

‘양모’

라 쓰면

양 모자라다. 다음엔 아침밥 더 많이 달라고 해야지. 근손실 온다.

라고 적혔다.

될 대로 되라, 하고 놔뒀더니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레이가 나중에 먹겠다고 남긴 푸딩이 없어졌다며 나를 의심했다. 너는 동생을 의심하는 거냐고 식당에서 싸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근데 사실 내가 먹었다. 어쩌지.

매일 셔츠만 입어서 셔츠가 부족했다. 드레스 입기 싫어서 앤한테 헤이먼 옷장에서 몇 벌 가져오라고 시켰더니 아주 깔끔하게 쌔벼 왔다. 헤이먼은 내 옷이 자기 거랑 같은 건 줄 알았는지 따라 샀냐 묻고는 어깨를 으쓱대며 웃었다.

바보. 지 건데.

심지어 과하게 리얼리티가 넘치는 구간도 있었다.

오늘 비 옴.

좀 더웠고, 재밌는 하루였다.

빨리 겨울 왔으면. 양모 잘 팔리게.

“렘샤 부인! 일기 쓰기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누가 검사하는 것도 아닌데 날마다 이렇게 채우는 것도 피곤하시겠어요.”

혼잣말을 하며 솔레아는 일기장을 넘겼다.

통롤러 판매 1,000개 돌파!

“하……. 이게 쇼핑몰인 줄 아나. 이런 걸 일기장에 왜 적어 놔?”

어이없긴 했지만 기분은 썩 괜찮았다.

어느새 옆으로 모여들었는지 뿅 하고 모습을 드러낸 작은 정령들이 일기장과 솔레아 사이에 자리 잡았다.

“뭐라고 쓰여 있어?”

“주인! 말해 줘!”

“우리 얘기도 있어?”

동그란 두상에 봉봉 띄워진 파란색 머리카락이 눈앞까지 날아올랐다.

파란 정령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일기장을 읽어 나갔다.

“1,000명의 남자를 모두 정복한 후, 나는 더 이상의 남자는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자를, 까지 적혀 있는데? 주인! 이거 맞아?”

솔레아가 헛웃음을 치며 파란 정령의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을 검지로 쓰다듬었다.

“말이 되냐. 1,000명이랑 하면 골병들겠다. 너희가 만들어 준 통롤러 1,000개 팔았다고 적혀 있어.”

“정말?”

“진짜?!”

“우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신나 하던 정령들은 이내 작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 또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흥 많은 귀여운 정령들이었다.

통롤러는 황녀의 홍보 덕분인지, 제품의 우수성 덕분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것도 아니면 물건을 배달하는 돈의 미색 덕분인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상단을 끼고 판매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마력이 담긴 제품을 베르고의 이름으로 팔 순 없었다.

헤이먼의 마력이 통롤러를 끝없이 제작할 만큼이 안 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마법사들을 단체로 고용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거짓말은 마법사 협회장인 이달론에게 가장 먼저 들통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이달론이 움직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솔레아는 황녀에게 통롤러를 선물했던 날, 뻔한 거짓말을 했다.

“외국에서 온 마법사가 만들어 준 건데, 특별히 황녀님께 드리는 거예요.”

“내게만?”

“다른 분들도 원하신다면 구해 드릴 순 있겠지만 그분들은 돈 주고 사셔야겠죠. 마력이 들어가기도 했고, 인건비가 있으니까요. ……선물로 드리는 건 황녀님뿐이에요.”

황녀는 흡족한 듯 웃었고,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도 대충 알아들은 듯했다.

“뻔한 수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는 거야. 그래야 친구겠지?”

“그럼요. 선물이라는 건 거짓말도 아니고.”

“타국의 마법사는 누구지? 같이 왔나?”

통롤러가 마음에 드는 듯 소파 옆에 고이 세워 둔 황녀를 보며 씩 웃은 솔레아는 문을 열어 앤에게 명령했다.

“그 사람, 데려와.”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 복도에서 차분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황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남자는 예의 바르게 안으로 들어와 황녀에게 고개 숙여 절했다.

목선이 훤히 드러난 짧은 남색 머리카락에 얇은 뿔테 안경, 커다란 키와 곧게 편 허리, 그리고 굳게 닫힌 입술.

돈이었다.

하지만 솔레아는 돈을 가리키며 ‘타국의 마법사’라 칭했다.

황녀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짧게 끄덕였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마차에서 돈은 두 손을 깍지를 낀 채 창밖을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아가씨.”

“이제 넌 노예도 아닌데, 뭐.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 돼. 이국적으로 생겨서 괜찮아. 어차피 구매자한테는 중간 매매업자가 다 설명할 테고, 그 사람도 너를 타국의 마법사로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는 한낱…….”

솔레아는 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 믿지?”

“……네.”

돈은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올라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솔레아의 작전은 통했다.

중간 매매업자는 제작과 판매를 담당하는 건 이쪽 미남이라고 돈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를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통롤러를 기똥차게 팔아 치웠다.

타고난 장사치였다.

“이분께서는 서대륙의 마법사이신데, 통롤러라는 걸 개발하신 뒤 바다 건너인 이곳까지 오셔서 판매를 하고 계세요. 이 마법사분이 원래는 상단주셨는데, 상단 이름이…….”

상인이 슬쩍 쳐다봤지만 돈은 제국어를 못 한다는 설정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솔레아가 가르쳐 준 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 오른쪽으로 꺾었다.

상품 설명을 듣기 위해 모였던 귀부인들이 갑자기 부채를 활짝 펼쳐 얼굴을 가리고는 저들끼리 한참 수군대다가 중간 매매업자를 불렀다.

“……다 주게.”

“예?”

“저자의 마력으로 만든 운동 기구라며. 다. 팔고 가게.”

마차에 싣고 온 통롤러를 모두 판매한 상인은 계약한 대로 수익의 10%를 가져갔다.

그는 말도 못 하는 외국인 마법사 덕에 돈을 꽁으로 벌었다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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