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92)

54화

* * *

규모가 그리 크진 않은 건물 안에서 여러 명의 여자들이 탐탁지 않은 눈으로 서로를 경계하며 눈치를 살폈다.

여자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 주인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탓이었다.

‘자수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분.

경력직 우대. 매우 우대.’

라는 은밀한 모집 공고를 보고 알음알음 모인 인사들이었다.

또 몇몇은 속 모를 낯으로 싱긋 웃는 사내가 내민 종이를 보고 오기도 했다.

사내가 건넨 비싸 보이는 고급 종이에는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한 뒤 들은 얘기는 간단했다.

간단한 심사를 거친 후, 통과하면 함께 일을 하게 될 거라는 얘기.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반들반들한 미남이 실내의 2층 난간 위에 등장했다.

“다들 모이셨군요. 반갑습니다.”

“댁이 대체 누군데 우릴 모이라고 한 거요.”

“오해가 있었나 보네요. 모이라고 한 건 제가 아닙니다. 다만, 아직은 비밀스러운 단계라 정확히 말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1층에 옹기종기 모인 여자들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미안하지만, 이런 이상한 곳에 있을 시간에 바느질을 한 번 더 하는 게 낫겠네요. 가 볼게요.”

“저도…….”

“우리 애 약 먹이려면 장난 받아 줄 시간 없어요.”

세 명의 여자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을 옮기는 순간 한 남자가 정문을 가로막았다.

2층 난간 위에 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와는 달리 눈빛 자체에 살기가 서린 듯 냉엄한 낯이었다.

여자들이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치자 남자의 커다란 회색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남자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문이 무거워서……. 열어 드릴까요?”

“예? 아. 아, 아닙니다.”

얼결에 기가 죽은 세 여자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엉거주춤 자리로 돌아갔다.

어느새 입구에 서 있는 남자의 옆으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자가 가 나란히 섰다.

셔츠와 바지를 입긴 했으나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너 인상 더러우니까 조용히 있으랬잖아. 왜 어른들한테 겁을 줘!’

‘네가 밖에 나간다며. 위험하니까 따라왔지.’

‘내가 위험한데 왜 네가 따라 나오냐고.’

‘힝, 나는 그래도 너 지키고 싶은뎅. 호위 기사로 임명도 안 해 주고. 힝. 슬펑.’

‘아, 좀!’

몇몇이 대화 내용을 언뜻 듣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저 무섭게 생긴 남자가 매달리는 모양이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여자들은 술술 말을 이어 가는 2층 난간 위의 남자를 바라봤다.

“……자, 이제부터 보통 천과 양모 위에 각각 자수를 놓으면 됩니다. 될 수 있는 한 화려하게.”

기존에 쓰던 바늘이 양모를 뚫지 못하는 상황을 대비해 다른 바늘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처음엔 잠깐 헤맸지만 곧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집중해 천 위에 온갖 것들을 그려 냈다.

잠시 후, 심사에 통과한 이는 열다섯 명 남짓이었다.

탈락한 자들에게 돈을 쥐여 주자 웅성거림이 커졌다.

“떨어졌는데 왜 돈을 줍니까. 이게 뭐예요.”

돈주머니를 손에 든 자들이 떨었다.

이유 없이 받는 돈은 화를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자 건물의 정문 앞에 서 있던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면접 보러 오셨으니 교통비는 드려야죠. 집에 돌아가실 때 마차 타고 가시고, 남은 돈으로 식사도 챙겨 드세요!”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휘어지는 눈꺼풀에 가려졌다.

저 여자가 주인인가? 사장인가?

하는 눈빛들이 직공들 사이를 오갔다.

주머니 속에서 덜그럭대는 동전의 무게를 보아 하니 한두 푼이 아닌 것 같은데.

면접비가 이 정도면 작업 수당은 대체 얼마일까. 그제야 탈락한 이들이 아쉬움에 쓴침을 삼키며 돌아갔다.

탈락자들이 돌아간 뒤 정문이 다시 닫혔다.

그리고 이번엔 온갖 색으로 염색 된 양모들이 다시 직공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피보다 농후한 붉은색,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깊은 바다를 닮은 선명한 파랑, 한여름의 우거진 녹음을 담은 녹색,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노란색.

“세상에…….”

입을 틀어막은 직공들이 벽을 가득 메운 색색의 양모를 바라보다 짝, 하는 박수 소리에 다시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들이 작업하실 양모입니다.”

이름 모를 아가씨가 어느새 검은 후드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넘실거리며 흘러넘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생님들.”

“……선, 선생님이라니……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살아 있는 브랜드가 되실 겁니다.”

“……예?”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자수 실력자분들을 이곳에 모은 이유가 뭐겠습니까. 실력이 아까워서죠.”

목소리는 당당했고, 자신감 또한 넘쳐 보였지만 직공들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실력이 아까운 게, 그래서 뭐?

어차피 돈 받고 시키는 모양의 자수를 깔끔하게 놓는 게 그간 해 왔던 일이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흰 그냥, 자수만 할 줄 아는 것뿐…….”

“옷의 전체적인 틀을 잡아 줄 디자이너는 따로 동업자가 계시니, 그 부분은 걱정 마시고 여러분은 자수만 완벽하게 해 주세요. 기본 급여는 그간 받으시던 돈의 열 배 이상으로 쳐드릴게요. 주문이 많이 들어오면 추가금도 있고요.”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회색 눈의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솔레아. 이제 시작인데 무슨 소리야. 자선 사업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언뜻 들려온 솔레아라는 이름이 분명 낯설지가 않았다.

직공들의 눈동자가 사방팔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소중한 기술자니까. 재능과 노력과 노하우가 겸비된 장인들이라고.”

저 여자가 칭송할 만할 실력인지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었다.

동네에서 알아주고, 가끔 유명하신 귀부인들의 주문을 연달아 받는 정도였다.

물론 작은 마을에선 그렇게만 해도 실력 좋다 소리를 들었지만 이런 곳에서 ‘장인’ 소리까지 들으니 어쩐지 과분한 기분이었다.

평생 바느질만 하던 이들의 가슴에 이상한 감정이 일렁였다.

솔레아가 자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열다섯 명의 직공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저희랑 전속으로 계약하시게 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다른 곳에서 일을 받을 수 없다는 건가요?”

쏟아지는 질문에 솔레아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디자이너니까요. 완성된 옷이 포장되어 나갈 때, 선생님들의 성함이 적힌 명함도 동봉할 겁니다. 디자이너의 이름을 걸고 파는 옷, 그게 우리의 차별성을 보여 주는 키가 될 겁니다.”

솔레아가 자신감 넘치게 웃어 보였다.

“명품을 만들어 보자고요.”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그녀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동업자를 소개합니다!”

공장 뒤편의 작은 문이 열리고,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가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낯이 익은데?”

“세상에. 마리에 아니야?”

“살롱의 그 마리에? 그 사람이 여기 왜 있어?”

“……저 사람이 만든 옷에 자수를 넣는다고? 말도 안 돼.”

직공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마리에의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이들은 아까 직공들이 심사받을 때 자수를 놓은 양모를 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마리에 프란입니다.”

우아하게 웃은 마리에가 옷을 한 벌씩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 전속으로 일을 하진 못해요. 하지만 디자인 스케치는 해서 넘길 거랍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 마리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살롱을 운영한다는 저 마리에가.

동업자라니.

직공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마리에가 디자인한 옷에 자수를 박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연실색한 직공들의 표정들을 보고서도 마리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서비스직 특유의 완벽한 웃음으로 마무리한 마리에는 솔레아에게 눈짓했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염색 양모의 제작 및 판매와 유통을 전반적으로 책임지게 될 베르고 공작가의 솔레아 폰 베르고입니다. 이쪽은 제 오빠 그레이 폰 베르고고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장인 선생님들?”

한 명이 기절했다.

서 있던 상태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스르륵 무너지더니 뒤로 넘어갔다.

“어머나! 제닌!”

쓰러진 제닌을 부축하느라 분위기가 잠깐 어수선해지긴 했지만 대부분 눈앞의 귀족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기절한 건 열다섯 명 중 한 명이었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들도 기겁한 건 마찬가지였다.

거의 공포에 가까울 정도의 경악스러운 표정이었다.

“저, 저희, 저희에게 왜……. 저희가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아니…… 왜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시는지…….”

갑자기 찾아온 말도 안 되는 행운에 남루한 옷을 입은 여자가 더듬거리며 질문했다.

2층에 있던 남자가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오며 대신 답했다.

“‘실력에 맞는 대우를.’ 그게 베르고의 모토입니다. 아, 저는 그 모토의 최대 수혜자인 베르고 공작가의 두뇌, 공작님의 오른팔, 보좌관 라트엘입니다. 아가씨가 저만 쏙 빼셨네요.”

“아이구, 미안. 근데 왜 그렇게 거들먹거리는 성격이 됐어? 겸손은 다 어디 갔냐고.”

“아가씨가 제게 자주 당당해지라고 그러셔서.”

“도를 지나쳤잖아.”

“그래서 소개를 빼먹으셨나요?”

“……미안.”

대수롭지 않게 미안이라고 덧붙이는 귀족 아가씨를 보며 웃은 라트엘이라는 젊은 총각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출신, 나이, 경력 상관없이 실력만 보고 뽑히신 분들입니다. 제국에서 가장 자수에 뛰어난 최고의 실력자란 말이죠. 그러니 앞으로 누가 물으면 ‘난 디자이너야.’라고 말하고 다니세요. 명함을 만들어야 하니 나가실 때 성함 적고 가시고요. 혹시 글을 모르시면 제가 대신 적어 드리겠습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제닌이 설명을 듣고 엉엉 울어 버리자 다른 이들도 눈물을 훔쳤다.

웬 말도 안 되는 행운인가 싶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솔레아 아가씨가 슬쩍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이건 행운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선생님.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따낸 거라고요.”

“하지만, 제 평생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게다가 제 이름을 걸고 옷을 만들다니…….”

도리질 치며 낡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그녀에게서 손수건을 뺏어 든 솔레아는 그녀의 손에 제 하얀 레이스 손수건을 대신 쥐여 줬다.

“이제 옷에 수놓인 자수를 본 사람 눈에서 눈물을 뽑아낼 수 있게 옷을 만들어 봅시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 직공들이 갑자기 제자리에 선 채 회의를 시작했다.

솔레아에게 첫 번째 작품은 누구를 위해 만들면 되겠냐는 질문이 넘어왔고, 솔레아는 빙긋이 웃으며 새빨간 색의 커다란 망토를 건넸다.

“전쟁 영웅이 걸칠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지나가던 똥개가 봐도 전쟁 영웅처럼 보여야 한단 소립니다.”

“……금사를 밑단부터 착착 쌓아올리며 수놓아서, 금 구름 위를 걷는 듯 만들어도 좋겠네요.”

열의에 차 당장 작업하겠다는 장인들을 겨우겨우 건물 밖으로 내보냈다.

“면접 본 날부터 일시키면 안 돼요. 망한 직장이라고 소문난다고요. 내일 봬요, 우리.”

솔레아는 그들을 커다란 마차에 나눠 태우며 배웅했다.

여러분들을 이 공장으로 모실 마차가 내일 아침 댁으로 각자 갈 테니, 따로 차편을 마련할 필요가 없으며, 물건이 완성될 때까지 비밀 유지에 힘써 달라는 말에 직공들은 또 눈물을 쏟아 내며 솔레아에게 깊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바쳐서라도 최고의 옷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전쟁에라도 나가는 듯 결연한 말투였다.

지금 이 순간 직공들은 남은 인생을 완전히 탈바꿈시켜 준 베르고의 공녀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최고의 옷? 최고의 자수?

아주 보기만 하면 질질 울게 해 주지. 내가 굴러먹은 짬만 수십 년이야.

열다섯 명의 직공들은 눈물을 닦고 열정을 불태웠다. 아마도 절대 꺼지지 않을 충성의 불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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