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 *
하녀들이나 입을 법한 연한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도록 보닛을 꾹 눌러쓴 여자가 빠르게 걸어갔다.
“아가씨, 같이 가요!”
“쉿!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시장 조사 하러 나왔는데 그렇게 부르면 어떡해.”
앤은 울상이 되어 솔레아의 뒤를 종종거리며 쫓아갔다.
아침에 눈을 뜬 아가씨는 평소보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소리쳤다.
‘시장 조사를 나가 봐야겠다!’
‘무슨 조사요?’
‘네가 알아 온 상단 목록 읽어 봤는데 보는 것만으로는 감이 안 오더라고. 내가 마트 알바도 몇 년 해 봤는데, 지점별로 손님 스타일도 다르고, 위에서 내려오는 마케팅 멘트에 따라서 판매 수량도 달라!’
‘예? 못 알아듣겠어요. 알바가 뭐예요?’
‘그런 게 있어! 가자! 앤!’
묘하게 힘이 넘치시는 모습이라 보기엔 좋았지만, 역시 조금 지치는 건 사실이었다.
굳이 위장을 하고 나가야겠다며 옷장 속에서 가장 색이 무난한 옷을 꺼내 입은 솔레아는 앤과 함께 저택을 빠져나와 시장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저 걸리면 죽어요.”
“괜찮아, 괜찮아.”
“아가씨는 괜찮지만 전 죽는다니까요.”
“그래, 내가 괜찮아.”
앤은 처음으로 아가씨를 흘겨봤다.
한참 걸어 시장 한가운데쯤 왔을 때, 솔레아는 일부러 시장 상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와, 사장님. 옷감이 너무 고와요. 이건 어디서 만든 건가요?”
“우란 상단 타고 저어기, 게르투만에서 온 거야. 작년 이월 상품인데, 그래도 다른 데선 이 가격에 못 사.”
“옷감은 우란 상단이 알아주나 봐요.”
포목점 사장은 껄껄 웃으며 두꺼운 양모를 툭툭 쳐 댔다.
“전체적으로 다 질이 좋긴 하지만, 특히 양모는 우란이 최고지. 게르투만에서 직접 떼 오잖아.”
“그렇구나! 우란은 게르투만이랑 직거래하나 봐요.”
“그렇지.”
“아유, 그래도 너무 비싸다. 조금 깎아 주세요.”
“거참! 이거 깎으면 우린 뭐 먹고 살아. 아가씨! 주인마님 심부름 나온 거면 그냥 돈 받은 대로 사 가!”
사장이 윽박을 질러도 솔레아는 연신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그래도 좀 비싼데. 아유, 우리 영지에서 옷감을 직접 만들면 좀 싸지려나.”
“웃기는 소리! 베르고가 무슨 옷감이야! 이 아가씨 머리가 비었나.”
뒤에서 지켜보는 앤의 겨드랑이와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우리 아가씨한테 머리가 비었다고 하시면, 사장님 머리통에 빈 자리가 생길 거예요.’
속이 타들어 가는 앤과는 달리 솔레아는 태연했다.
“베르고가 왜요? 사람도 많고, 땅도 넓잖아요. 제조업이든 뭐든 못 할 이유가 없죠.”
“여기 귀족들이 그런 사업을 하겠어?! 길거리에 있는 놈들을 셋이나 양자로 삼아서 안 그래도 품위 없다 소리 듣는 판국에.”
앤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사장님. 제발 입을 닥쳐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영주민들 입장에선 생필품 가격이 싸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연한 소릴! 괜히 뭐, 이래저래 체면 차리지 말고 물가나 좀 내렸으면 좋겠네. 이거 옷감 하나 팔아도 뭐, 빵 몇 개, 우유 조금, 치즈 약간 사면 끝이야. 내가 옷감을 파는데도 우리 마누라 옷 지어 줄 옷감 한 장 빼돌리지를 못한다고.”
“저런, 우란이 돈을 비싸게 받나 봐요.”
사장은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우란만 그러나. 다 그러지. 가운데 놈들이 떼먹으니까 그런 거 아냐. 아니, 그래서 살 거야! 말 거야!”
“좀 보다가 올게요. 사장님∼”
방긋 웃으며 사장에게 인사한 솔레아가 다른 가게로 몸을 돌렸다.
“평판이 안 좋네. 하긴, 다른 곳에서 물건을 사 오기만 하니까 값이 비쌀 수밖에 없지.”
“아가씨……. 어쩜 그렇게 능청스러우세요? 대단하세요, 진짜.”
그때 누군가가 솔레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빌 나사니엘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공니여, 읍!”
그가 큰 목소리로 솔레아를 부르기 직전, 솔레아가 빌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어떻게 알아본 거예요?”
손을 떼어 내자 빌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합니다!”
“밖에서 뵈니까 반갑네요. 나사니엘 영윤, 이쪽은 제 하녀인 앤입니다.”
“그래, 반갑구나.”
“앤, 이분은 나사니엘 백작가의 빌 나사니엘 영윤이시다.”
“예, 안녕하세요!”
빌은 커다란 눈을 접어 웃으며 앤에게 인사했다.
“공……님. 그런데 하녀와 몰래 나오신 겁니까? 방금 입을 막으셔서요.”
“네, 사정이 있습니다.”
싱긋 웃고 마는 솔레아에게 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셨군요!”
큰 소리로 하하 웃은 빌을 따라 솔레아 역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옆에 서 있던 앤이(16세/로맨스 소설광인/최근 읽고 있는 작품 - 『속옷 안에 두 글자?!』) 눈을 빛내며 둘을 번갈아 힐긋거렸다.
‘뭐야, 뭐야. 신분을 숨긴 여주를 한눈에 알아보다니. 이거 사랑 아니야?!’
방금 전까지 솔레아의 불꽃 평민 연기에 식은땀을 흘렸던 걸 금세 잊은 앤은 두 사람을 두근대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간 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조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공녀님.”
“네.”
지켜보는 앤의 눈이 빛났다.
고백인가! 내가 한두 발짝이라도 뒤로 물러나야 하나? 공작저도, 백작저도 아닌 시장 한가운데서 사랑 고백이라니?!
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앤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로맨스! 로맨스야! 내 눈앞에서 청춘의 로맨스가!
“……그레이 공자는 같이 안 왔나요?”
어? 이 장르가 아닌데.
“예? 그레이요?”
“네. 편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어서요.”
“아, 어떤 편지였나요?”
쑥스럽다는 듯 볼을 붉힌 빌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대련하자고……. 좋은 검이 들어와서요. 이제나저제나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런. 그레이가 바빠서 아직 못 읽었나 봐요.”
앤이 저도 모르게 혀를 쯧 찼다.
혀 차는 소리가 들렸는지 고개를 돌린 솔레아가 앤을 바라보며 눈을 한 번 느리게 깜빡였다.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뜻이었다.
앤은 조금 울상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우리 아가씨는 언제쯤 자기만의 남자 주인공을 만나시려나.
솔레아는 빌과 함께 다시 시장 쪽으로 향했다.
“나사니엘 영윤은 어쩐 일로 나오셨습니까?”
“아, 그레이 공자에게 선물할 장갑을 구하러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번에 선물한 검은색 장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련에 응하지 않는 건가 싶어서요.”
“장……갑이 문제가 아닐 텐데요.”
“공녀님도 그리 말씀하시는군요. 그래도 어떻게 사람 얼굴에 장갑을 던지겠습니까. 그리고 한 짝씩만 보낼 수도 없어서요.”
솔레아는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빌이 장갑을 던져서 화를 돋워도 그레이는 대련 안 할 거 같은데.
“나사니엘 영윤은 친한 친구가 되고 싶은 거죠? 오빠랑?”
“예!”
빌이 희망에 가득 찬 눈을 빛내며 크게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나사니엘 영애와 함께 놀러 나오시는 건 어때요? 저는 그레이와 나갈게요. 우연히 만난 척하고 제가 사라 영애와 얘길 나눌 테니, 빌은 우리 오빠랑 둘이 대화하면서 친해지면 되지 않겠어요? 대신 대련 얘긴 하지 말고. 결투로 말을 바꿔서 하지도 말고. 알아들었죠? 중요한 건 친구가 되는 계기니까, 천천히 가자고요. 대신 오늘 저랑 같이 시장 구경을 다녀 주세요. 궁금한 것도 좀 있고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순식간에 오라비를 팔아 치운 것치곤 솔레아의 얼굴은 평온했다.
솔레아는 들뜬 빌의 옆얼굴을 슬쩍 보곤 준비해 놓은 말을 꺼냈다.
주변과 교류가 활발한 나사니엘 백작가라면 상단에 대한 정보가 빠삭하겠지.
“보석과 드레스, 그 외에도 여러 생필품을 구하고 싶은데 나사니엘 백작가에선 어떤 상단을 이용하시나요?”
“저희는 뤼블러스 쪽에서 직접 옷감을 받아서 옷을 주문 제작 합니다. 신발도 마찬가지이고요. 가구나 다른 것들은 하이온과 거래합니다. 하이온은 모르하임 자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상단이거든요.”
“어머, 그렇군요.”
솔레아는 상단의 이름을 재빨리 머릿속에 새겼다.
“재밌네요, 그 외에도 거래하는 또 다른 상단이 있나요?”
“토번 상단에선 주로 보석을 취급하죠!”
“또요?”
“어, 그리고……. 아! 저기 마침 클레버 상단이 직접 운영하는 백화점이 있으니 가 보시죠.”
솔레아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눈을 돌렸다.
커다란 3층짜리 건물의 입구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써 놓은 ‘클레버 백화점’ 간판은 여타 다른 잡화점 따위들과는 차별화된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솔레아는 그곳으로 들어가기 전 빌에게 미리 말했다.
“아까 말했듯 몰래 나온 거니 공녀님이라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러면 뭐라 부를까요?”
“음, 그러니까…….”
그때 조금 빨리 생각을 마무리했어야 했다.
“아이고! 나사니엘 백작가의 공자님 아니십니까!”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헤벌쭉 웃으며 백화점 안에서 뛰어나왔다.
빌은 사람을 맞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 입꼬리를 올려서 웃으며 그와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클레버!”
“오늘도 장갑을 사러 오셨습니까? 이왕 오신 김에 열댓 개쯤 사 가시지요. 고급 물품이 많이 들어왔습죠. 자, 이쪽으로 오시, 앗. 일행분들은 누구십니까?”
클레버의 눈이 솔레아와 앤에게 향했다.
“클레버, 여기는…… 내 하녀들이니 신경 쓰지 말게.”
“아?”
클레버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녀라기엔 드레스 원단이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하지만 귀족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짤짤 흔들어 물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 와중에 솔레아는 보닛에 가려진 눈을 굴려 백화점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넓고 물건도 많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돈이 꽤 있어 보이는 자들뿐인 걸로 봐선 물품의 가격도 만만치 않을 듯했다.
“허허, 확실히 하녀들이 편히 드나들 만한 곳은 아니지? 신기할 게다.”
커다란 눈으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솔레아를 보며 클레버는 자랑스레 말했다.
그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지만 빌과 앤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져 갔다.
익숙지 않은 거짓말을 뱉은 탓에 빌의 손바닥에선 땀이 줄줄 배어났다.
‘하녀라니. 평생 귀하게 대접받고 자라셨을 공녀님을 하녀라고 소개하다니. 멍청하고 불손하긴.’
하지만 공녀는 금세 유순한 낯빛을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너무 신기해요. 도련님,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어. 그래. 너, 너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십, 말해라. 선물할, 사 주겠다.”
“아니에요. 도련님. 전 데려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손사래 치며 고개를 흔드는 공녀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치 평생을 빈궁하게 살아왔대도 믿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