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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192)

50화

특이한 보라색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함인지 솔레아는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 채 말했다.

다행히 하녀라는 신분 탓인지 그런 자세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입고 있는 옷마저 주인의 옷을 짓고 남은 옷감을 선물받아 만든 펑퍼짐한 드레스처럼 보였다.

클레버는 이내 신경 쓰지 않고 빌과 함께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이 장갑은 어떠십니까? 레이스를 섬세하게 박아 디자인이 화려합니다. 공장에서 돌린 게 아니라, 직접 한 땀 한 땀 엮은 레이스라 짱짱하지요.”

“좋지만 내가 장갑을 선물할 이는 손이 꽤 큰 남자라서.”

“아, 참 그랬지요.”

허허실실 사람 좋게 웃은 클레버는 냉큼 남성용 장갑을 보여 줬다.

남자에게 매달 꾸준히 장갑을 선물할 일이 뭐가 있지, 하는 고민은 접어 두고서.

사내를 마음에 두셨나, 하는 생각도 잠깐 들긴 했지만 그렇다기엔 주야장천 장갑만 선물하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뭐, 그게 중요한가! 돈 많은 손님인데!

클레버는 생글생글 웃으며 온갖 고급 장갑들을 선보였고 빌은 그가 보여 준 것들을 모두 구매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괜찮겠군!”

솔레아는 그런 빌을 보며 귀엽다는 듯 작게 웃었다.

남이 보면 장갑 먹는 도깨비라도 키우는 줄 알겠네.

클레버가 다른 곳에서 만든 가죽 장갑도 보여 드리겠다며 빠르게 걸어가는 사이, 솔레아는 빌의 귀에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장갑은 이제 그만 사셔도 될 것 같아요, 빌.”

“아, 예.”

빌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앞서 걸어가는 클레버에게 호기롭게 외쳤다.

“클레버! 장갑은 이제 됐으니! 손에…… 손에 할 만한……. 그래, 반지! 반지를 보여 주게!”

“빌! 우리 오빠한테 반지를 선물하려고요?”

솔레아가 다급하게 빌의 소매를 잡고 물었지만 그는 한 치의 의심조차 없는 맑은 눈으로 대답했다.

“예! 아니, 응! 어차피 손에 하는 거니까 의미야 비슷하겠지!”

장갑보다 더 비싼 반지를 찾는다는 말에 클레버는 입이 귀에 걸릴 듯 웃으며 헐레벌떡 날듯이 뛰어왔다.

“반지 말씀이십니까! 요즘 여성분들이 많이 찾으시는 반지는 여기 이 루비 반지로…….”

“아니! 아까도 말했듯 내가 선물할 이는 남자네, 클레버!”

“오…….”

클레버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그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 이 순간 클레버에게 중요한 것은 손님이 선물을 줄 대상이 아니다.

오직 반지의 가격일 뿐.

“남성분들이 많이 끼시는 반지는 이쪽입니다!”

“그래!”

빌이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를 말릴 타이밍을 놓친 솔레아는 허공에 뻗은 손을 거둬들이며 이를 악물었다.

“아니, 쟤는 대체……. 아니, 하……. 너무 순수하고 당당하잖아. 아까 태어났나.”

얼른 고개를 돌린 솔레아는 앤이 비상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 최근에 무슨 소설 읽었어?”

“예? 아니요? 무슨, 참. 남자끼리 사랑하는 소설 그런 거 안 읽었는데요. 비주류잖아요. 저는 주류만을 좇는다고요. 에이, 그건 서점 제일 구석 아래에 있고, 그쪽으론 가지도 않아요.”

솔레아는 이마를 짚었다.

무슨 소설 읽었냐고만 물었는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줄줄 대답하는 거하며, 그 책의 위치까지 알고 있으니 읽어 봤다는 거겠지.

“앤. 너 말이야.”

“아가…… 읍! 저 정말로 제일 많이 읽는 건 여자랑 남자랑 사랑하는 거예요! 신분 격차도 좋아하고, 인외 존재한테 사랑받는 인간 소녀 이야기도 좋아하고! 아, 최근에 읽은 건 어떤 황자가 마구간지기한테 반한 건데요. 마구간지기의 속마음이 들리기 시작하는데 그 여자가 아주 음탕해서요.”

“아니. 됐어.”

솔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밖에서 봤을 때도 커 보였던 백화점은 생각보다 내부가 훨씬 깊었다.

“시계도 파네.”

솔레아는 시계를 파는 매대 앞에서 한참 고민하다 라트엘에게 선물할 시계를 골라 구매했다.

함께 시계를 사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그가 너무 바쁜 탓에 날짜를 잡기가 여의치 않았다.

“시계는 공작님 거예요?”

“아니? 라트엘한테 선물하려고. 전에 내가 부쉈거든.”

“뭐, 뭐 하시다가 시계를…… 부수셨어요? 혹시 벽으로 거칠게 미셨나요?”

“너 책 좀 끊어라. 제발. 좀.”

그때, 누군가가 솔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검은색 짧은 단발머리에 깔끔한 인상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말끔히 웃으며 솔레아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손님. 불편하시면 안쪽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방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솔레아는 한쪽 눈썹을 미미하게 찡그렸다가 이내 표정을 풀곤 공손히 대답했다.

“저,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저는 몸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가씨가 아니라, 나사니엘 도련님의 하녀고요.”

여자의 눈이 솔레아가 입은 옷으로 향했다.

“아, 옷이 저랑은 안 어울리죠? 이건 전에 일하던 곳의 주인마님이 남는 옷감이라며 주셔서요.”

솔레아는 머쓱하게 웃으며 부끄럽다는 듯 드레스를 꾹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괜히 묻은 것도 없는데 옷을 툴툴 털어 내고 손거스러미를 떼어 내려는 듯 손끝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단발머리 여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예, 손님. 말씀하신 부분 이해했습니다. 다만 저는 신체적 불편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손님이 저희 백화점을 편히 구경하셨으면 하는 마음에 권유드린 것입니다. 부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혹여 제가 손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긴말을 마친 여자는 아까와 한 치의 다름도 없이 겸손한 동작으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마치 솔레아가 공녀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이 적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손님 응대.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솔레아가 대뜸 반말로 물었음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두 손을 모아 대답했다.

“이안 클레버입니다. 이 백화점의 주인인 토니 클레버의 딸이고요.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내가 누군지 아나?”

주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묻자 이안은 똑같이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누구신지는 모릅니다. 다만 귀하신 분인 거 같아 그에 맞는 대우를 했을 뿐입니다.”

“그건 어찌 알았고?”

“주인이 하녀에게 남는 옷감을 선물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런 자투리 천으로 보닛과 드레스 세트를 만들기는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색이 흔하긴 하나 원단의 짜임을 보니 올봄에 바카라에서 직접 뽑아 낸 옷감이 분명한데, 그런 귀한 것을 하녀에게 줬을 리 만무하고요. 그리고 신발이…….”

“신발?”

솔레아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 드레스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걸으실 때 살짝 보였는데 구두가 아니라 낮은 굽의 단화를 신고 계셨지요. 단화는 주로 평민들이 신어서 그런 귀한 가죽으로는 제작되지 않습니다. 아가씨가 편히 걸으셨으면 하는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귀한 신발이 아닌가요?”

솔레아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이안을 바라봤다.

그러곤 그녀의 곁을 지나며 짧게 말했다.

“다시 찾겠다, 이안.”

“예, 아가씨.”

그대로 멀어지려는 순간 이안이 덧붙였다.

“혹시 정체를 숨기시려거든, 데리고 계신 하녀를 곁에서 나란히 걷게 하십시오.”

솔레아는 살짝 고개를 돌려 끄덕였다.

저런 아이는 흔하지 않다. 저 아이가 원하는 것이 신분 상승인지, 단순히 돈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것을 원하든 간에 저런 인재는 반드시 곁에 두어야 했다.

기어코 반지를 사고 돌아온 빌은 환하게 웃었다.

“이제 갈까요? 갈까! 더 구경하실 겁, 건가?”

빌의 곁에 선 클레버는 백화점 하루치 수익을 한 명한테 바짝 땡겨서인지 얼굴에 불그스름하니 열이 오른 채 흥분한 상태였다.

“저희 백화점 중정에는 분수대가 있습니다! 구경하고 가시죠!”

“오! 처음 듣는 얘기군! 같이 가시겠습, 겠나? 갈까?”

솔레아는 주먹을 말아 쥔 채 짧게 대답했다.

“예.”

사라, 다음에 다시 만날 땐 네 오빠를 세상 물정에 좀 푹 담갔다가 건져 오렴. 무슨 거짓말을 저렇게 못한대니.

넓은 중정 한가운데 위치한 분수대는 조각 하나하나가 섬세했다.

클레버는 자랑스럽다는 듯 배를 내밀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정말 아름답지요! 투들로 자작가에서 예술 지원 사업을 했지 않습니까? 그쪽과 계약을 해서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들었지요! 이거 보러 오시는 손님들도 꽤 많습니다.”

투들로.

세밀하게 세공된 분수대 밑부분 문양을 보고 있던 솔레아의 눈 아래가 미세하게 떨렸다.

“투들로 자작가, 나도 들어 본 적 있네.”

빌이 대답하자 클레버는 큰 한숨을 푹 내쉬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예, 그럼요. 돈깨나 만지던 자작가 아닙니까. 이 분수대를 만들 때 백화점 매상의 20%를 달라고 하길래 기함을 했습니다. 백화점 전체 매상의 20%를 가져가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따져도 봤는데, 영 안 통하더라고요.”

“저런. 그래서 어찌 했나.”

“어쩔 수 없죠. 안 그러면 완공된 중정을 분수대 포함해서 다 부순다는데……. 그냥 해 달라는 대로 했죠.”

“했는데?”

클레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워낙 무시무시해서…….”

“뭔데 그러나. 말해 보게.”

“투들로 자작이 빚까지 져 가면서 해상 무역에 투자를 하셨나 본데 태풍이 들이닥쳐서 그 많은 무역선이 모조리 난파되었답니다.”

“저런.”

“그 충격 때문인지 투들로 자작과 부인께서 연달아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고 며칠 뒤에 아드님이 오셔서 그 계약서를 파기하는 조건으로 5,000만 제르를 달라 하시더라고요. 큰돈이긴 했지만 당장 사정이 급해 보이시기도 하고, 길게 보면 오히려 나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해 드렸죠.”

“5,000만 제르라…….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겠군.”

아무것도 모르는 빌이 그리 화답하자 클레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유, 그건 그런데…….”

“음?”

주변의 눈치를 살피곤 조용히 덧붙였다.

“말끔히 옷을 차려입은 어떤 공자가 투들로 자작가로 찾아오셔서 모욕에 대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셨답니다. 워낙 조용히 일을 처리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5,000만 제르를 몽땅 받아 내셨답니다. 아무튼 그래서 빚 때문에 투들로 자작가의 저택은 경매로 넘어갔지요! 참, 자작가의 하녀 말로는 찾아왔던 공자의 눈이 맑은 붉은색이랬나, 분홍색이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흠, 그렇군.”

빌은 슬쩍 고개를 돌려 붉은 머리를 감춘 채 가만히 제 뒤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그뿐이 아닙니다. 무슨 저주라도 받았는지 영애 한 분이 픽 쓰러지셨다가 그대로 눈도 못 뜨고 가시고, ……그리고 그 남아 있던 자작님과 여동생분은…….”

“왜 자꾸 말을 하다 마는 거지.”

“듣기 상스러우실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궁금해요.”

보닛을 깊이 눌러쓴 하녀가 말하자 클레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이었다.

“이미 경매로 넘어간 집을 비우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도저히 방법이 없자 저들 몸에 불을 질러 집과 함께 타 죽었답니다. 근데 집이 무슨, 마른 나뭇가지 타듯 순식간에 타올라서 내려앉았다고 하지 뭡니까. 정리된 이후에 가 봤더니 허허벌판이더군요.”

클레버는 한껏 목소리를 죽이고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마치, 그 가문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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