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 *
며칠 뒤, 라트엘이 다급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아가씨.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앗, 네.”
응접실에 들어가자 라트엘은 의자를 빼 주는 매너를 잠깐 보이더니 내가 상석에 앉자마자 얼른 사선의 자리에 매끄럽게 앉아 빠르게 말했다.
“제국 전체를 도는 상단은 우란, 뤼블러스가 있습니다. 관련된 서류는 이쪽을 살펴보시면 됩니다. 여기 보시면…….”
설명하기 위해 라트엘의 길고 흰 손가락이 서류 위를 부드럽게 훑었다.
손이 참 예쁘네.
라고 생각하던 찰나 라트엘의 검지와 엄지가 맞물려 딱 소리를 냈다.
“아, 깜짝이야.”
“제 손이 예쁘긴 하지만 아가씨는 글을 보셔야죠.”
“……저기요. 라트엘 원래 이런 성격이에요?”
“네, 저는 능력주의라 저 정도로 뛰어난 사람은 가끔 건방져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수 없지만 타당하네.
라트엘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우란과 뤼블러스는 규모가 비등비등하지만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 만약 선택하신다면 한 상단하고만 물꼬를 터야 할 겁니다. 다만 우란은 콧대가 높아서 이런 도전적인 사업엔 끼어들지 않을 수도 있죠.”
“……큰 상단이라면 뤼블러스라고 사정이 다를 것 같진 않은데.”
“까다롭게 굴기야 하겠죠. 그래도 뭐, 저희가 지고 들어가는 입장이니까요.”
“흠……. 그걸 바꿔 볼 생각은 없어요?”
앤과 몰래 나갔다 온 이후에도 운동하는 척 후원을 뛰다가 뒷문을 통해 몰래 시장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스치듯 만나 본 상단주들은 대부분 콧대가 높았고 거만했으며 상인들은 그런 상단들의 횡포에 질린 것 같았다.
그러니 물건을 구입해야 하는 영주민들 입장에선 더하겠지.
우리까지 지고 들어가 물건을 팔아 달라며 굽신거릴 순 없었다. 악순환 속으로 같이 기어들어 가는 거잖아.
내 말에 라트엘은 피식 웃었다.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베르고는 길거리의 아이들을 입양했기 때문에 귀족답지 않다고 무시를 당하잖아요. 그쵸?”
“……예, 그렇죠.”
“그 시선을 바꾸는 거예요.”
“어떻게 말입니까?”
“민생을 생각하는 귀족. 영주민들을 진심으로 살피는 귀족. 그들이 직접 만든 물건. 그렇게요. 염색 양모는 사치품이 될 테니 그걸로 벌어들인 수익 중 일부분을 기부하고요.”
“부유한 귀족들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라트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동스럽긴 하지만 그건 너무 이상적인 생각입니다. 성공을 해야 가능한 얘긴데, 베르고의 이름을 대면 다들 꺼릴 테니까요.”
회의적인 반응인 게 당연했다.
하지만 왠지 도전하고 싶었다.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 궁극적 목표는 그거예요. 꿈이 커야 파편도 크다던데요.”
살짝 미소 지은 라트엘은 손목시계를 대신해서 들고 다니는 오래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빠르게 이어 말했다.
“그 허황된 꿈을 위해서 일단 염색 공장에 샘플 주문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무슨 색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그간 봤던 초상화들을 더듬었다.
귀족들은 온갖 화려한 색으로 물든 겉옷을 걸치곤 했다.
“빨간색이 좋겠어요. 아주 시뻘겋고 화려한 빨강. 일단 그걸로 테스트해 보고, 색감 가장 잘 뽑는 업체랑 계약 진행하죠.”
“예, 알겠습니다.”
라트엘이 작은 수첩에 필기하는 동안 나는 얼른 덧붙였다.
“그리고 자수를 놓을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공장에 다니는 사람 말고 동네에서 한 20년 바느질만 한 베테랑들이 있을 거예요. 그쪽을 알아봐 줘요.”
“……자수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충분히 전문가일 텐데요.”
라트엘이 은근히 못마땅하단 말투로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원래 이런 손 기술은, 특히나 바느질은 동네에서 입소문으로 유명한, 간판도 없는 집이 제일 잘한단 말이다.
이건 양보할 수 없었다.
“분명히 뛰어난 사람이 있을 거예요.”
“아. 살롱에 주문했던 드레스들이 모두 도착을 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아가씨의 방에 쌓여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마리에가 동봉하여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를 펼치자 마리에의 깔끔한 글씨체가 주르륵 이어졌다.
의례적인 인사말 아래로 내가 원하던 말들이 적혀 있었다.
‘파격적인 디자인이라 만들면서 즐거웠지만, 이걸 왜 걸어 두라 하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살롱에 오신 귀족 아가씨들이 살펴보시곤 비슷한 디자인으로 부탁한다며 주문을 하고 가시더라고요. 잠옷을 입고 정원을 거닐 순 없고, 매일 긴 드레스를 입는 건 불편하다 하셨어요. 저택 내에선 이런 옷도 나쁘지 않겠다 하시더라고요.’
역시.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지.
한국에서도 집 들어가면 제일 먼저 나를 옥죄던 속옷부터 벗어 던지기 마련인데 어떻게 통풍도 제대로 안 되는 옷을 몇 겹씩이나 매일 입겠어.
그것도 밟으면 자빠지기 일쑤인 긴 드레스를.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문단을 읽었다.
‘참, 그리고 황궁에서도 주문이 왔어요. 베르고의 공녀님이 주문한 디자인이라는 소문을 들으셨는지 황녀 전하께서 공녀님과 똑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 달라 명령하셨어요.’
……카라샤펠 황녀?
‘내가 그대를 가지고 싶듯, 그대도 날 가질 거라면.’
정수리부터 발뒤꿈치까지 또 싸해지기 시작했다.
‘황녀 전하가 아가씨와 같은 옷을 주문하셨다는 소문까지 나기 시작했으니 곧 손님이 밀려들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드레스는 사실 예행연습이었다.
제르노아 제국의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지 아닌지 궁금했던 건데.
의류라면 꽉 잡고 있는 마리에에게 확실히 호감을 사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황녀까지 홍보를 해 줄 줄이야. 고맙긴 한데…….
부담스러운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마리에의 편지를 접었다.
“라트엘. 사람을 모으면 살롱의 힘을 빌려서 공방을 운영하는 것도 좋겠어요.”
“이러시려고 드레스를 일부러 거기 걸어 두라 하신 겁니까?”
“네, 뭐 겸사겸사. 아, 그리고 샘플이 완성돼도 상단으로 가져가지 말아요.”
“물건을 보여 주지 않고 어떻게 계약을 하겠단 말씀입니까?”
“홍보를 먼저 할 거예요. 전쟁에서 돌아오는 승자의 어깨에 망토를 걸치게 해야죠. 그럼 상단들이 양모를 구하겠다고 나설 거예요.”
“……티온 도련님의 귀환 일정에 맞추려면 조금 촉박하겠군요.”
“신문에 엄청 크게 기사가 나가야 해요.”
“예, 알겠습니다.”
“목마른 놈들이 우물을 파도, 파도 안 나올 때, 갈증에 돌아 버릴 때, 그때 파는 거예요.”
라트엘은 잠깐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픽 웃었다.
“왜 웃어요?”
라트엘은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굳히고 수첩을 접었다.
“전 이제 퇴근 시간이라 이만.”
……아까 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잡아끈 게 자기 퇴근 시간 때문이었나.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라트엘이 미련도 없이 일어섰다.
“아, 라트엘 잠깐만요!”
나는 일어서는 그를 붙잡아 다시 앉히곤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시계예요. 내가 저번에 부쉈잖아요.”
상자를 열어 보고도 라트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거기 주인이 요새 젊은이들은 이런 거 많이 들고 다닌다던데. 똑똑한 젊은이가 쓸 거니까 튼튼하고 예쁜 걸로 달라고 했어요.”
다행히 기사들을 대동하고 시장을 다녀온 적도 있어서인지 라트엘은 언제 샀는지에 대해 묻진 않았다.
하지만 너무 말이 없었다.
“……마음에 안 들면 바꿀까요? 혹시 이번엔 레체타가 아닌 아마델로 제품으로 사 보려고 했어요?”
시계 상자를 물끄러미 보던 라트엘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아가씨. 안목이 뛰어나시니 양모 장사는 걱정이 없겠네요.”
그리 말하곤 곧장 응접실을 나서려던 라트엘이 멈칫하더니 내 쪽으로 돌아섰다.
“함부로 동정하지 말라는 말, 죄송했습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아직 사과할 때가 아니에요.”
“예?”
라트엘의 두 눈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나는 정말로 지금 사과를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사과 듣고 싶지 않아요. 이제 시작이에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라트엘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상자에서 시계를 꺼내 그의 왼손에 채워 주며 말했다.
“전에 비싼 시계는 권력의 크기를 상징한다고 했죠? 라트엘.”
“……예.”
시계를 다 채운 후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다음에, 우리가 성공해서 그 누구도 개소리 못 하게 되면요. 그때.”
시계가 채워진 그의 손목을 살짝 그러쥐고 이어 말했다.
“훨씬 비싼 시계를 사 줄게요. 보란 듯이 차고 다녀요. 출신이든 뭐든 라트엘에 관해선 어떤 새끼도 찍소리 못 하게.”
라트엘도 어디 귀족가의 사생아라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공작이 자신의 보좌관으로 고용하겠다며 데려왔댔지.
제 출신 때문에 다들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으니 라트엘은 공작의 이미지를 생각해 부러 검소하게 하고 다녔겠지. 뛰어난 능력은 공작을 위해서만 쓰면서.
어째 이놈의 집구석엔 사연 없는 놈들이 없냐.
찌르면 인간극장이야.
내 말에 라트엘의 눈이 잠깐 커졌다.
라트엘은 투명할 정도의 검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살짝 미소 지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 손목에 다음 시계를 채워 주실 때까지.”
말을 마친 라트엘은 꾸벅 인사한 후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이곳의 여름은 짧다.
그러니 지금부터 염색 양모를 바짝 준비해서 긴 겨울에 팔아 치우고, 여름엔 ‘짧은 여름, 이대로 지나칠 순 없다!’ 이런 멘트로 기사에 광고 팡팡 내보내면서 또 무언가를 팔아 치워야지.
자체 사업이 늘어야 공작령의 힘이 세질 거야.
마리에의 의류 사업에 투자할 수도 있고, 그 외에도 투자할 만한 다른 사업체를 찾아보고 키워 나가면 충분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 방으로 향했다.
앤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하며 방문을 열었다.
“아가씨! 주문한 드레스들이 왔어요! 공작님이 추가로 주문하셨던 셔츠와 바지도요! 그리고 여기 이것도요!”
넓은 침대 위에 옷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와중에 앤이 내게 내민 건 금가루가 뿌려진 듯 반짝반짝 빛나는 초대장이었다.
“황궁에서 온 초대장이에요.”
“……황궁? 누가?”
카라샤펠 전하인가. 혹시 커플룩 입고 산책하자는 제안인가 했지만 초대장은 황녀가 보낸 게 아니었다.
‘애런 베일리 폰 델라스케인 드 제르노아’
썅.
개런 그 자식이 보낸 거잖아? 그냥 태울까.
아냐, 황족이니까 한 번 참을까.
아. 젠장.
신경질적으로 방의 소파에 걸터앉아 초대장을 찢듯이 펼쳐 읽었다.
“그대가 내게 저지른 결례를 용서받을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티 파티에 초대……. 뭐? 결례를 용서받을 기회를 줘?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내 눈치를 살피는 앤을 내보내고 혼자 방에 남은 나는 길길이 날뛰었다.
한참 씩씩거리던 그때, 이제는 반갑기까지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 아직도 화나 있잖아!’
‘왜 맨날 화나 있지?!’
‘또 누가 화나게 한 거야! 이씨, 우리가 화 풀어 줘야 하는데!’
음?
초대장을 밟던 발을 치우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러곤 입을 열어 소리 내 물었다.
“내 화를 왜 너희가 풀어 줘? 뭐 때문에?”
‘들리나?’
‘들리는 것 같아!’
“너희는 대체 뭔데. 누구야?”
잠깐 조용하던 허공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려.’
‘마력을 잔뜩 쌓아 두고 기다려!’
혹시나 하는 들뜬 마음으로 물었다.
“내가 너희의 주인이야?”
‘아니. 넌 그냥 무서운 사람.’
……너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