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주인이 누구냐고 거듭 물었지만 그들은 빙빙 돌려 말하며 대답을 피했다.
‘주인은 자고 있어!’
‘주인 깨워야 돼!’
“주인이 누군데?”
‘주인은 주인이지!’
딘딘은 딘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더 이상 물어보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질문을 바꿨다.
“너희는 뭔데.”
‘우리?’
‘나?’
‘너 말고 우리 물었잖아!’
‘너희라고 했잖아.’
‘너희가 누구냐고?’
‘너가 누구냐고?’
‘자기가 누구냐고 우리한테 물었다고?’
아이고 두야. 골머리가 저려 온다.
머리를 붙잡고, 다시 설명하려는 찰나 전혀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너는 특별한 이방인이지.’
“특별한, ……이방인?”
혹시 얘들은 내 존재를 알고 있나? 그럼 돌아갈 방법도 알고 있는 건가.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
내 질문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한 음성이 대답했다.
‘그건 모르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건 알아!’
‘그리고 무섭다는 것도 알아!’
‘주인 말고 우리랑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처음이야!’
‘주인은 사람 아닌걸!’
‘바보야! 그거 말하면 어떡해!’
‘난 바보 아닌데!’
‘맞아. 우리는 바보 아니야.’
“묻는 말에 한 명씩. 하나씩. 똑바로. 대답해.”
어디 있는지를 모르니 허공에 눈을 부라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는지 소란스럽던 목소리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시 질문한다. 똑바로 대답해. 내가 왜 이 몸에 들어왔는지 알아?”
‘……몰라.’
“방금 대답에 시간 걸렸잖아. 똑바로 말 안 해?”
‘무서워…….’
‘성격 별로 안 좋아.’
‘주인 보고 싶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 잔뜩 힝구가 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얘들아.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야. 내가 뭐가 무섭다고 그래. 얼굴 안 보이는 귀신 같은 너희가 더 무섭지.”
‘우린 귀신 아니야! 정령이야!’
“정령이라고?”
아이고, 판타지 세상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하긴 마법이 있는데 정령이라고 없을 리 없지.
대화 주제가 아주 널뛰기하듯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바람에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자, 정리할게. 나는 특별한 이방인이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는 너희도 모르고, 너희는 정령이고. 맞지? 그럼 왜 너희 목소리가 나한테 들리는 거야? 그리고 얼굴은 왜 안 보여?”
‘정리했대!’
‘정리!’
‘정리가 누구야?’
‘정리 지금 자고 있을걸?’
“잠깐, 잠깐!”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휘휘 젓자 다시 조용해졌다.
유치원생들 100명 모아 놓고 인터뷰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집중시키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슬슬 빡이 올라오는 걸 가라앉히기 위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령들은 내 눈치를 살피는지 다시 조용해졌다.
“정령들아. 모습을 보여 주겠니?”
‘주인한테만 보여 줄 거야!’
‘주인만 우리 볼 수 있어!’
‘원래는 목소리도 아무도 못 듣는데?!’
‘그러게!’
‘쟨 왜 우리 목소릴 듣지?’
‘야한 일기를 쓰니까!’
‘안 야한데!’
‘하지만 야하게 보이는 일기를 쓰니까!’
“스톱! 누가 들으면 내가 일기로 야설 쓰는 줄 알겠네! 그리고 왜 자꾸 무섭다고 하는 거야. 나 안 무섭다니까.”
몇 초 뒤, 정령 하나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력은 하나도 없지만 받아들이는 데에도 끝이 없잖아. 바닥이 없는 그릇은 무서워.’
“그릇? 내가 뭐, 만신 받아들이는 무당이라도 된다는 거야?”
‘무당?’
‘만신? 만신이 뭐지?’
‘만점 신랑?’
‘만점 신부!’
‘자기 입으로 만점짜리 신부라고 한 거야?’
‘결혼 안 했으니까 신부 아니잖아.’
‘우리 주인도 만점짜리야.’
‘좋아! 주인이랑 맺어 주자! 만점짜리니까!’
‘……주인이 좋아할까?’
‘괜찮아! 무섭지만 좋은 사람 같아!’
‘그런데 무당이 뭐야?’
‘무당벌레인가?’
‘무당벌레 예뻐!’
‘좋아!’
‘맞아! 무당 좋아!’
“집중의! 박수를!”
짝. 짝. 짝.
나도 모르게 유치원생들에게 하듯 박자에 맞춰 박수를 세 번 쳐 버렸다.
예전에 일했던 식당 사장님의 딸이 유치원 선생님이었는데 취하기만 하면 허공을 보고 ‘집중의 박수를! 짝. 짝, 짝.’ 하고 쳐 대 여간 무서웠던 게 아니었다.
……감사해요, 김 선생님. 그때 귀신 보신 줄 알고 무서웠지만 이렇게 도움을 받네요.
다행히 세계는 달라도 박수 세 번은 먹히는지 정령들이 조용해졌다.
‘재밌어 보여!’
‘따라 할래!’
“자, 재밌어 보이지? 내가 ‘집중의 박수를!’ 하면 너희는 박수 세 번 치면 돼. ……집중의 박수를!”
‘짝! 짝! 짝!’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눈으로 직접 볼 순 없어도 나를 뚫어지게 지켜보며 집중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쩐지 귀여운 기분이라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 조곤조곤 묻기 시작했다.
“이제 물어볼게.”
‘네!’
“전에 나한테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잖아. 기억나?”
‘네!!’
여러 목소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원하는 만큼 받아들이고, 또 뱉어 낼 수 있다 했지. 그럼…… 다른 사람의 마력을 빨아들인 후에 갖다 버리고 또 다른 마력으로 채우는 것도 가능한 건가?”
나를 이용해서 헤이먼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헤이먼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응? 하지만 사람 마력을 빨아들이면 죽는데!’
‘바보야! 안 죽을 만큼만 빨아들이면 되지!’
‘분홍 머리는 죽을 텐데.’
‘그래. 분홍 머리는 이달론과 계약이 되어 있으니까.’
‘못 해, 못 해!’
정령이라도 이달론과의 계약을 끊을 순 없는 건가.
그럼 더 이상 볼 일은 없었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았어. 알려 줘서 고마워. 잘 가.”
‘……우리 가?’
“마력으로 헤이먼을 도울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야. 난 마력 없이도 잘 살아.”
‘하, 하지만 다치면 마력이 필요하잖아.’
‘우리 가면 너 심심하지 않을까?’
“나한텐 가족이 있는데 왜 심심해. 괜찮아.”
‘……우리는 우리뿐인데. 우리는 말 통하는 사람이 너뿐인데.’
‘마력 있으면 좋잖아……. 우리 보내지 마.’
“다른 사람 마력 뺏으면 죽는다며. 난 살인자가 되면서까지 치료받고 싶지 않아. 내가 원래 있던 나라에선 마력 없이도 잘 살았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정령들이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수군수군하는 게 들려왔다.
‘자연의 마력을 써!’
‘우리가 모아 놓은 마력 줄게!’
‘원래 주인 거지만 너 줄게!’
“필요 없다니까. 너희 주인 돌아오면 줘.”
나는 그들에게 신경을 끄고 책이 쌓인 탁자 위로 갔다.
오늘 읽어야 할 책과 신문을 정리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애들이니 곧 가겠지 싶었다.
‘너 아니면 우리는 말할 사람이 없는데…….’
‘불쌍하지 않아?’
“뭐가 불쌍해. 다들 그렇게 살아.”
‘힝, 매몰차.’
그때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그럼 임시 주인 시켜 줄게!’
‘그래! 마력 써!’
‘마력 있으면 할 수 있는 일 많아!’
‘맞아! 마물도 죽일 수 있고!’
‘길들일 수도 있고!’
“마물 길들여서 뭐 해. 난 돈 벌어서 영지 부흥시키고, 헤이먼을 자유롭게 해 준 다음에 여기 뜰 거야.”
조건을 걸어도 통하지 않자 정령들이 조용해졌다.
갔나? 이제 좀 집중할 수 있겠다.
그때, 바로 눈앞에 손바닥만 한 작은 형체가 반짝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주인 해 줘!”
“악!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는 순간, 작은 별처럼 빛나는 정령들이 우르르 나타나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임시 주인 해 줘!”
“마력 써!”
“그러면 너희 집 지켜 줄게!”
“네가 아끼는 가족들 지켜 줄게!”
“괴롭히는 사람들 혼내 줄게!”
“그리고 항상 임시 주인을 제일 우선으로 할게!”
“주인 안 다치게 항상 보호 마법 걸어 줄게!”
“임시 주인 해 줘!”
“주인이 되면 정령들이 지킬 수 있어!”
색색깔로 빛나는 정령들이 내 팔과 어깨에 달라붙어 더욱더 강하게 빛을 뿜어내며 보채기 시작했다.
“잠깐만, 이 빛 좀 줄여! 밖에서 누가 보겠다.”
“싫어!”
“우리가 조용해지면 또 우리 버릴 거지!”
“버리지 마!”
버린다는 말에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너희 그러면 저런 통나무 100개 만들 수 있어?”
내 방에 굴러다니는 통나무 폼롤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정령들의 눈동자가 통나무를 향했다.
정령 몇 명이 통나무 쪽으로 날아가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그중 하나가 짧은 다리로 짝다리를 짚으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이런 거 천 개도 만들어!”
“……그래?”
나도 모르게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번졌다.
“내가 너희 능력을 몰라서 그러는데, 이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 아무래도 그건 좀 힘들겠지?”
살짝 얼굴을 기울인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정령들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내 눈높이에 맞춰 높이 날아올랐다.
“할 수 있어!”
“정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심하듯 물어보자 정령들이 공중에서 펄펄 뛰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지금 당장도 할 수 있어!”
“그 정돈 갖고 있는 마력의 손톱만큼도 안 돼!”
“자연이 끝이 없는데 우리 마력에 끝이 어디 있어!”
……좋은 거 같은데?
내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면 헤이먼이 마력을 쓸 일도 줄어들 테고 그럼 당연히 헤이먼의 마력을 아낄 수 있다.
게다가 사업에도 이용할 수 있고.
생각에 잠겨 대답을 하지 않자 정령들이 이번엔 내 얼굴에 바싹 달라붙었다.
오동통한 손바닥으로 내 볼을 붙잡고 바싹 달라붙어 애정을 갈구했다.
“그러니까 우리 목소리 계속 들어 줘.”
“안 보고, 안 듣겠다고 하지 마.”
“우리 주인도 잠들었단 말이야.”
“얼굴도 보여 줬잖아.”
“매일 좋은 꿈만 꾸게 해 줄게.”
“하늘의 별도 달도 다 너를 위해 반짝이게 해 줄게.”
프러포즈도 아니고 뭐라는 거야.
저절로 웃음이 나는 걸 꾹 참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래. 좋아. 임시 주인 해 줄 테니까 이거 상용화하는 데 너희가 도움을 줘야겠다.”
발로 통나무를 툭 치며 말하자 정령들이 가슴이 튀어 나갈 정도로 앞으로 내밀며 답했다.
“물론이지! 주인!”
정령들이 포르르 날아와 내게 안겼다.
안겼다기보단…… 몸에 달라붙은 것 같았지만.
사지로 나를 꼭 잡은 채 내 몸 곳곳에 달라붙어 있는 정령들이 쪽쪽 뽀뽀를 퍼부어 댔다.
“임시 주인! 좋아!”
“무섭지만 좋아!”
“욕도 많이 하지만 좋아!”
나는 가만히 굳은 채 서 있다가 얼른 말했다.
“혹시 너희 힘을 빌리면 내 일기장에 걸린 마력도 풀 수 있어?”
정령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며 서랍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손바닥만 한 애들이 서랍 앞에 주르륵 서서 한참 큰 키의 나를 멀뚱멀뚱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여워서 당장에라도 주머니에 넣고 싶었다.
“열어 줘! 주인!”
“너희 서랍도 못 열어?”
“하지만 마력의 근본엔 손댈 수 없는데?”
“주인이 허락해 주면 우리가 펼쳐 볼게!”
마력의 근본이 뭐지?
일단 서랍에서 일기장을 꺼내 보였다.
“이게 뭔지 알아? 너희 눈엔 어떻게 보여?”
“마력의 뿌리?”
“근본?”
“원리?”
많은 단어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통하지 않아. 하지만 주인은 특별하고 마력이 아예 없으니까!”
“마력도 없으면서 근본을 부수다니. 진짜 폭력적이고 무서운 이방인 주인이야.”
“맞아, 맞아.”
결국 결론은 똑같았다.
마법보다 강한 주먹으로 정령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주인이 된 폭력적이고 무서운 이방인.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생물학적 아버지가 남긴 머니마니대출의 빚을 열심히 갚는 현대인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