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92)

53화

얼떨결에 정령들의 주인이 된 나는 한숨을 쉬며 얻어 낸 정보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1번. 사람의 마력을 모두 빼내면 죽는다.

2번. 고로 헤이먼의 마력을 다 빼내면 죽는다.

3번. 자연의 마력을 채워도 헤이먼은 죽는다. (마력의 주인인 이달론과 묶여 있기 때문이라는데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 했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진짜’ 솔레아는 죽었는지.

대답 역시 명료했다.

“응.”

“……그렇구나.”

솔레아는 마지막까지 아파하다가 죽었구나.

나는 빈 몸에 들어와 솔레아인 척 그들의 가족을 속이고 있는 거고.

조금 무거워진 내 표정을 알아챈 건지 정령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왜 울어?”

“……안 울어.”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맑은 목소리의 정령들은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말을 걸어왔다.

“아닌데. 마음이 우는데?”

“슬픈데?”

“솔레아 울고 있는데.”

끈질기게 쫓아오는 정령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나는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난 솔레아가 아니잖아. 그런데 무슨 솔레아야.”

조금은 자조적인 말투였다.

하지만 정령들은 한결같이 해맑은 목소리로 한마디씩 얹었다.

“하지만 너는 모두의 솔레아인데.”

“네가 지금 솔레아로 살고 있고, 솔레아라 불리면 솔레아지!”

“맞아, 너는 너야!”

“이름은 이름일 뿐!”

“우리 주인이고!”

짜증스럽게 그들을 노려봤다.

“그 솔레아랑 지금의 내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솔레아야!”

“하지만 인간은 매일 달라지는걸. 어제의 솔레아는, 오늘의 솔레아와 달라.”

“모든 인간은 다 그래. 매일 생각도 바뀌고, 조금씩 자라는걸.”

“인간 귀여워! 매일 자라!”

“주인. 혹시 다른 이름이 갖고 싶어?”

“하지만 이름을 바꿔도 주인은 주인인걸.”

“응! 맞아, 맞아.”

저들끼리 결론을 내린 정령들은 테이블 위에 가득한 책 주변에 둘러앉아서 떠들기 시작했다.

“조금 무섭지만.”

“그래도 솔레아는 솔레아!”

“주인 다른 이름? 뭐로 할까?”

“만점짜리 신부 하자!”

“싫어. 무당벌레가 예쁘니까 무당 하자!”

“그래. 주인 결혼 안 했으니까 무당 하자.”

결론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무당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당은 무슨.”

“웃었다!”

“주인 웃었어!”

“웃었어, 거봐! 웃으니까 훨씬 안 무섭잖아!”

갑자기 신이 났는지 정령들은 노래를 부르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난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내가 솔레아가 될 순 없다.

하지만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나’에게 지켜 주고 싶은 가족이 생겼다는 것만 선명할 뿐.

마음이 단단해졌을 무렵, 한참 동안 춤추고 놀던 정령들은 싫증이 났는지 내 일기장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그레이와 피구를 하다가 기사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 그건 무슨 미친 소리야.”

피구를 하다 말고 왜 기사가 옷을 벗어.

일기 잘 읽다가 헛소리를 하고 있어.

일기장 위에서 종알종알 떠드는 정령들에게 다가가 파리를 쫓듯 팔을 휘휘 내젓고 일기장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역시 내겐 평범한 문구로 보였다.

“‘오랜만에 그레이와 피구를 하다가 또 싸웠다. 머리에 맞으면 아웃 아니라는데 자꾸 벅벅 우기네. 피구 후진국 새끼.’라고 적혀 있잖아. 여기 어디에 기사가 옷을 벗는단 말이 있단 거야?”

내 질문에도 정령들은 태연했다.

“하지만 그건 이전의 마력이고, 우린 이후의 마력으로 이뤄진 존재인걸.”

“……이전? 이후? 그게 무슨 기준이야?”

내 질문에도 정령들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여전히 일기장 얘기만 해 댔다.

“글씨들이 완벽한 문장으로 보이지 않아!”

“마구잡이로 엉켜 있는데!”

“이게 더 재밌으니까 이대로 읽을래!”

“이거 봐! 헤이먼이랑 호수 간 얘기도 있어! ‘헤이먼과 호수에 가서 놀다가 건방진 놈을 만났다. 버릇을 고쳐 놓기 위해 놈을 끌고 가…….”

“아악! 그런 적 없어!”

질색하며 펄쩍 뛰는 내가 재밌었는지 정령들은 파도에 부서지는 하얀 거품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꺄르르 웃었다.

이후로도 정령들은 밤새도록 내 일기장 위에서 떠들며 놀았다.

그날 밤 꿈에는 기사들과 헤이먼이 내게 뇌쇄적인 눈빛을 쏘며 나를 쫓아왔고, 방으로 도망갔더니 그레이와 돈이 내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날 기다리고 있어 괴성을 지르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제대로 못 잤다는 소리다.

* * *

요새 아가씨가 이상합니다.

혼잣말을 많이 하세요. 혹시 다시 아프신 건가 잠깐 걱정했지만 전보다 훨씬 쾌활하시고 책도 많이 읽으시는 걸로 봐선 그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잠자리를 봐드리고 나오자마자 ‘좀! 조용히 좀! 아니, 아무도 죽이지 말라고. 내가 멸족시키고 싶다고 말한 적 있어? 가만히! 쉿. 집중의 박수를!’ 하고 한참 성을 내셨어요.

집중의 박수는 뭘까요.

날이 더워져서 그러신 걸까요.

햇볕은 쨍쨍하고 나무들도 푸르게 물든 완연한 여름인데 이상하게 저택 부지 내는 선선해요.

신기한 일은 그것 말고도 또 있었어요.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때마다 이상하게도 뭔가가 잡아 주는 것처럼 넘어지질 않아요. 정말 다행이죠.

덕분에 그릇을 다섯 개도 넘게 건졌을 거예요.

제일 이상한 건, 제 책입니다.

아가씨는 제게 활자로 된 건 간판도 읽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러고 사나요.

가끔 아가씨가 휴일을 주실 때면 서점에 가서 책을 사 읽어요.

이젠 아가씨께 책을 읽어 드리진 않지만, 주무시고 계신 아가씨의 잠자리를 살피러 새벽에 잠깐 방에 들어가면 침대 위엔 여전히 ‘렘샤 부인과의 위험한 계약’이 있어요.

그것만 있었다면 모른 척 나왔을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의 오른쪽 손목에서 무언가에 묶였던 선명한 자국을 발견하고선 저도 내심 놀라고 말았습니다.

……호기심도 많으신 우리 아가씨.

아가씨는 아마 제가 이런 외설적인 책을 읽어 드리는 게 부끄러워서 질색하셨나 봐요.

하지만 언젠가 이런 주제로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 아가씨가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게끔 잘 받아 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냥 재밌어서 읽는 것도 있어요.

먼젓번에 서점에 갔을 때 오랜만에 정통 로맨스가 보고 싶어져서 ‘스노우 공작님의 첫사랑’이라는 책을 쥐었는데요.

갑자기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 옆 책장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정말 이상하죠. 분명히 로맨스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뽑은 책은 ‘황녀 전하, 저를 길들이지 말아주세요.’였어요.

황녀 전하가 다른 사람을 길들이는 책을 왜 읽어야 하지 싶었지만, 뭐.

우리 아가씨는 황녀 전하와도 친하시고 무언가가 길들여지는 종류의 책을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일단 사 왔습니다.

그런데 저택에 돌아와서 읽다 보니 책갈피 표시를 해 놓은 부분이 자꾸 바뀌더라고요.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이 책을 몰래 읽나 했어요. 그래서 매일 책을 숨기는 장소를 바꿨는데도, 책갈피 위치는 바뀌어 있었어요!

……무섭지만 정말이에요.

이 방은 아가씨 전용 하녀인 제가 쓰는 작은 독방에 불과한데 대체 누가 몰래 들어와 제 책을 읽는 걸까요.

다른 책을 사 와도 그랬어요.

심지어 제가 표시한 적도 없는 부분에 밝은 잉크가 떨어진 것처럼 밑줄도 그어 놨더라니까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클라이맥스를 골라내는 안목이 뛰어난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엔 아가씨가 황궁에 가신 적도 있었어요. 저도 물론 아가씨의 하녀로서 따라갔죠.

황녀 전하를 뵈러 가신 거였어요.

유명하신 카라샤펠 황녀 전하를 그렇게 가까이서 뵙는 건 처음이었어요.

“베르고 영애. 저번에 애런의 초대를 무시했다죠?”

“굳이 응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요.”

우리 아가씨의 대답을 들은 카라샤펠 황녀 전하는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셨어요.

두 분은 굉장히 비슷한 옷을 입고 계셨어요. 옷의 품이 넓고, 치맛자락은 발목 위로 풍덩 올라가 종아리가 보일 정도였어요.

최근 아가씨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실내복이래요.

돈이 모자란 저는 못 사지만, 살롱 마리에에서 우리 아가씨에게 감사하다며 몇 벌 추가로 보내 준 걸 제가 정리한 적이 있어 기억합니다.

미인이신 두 분이 비슷하게 옷을 입고 마주 앉아 계신 걸 보고 있으니 머릿속에서 자꾸 ‘황녀 전하, 거기는 길들이지 말아 주세요.’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식은땀이 흐르는 걸 겨우 닦았어요.

우리 아가씨가 황녀 전하를 좋아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황녀 전하가 우리 아가씨를 좋아하시는 걸까요.

“……그래서, 어쩐 일로 날 보자고 했죠. 영애?”

“책을 많이 읽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업무량도 만만찮으시고요.”

“그런데?”

카라샤펠 황녀 전하의 물음에 아가씨는 제게 눈짓하셨습니다.

책 얘기를 하시려는 건가, 아니면 지금 길들여지시려는 건가, 헷갈려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던 아가씨의 미간이 갑자기 구겨졌습니다.

“너 무슨 생각 하는지 들린다. 그거 아니니까 가서 오늘 가져온 통롤러 들고 와.”

“……아. 네.”

제 생각도 읽으시나 봐요.

통롤러는 스트레칭 도구입니다.

저도 아가씨께 받아서 매일 저녁마다 그 위에서 몸을 굴려요.

실력 좋은 마법사를 무급으로 고용하신 것 같은데 도무지 말씀을 안 하셔서 마법사의 정체는 아무도 모릅니다.

통롤러를 보신 황녀 전하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하게 올라갔습니다.

“이게 뭐지?”

“통롤러라는 겁니다. 전하의 뭉친 어깨와 등, 하체 부종까지 시원하게 풀어 드려요.”

설명을 들은 황녀 전하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날 위해 준비했어?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내가 아플까 봐 걱정되어서?”

하지만 우리 아가씨는 단호했습니다.

“아니요. 이거 사용하시고 좋으시면 대대적으로 알려 달라고요. 광고 같은 거죠.”

“음?”

황녀 전하가 불쾌하신 듯 미간을 찌푸리셨지만 솔레아 아가씨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습니다.

“황궁에 놀러 오라 하셨잖아요. 그래서 선물까지 들고 왔죠, 저는.”

“……이 내가 알면서도 속아 줘야 한다니. 속이 쓰린데.”

“자, 시범을 보여 드릴게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나아서. ……사람들을 물려 주시겠어요?”

“나와 단둘이?”

“말 좀 그렇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전에 내가 친구 하자고 편지 보냈을 때 그대가 거절했으니 그렇지.”

“친구가 하고 싶으니 시녀로 들어오라 하셨잖아요. 그건 싫다니까요.”

“친구란 가까이에 있어야 해.”

“거리가 멀어도 마음으로 가까우면 친구죠.”

“우리가 마음으로 가깝나?”

황녀 전하가 느긋하게 웃으시며 고개를 기울이셨지만 아가씨의 관자놀이에는 핏줄이 섰습니다.

통롤러를 팔러 오신 것 같은데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자 빡치셨나 봐요.

빡친다, 는 아가씨가 상단 목록을 정리하거나 염색 공장과 일정을 맞출 때마다 씨발 뒤에 붙이는 말이에요.

아무튼 황녀 전하가 모두 물러가라 하셨어요.

그래서 방에 있던 황녀님의 시녀와 기사, 저까지 모두 물러났습니다.

잠시 후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잠깐! 이거 아프잖아! 아악!”

“처음엔 좀 아파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다 하고 일어나시면 시원해지실 거예요!”

“아악!”

“전하! 조금만 참아 보세요!”

저와 함께 밖에 계시던 기사님이 문 앞으로 바짝 다가섰습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들어가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경! 들어오지 마!”

황녀 전하의 말에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비명은 차츰 잦아들었습니다.

“어으……. 으어어…….”

“시원하시죠, 등이 쫙 펴지시죠? 이렇게 굴려 보세요. 전하.”

“……아으으…….”

“통롤러 위에 척추뼈를 대고 누우신 뒤 양팔을 벌려 보세요. 가슴이 쫙 펴지시죠?”

“허으으…….”

대체 뭘 하셨던 걸까요.

아무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통롤러는 귀족들 사이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습니다. 잘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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