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왜 울어?”
내게 보이기 싫은 건지 헤이먼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휙 돌렸다.
“왜 그러는데. 많이 화나서 그래? 내가 다시 가서 싸우고 올까? 나 싸움 잘해. 헤이먼. 왜 그래.”
“……잖아.”
“뭐라고? 안 들려.”
“나랑 처음 나온 건데…… 망했잖아.”
“아냐! 너무 재밌었어! 망친 건 쟤네들이지.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왜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일었는데 헤이먼의 눈물 때문에 분노가 쏙 들어가 버렸다.
엉엉 우는 것도 아니고 눈물방울이 눈에 맺힌 수준이었지만 내겐 충분히 놀라웠다.
까칠하기만 한 우리 분홍 곤듀 완댜님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다니.
그레이한테 말해 주면 3년을 놀려 먹을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예뻤지만. 예쁜 걸 떠나서.
“헤이먼. 나 괜찮아. 나 정말 재밌었어. 호수도 너무 예뻤고, 샌드위치도 맛있었어. 물론 네가 만든 샌드위치는 아니었지만. 다음에 또 같이 나오자. 둘이서.”
다음에 또 둘이서 나오자는 말에 헤이먼은 힐긋 나를 바라봤다.
“……약속 지켜. 솔레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헤이먼은 언제 울었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돌아왔다.
“……일부러 우는 척한 거야? 너 이 약아빠진 새…….”
“도련님. 아가씨! 타시지요!”
하필 그때 마부가 문을 열어 주는 통에 욕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헤이먼은 티 없이 맑은 얼굴로 나를 부축해 준 뒤 뒤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할 즈음, 헤이먼이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솔레아.”
“뭐가?”
“……화내 줘서.”
“하. 참. 웃기는 소릴 하네. 오빠 욕을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는 동생이 어디 있다고.”
픽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여전히 속이 부글부글 끓긴 했다.
이상하게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평소엔 이 정도로 쉽게 화가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 * *
‘쟤가 또 화나 있네!’
‘아까 싸웠어! 이상한 애들이랑!’
‘이상한 애들 누구?’
‘투들로! 투들로 가문이래!’
‘이름 이상해!’
‘그럼 우리가 혼내 주자!’
‘그래! 쟤 화내면 무서우니까!’
‘세상에 존재했던 적도 없는 것처럼 쑥대밭으로 만들자!’
‘좋아!’
‘다시는 그 가문을 기억하는 이조차 없게 하자!’
‘너무 좋아!’
* * *
집으로 돌아와서도 축 가라앉은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아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일으켜 앉히곤 묽은 수프를 입에 넣어 주었다.
“……고, 마워.”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꿈속에서 솔레아를 만났다.
여리고 맑은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솔레아가 방긋 웃었다. 누가 봐도 아리따운 귀족 아가씨였다.
배를 곯아 음식물 쓰레기를 바라보며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 봤을 맑고 청초한 얼굴.
갑자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억울함, 분노,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물밀듯 밀려왔다.
“저기…… 솔레아. 당신이 해요. 나 못 하겠어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안 돼요. 나 여태 한 거라곤 온갖 아르바이트, 공장 일 같은 것뿐이에요. 거기서도 잡일만 했고요. 요샌 공장에도 똑똑한 대졸이 많거든요. 아, 참. 나 복사도 못 해서 욕먹었어요.”
하지만 내 얘기에도 솔레아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그런 내가 어떻게 이 넓은 영지를 먹여 살리고, 당신네 오빠들 인생을 구해요. 난 그냥, 그냥 보내 줘요. 제발…….”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지 말고, 좀! 저기 봐요, 저기 책상 위. 내가 주변 영지, 제국 역사, 이 땅의 토질, 심지어 최근 10년간의 크고 작은 가십들까지 싹 다 조사했어요. 정리해 뒀어요. 그냥 읽어 보기만 하면 돼요. 당신이 진짜잖아요!”
나는 언제 아팠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료들이 쌓여 있는 책상으로 달려갔다.
정리해 놓은 종이들을 걸신들린 놈처럼 파헤치며 중얼거렸다.
“난 못 해요. 안 된다고요. 마음만으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난 항상 실패해요. 이상하게 그렇더라고. 대체 이런 날 누가 예뻐하겠어요. 이 몸도 당신 거잖아요.”
다물지 못하고 쉴 새 없이 떠드는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지만 닦을 정신도 없었다.
매일 밤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리했던 종이 뭉치들을 한 뭉치씩 품에 안으며 소리쳤다.
“이걸 좀 봐요! 솔레아! 여기, 내가 다 해 놨어요! 제대로 된 부모도 없는 버러지 같은 내가 한 거예요! 복사도 못 하고 남한테 폐만 끼치는 내가, 계산 빵꾸나 내는 멍청한 내가, 학교도 제대로 안 마친 내가! 이걸 다 했다고요! 이제 날 보내 줘요! 이거면 되잖아요!”
인이 박일 정도로 들어 왔던 말들을 뱉어 내며 품에 종이를 한가득 안고 뒤돌았다.
하지만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솔레아? 솔레아!”
갑자기 방 안의 가구들이 모래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책상도, 의자도, 커다란 침대도, 매일 어색하게 세워져 있었던 거울도. 내가 가슴에 품고 있던 종이들도.
전부 다.
그러더니 아래에 깔려 있던 진한 버건디 컬러의 융단이 붉은 벽돌 길로 변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적갈색 머리의 그레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레이?”
그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 그레이를 향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져 댔다.
“버러지 같은 놈.”
“제대로 된 부모가 없으니 저러고 살지.”
“학교는 제대로 나왔나 몰라.”
“저런 애들은 지 손으로 돈 버는 법도 몰라. 도둑질이나 하겠지.”
그레이가 기대 쉬고 있던 벽 옆에 있는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걸어 나오더니 양동이 가득 들어 있던 물을 퍼부었다.
“꺼져!”
“내가 안 훔쳤어요!”
그레이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만 가게의 주인 같아 보이는 이는 아랑곳 않고 소리쳤다.
“너 말고 물건 훔칠 사람이 어디 있어! 당장 꺼져! 얼씬도 하지 마!”
남자가 시커멓고 두꺼운 손으로 그레이의 얼굴을 후려쳤다.
눈앞이 핑 돌았다.
나는 내가 어디 서 있는지도 잊고 그자에게 달려갔다.
“안 훔쳤다잖아! 안 훔쳤다잖아! 안 훔쳤다는데 왜 때려! 왜! 왜 안 믿냐고! 왜 아무도 안 믿어 주는 거야! 내가 안 훔쳤단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 스스로조차 알 수 없었다.
내 등 뒤에 서 있던 그레이는 그런 나를 힐긋 보더니 뒤돌아 멀어졌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레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대답도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때, 반대편에서 아악! 하는 비명이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분홍색 머리의 남자애가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들에게 붙잡힌 채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 마세요! 안 갈래! 아파요! 살려 주세요!”
“61번!”
큰 호통에 아이는 경기를 일으키듯 벌벌 떨더니 몸을 축 늘어뜨렸다.
남자는 가벼운 옷감을 들어 올리듯 마른 나뭇가지 같은 남자애를 안아 들고 멀어졌다.
“헤이먼! 데려가지 마! 그러지 말라고! 헤이먼!”
그쪽을 향해 뛰려고 했지만 발이 모래에 파묻히기라도 한 것처럼 한 발자국 떼는 것도 쉽지 않았다.
“헤이먼!”
못 구해.
난 이들을 구할 수가 없어.
“누가 도와줘요! 제발! ……누구 없어요?! 도와 달란 말이야! 왜 다들 모른 척하는 거야! 도와 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듯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수 있어. 넌 해낼 거야. 널 믿어.’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풍경들이 또다시 파도에 휩쓸리듯 사라졌다.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산등성이밖에 보이질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도 어느 산꼭대기인 것처럼 보였다.
옆에 서 있는 커다랗고 빨간 단풍나무가 바람에 우수수 흔들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너를 일으키는 건 언제나 너 자신이야. 잊지 마.’
당신은 누구예요?
여긴 어디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며 내려앉는 탓에 붙잡고 있는 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남자의 반짝이는 노란 눈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내 이마 한가운데서 초록색의 진득한 점액질 같은 연기들이 새어 나왔다.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깊이 들어가지도 못한 주제에 지독하게도 달라붙어 있었군.”
그대로 힘이 풀려 기절하는 순간, 나지막한 음성이 다시 들렸다.
“잊지 마. 또 만나.”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내 눈을 덮었다.
“아가씨? 정신이 좀 드세요?”
눈을 뜨자 울상이 된 앤이 내 옆에 서 있었다.
“……어?”
“이틀 내내 앓으셔서 너무 걱정했어요. 방금도 인상을 잔뜩 찌푸리신 채 보내 달라 하셨다가, 하지 말라고 하셨다가…….”
“내가?”
“네! 아가씨가 어딜 가세요! 진짜, 너무 놀랐단 말이에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앤이 침대 가장자리에 풀썩 엎드렸다.
“무서운 꿈 꿨나 보지. 그만 울어, 나 괜찮으니까. 그리고 먹을 거 좀 가져다줄래?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소매로 눈을 벅벅 문지른 앤이 벌떡 일어섰다.
“네,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되니까 따뜻한 수프 가져다드릴게요!”
왜 이렇게 기운이 없지.
앤이 나간 후 기지개를 한 번 쭉 펴고 이불을 걷어 냈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런데 왠지 개운했다.
뭔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 * *
“그게 말이 돼!”
남자가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윤기가 도는 짙은 초록색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엉켰다가 다시 풀어졌다.
“그 망할 공녀의 정신을 무너뜨리라고 했잖아! 다시 마력에 기댈 수밖에 없게 하라고! 그게 그렇게 힘들어? 이 멍청한 것!”
“죄송합니다. 이달론 님. 분명 처음엔 잘되고 있었는데…….”
이달론의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잘되고 있었는데, 뭐. 난 그딴 핑계나 듣겠다고 네년을 거기 심어 둔 게 아니야.”
“……죄송합니다.”
“마력이 없는 빈 몸뚱이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게 얼마나 귀한 재료인데!”
이달론은 한참을 씩씩거렸다.
베르고의 공녀가 헤이먼의 마력만 받아들인다기에 저주를 몇 번 퍼부어 보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헤이먼의 마력이 내 마력인데 왜 안 통하는 거지.’
아마도 공녀는 헤이먼의 손을 거쳐 간 마력들만 받아들이는 까다로운 그릇인 듯했다.
그래서 저번 마력 보충 때 만난 헤이먼의 정신을 교란시켜 그릇과 스푼에 그의 마력을 가득 담았었다.
쓸데없이 나대는 공녀가 잠잠해져야 그 좋은 그릇을 제 손에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달론이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윽!”
“네가 실수한 게 아니고서야 내 계산이 틀렸을 리 없다.”
“윽……. 아니, 아닙니다. 분명히 이달론 님이 준비해 주신 수프를 헤이먼 도련님의 마력이 담긴 그릇에 담아 마력이 담긴 스푼으로 떠먹였어요. 그랬더니 정말로 물도 못 마시던 공녀가 그걸 받아먹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 그런데 갑자기 공녀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습니다. 표정도 편안해졌고요. 아마도…… 저주를 분해한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이 쓸모없는 것! 젠장!”
이달론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아 던지듯 내팽개치고는 씨근덕거리며 옆의 의자를 발로 찼다.
“이게 얼마 만의 기회인데……. 이대로 날릴 순 없어. 그런 그릇은 다시 만날 수가 없다고, 만들지도 못해, 그건.”
초조한 듯 중얼대던 이달론이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르실라.”
“……예, 이달론 님.”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숨만 붙어 있는 네 남편이랑 자식을 모조리 죽여 주지.”
“예…….”
이달론은 고개를 숙여 마르실라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이윽고 그가 내민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받아 품 안에 숨긴 마르실라는 재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앤, 그 둔해 빠진 계집애가 중간에 들어오는 바람에 낭패를 봤다.
그렇지만 않았어도 수프를 억지로 몇 입 더 먹였을 텐데. 약해 빠진 공녀가 그렇게 빨리 저주를 분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공하면 남편과 아이들을 온전히 살려 주겠지. 이번엔 반드시 성공해야 돼.
마르실라는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떨며 다시 공작저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