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92)

47화

호수로 향하는 마차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건넸다.

“마력이 없는 거에 관해서 이달론에게 들은 건 없었어?”

“나도 왜 내가 마력이 없는 인간이 됐는지는 모르겠어.”

혹시 헤이먼도 나처럼 다른 세상에서 왔기 때문에 마력이 없는 건 아닐까 해서 건넨 질문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은 걸 봤는지 헤이먼은 망설이다 덧붙였다.

“……실험에 실패했겠지. 마법사가 아닌 사람도 약간씩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데 난 이달론에게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죽어 버리는 실패작이잖아.”

“남의 목숨 쥐고 부려 먹는 새끼가 이상한 거야. 실패작이라고 말하지 마.”

내 거친 말에 헤이먼이 조심스럽게 웃었다.

헤이먼은 서서히 웃음을 그치고 입술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열며 내게 물었다.

“넌…… 왜 나 이외의 사람에게선 마력을 못 받아들이는 거지? 원래는 의술사의 마력으로 치료가 가능했잖아. 넌…… 정상이었는데.”

“글쎄. 우리 오빠 혼자 외로울까 봐 비슷한 처지가 됐나?”

일부러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헤이먼은 내 눈을 피하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너를 치료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거잖아.”

“뭐, 그렇지.”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인 헤이먼이 손으로 바지를 살짝 움켜쥐었다가 천천히 풀며 말했다.

“네가 받아들이는 마력이 내 거밖에 없으니까, 내가……. 널 지켜야 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는 더, 마력을 아끼겠지만 나도 가진 게 한정적이라…….”

“결론이 뭐야?”

헛기침을 몇 번 하던 헤이먼이 나를 힐긋 보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엄숙하게 말했다.

“다치지 마.”

그레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그러고 보니 공작도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터질세라 솔레아를 아주 애지중지하던데.

나는 씩 웃으며 발을 뻗어 헤이먼의 구두코를 툭 찼다.

“뭐, 그런 말을 하면서 얼굴이 빨개져? 너나 몸 잘 챙겨. 얼마 없는 마력 나한테 낭비하지 말고.”

“그게 왜 낭비야.”

조금 신경질적으로 답한 헤이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도착했다는 마부의 말과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고, 헤이먼이 먼저 내린 뒤 내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 주었다.

푸른 녹음 사이로 햇빛에 반사돼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가 보였다.

“우와.”

생긋 웃은 헤이먼이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앞서 걸었다.

호수 앞 풀밭에 커다란 천을 깐 뒤 내게 앉으라고 멋쩍게 손짓하는 헤이먼은 이런 상황 자체가 낯선 거 같았다.

털썩 천 위에 주저앉자 헤이먼은 기다렸다는 듯 바구니를 열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샌드위치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선선한 나무 그늘 아래에 팔자 좋게 앉아 시원한 바람이 부는 호수를 바라보며 커다란 샌드위치를 볼이 미어터져라 먹고 있자니 지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

물도 마시라며 챙겨 주는 헤이먼과 함께 호수 구경을 하다 보니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뱃놀이를 하는지 작은 배에 양산을 쓴 귀족 아가씨 두엇과 젊은 남자가 타고 있었다.

노를 저어 유유자적 호수 위를 돌아다니던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곤 깜짝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헤이먼. 쟤네 알아?”

“글쎄. 저쪽은 우리를 아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몇 분 뒤 추위를 느낀 내가 팔을 매만지자 헤이먼은 마차에 가서 담요를 가져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이먼이 사라지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베르고의 공녀님 맞으시죠?”

“언니는 뭐 그런 걸 물어. 당연한 것을. 세상에, 공녀님! 괜찮으신가요? 어머, 옷차림 봐.”

요란을 떨며 다가온 여자 둘의 뒤로 꽤나 거만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혹시 위험에 처하신 거라면 저희가 마차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했으면 좋겠는데.”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투들로 자작가의 시안입니다. 여기는 제 여동생 마가리트와 아이나고요.”

여자 둘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눈짓으로 대강 그들의 인사를 받고 물었다.

“내 소개는 할 필요 없을 것 같고, 그런데 위험하다는 게 무슨 소리지?”

경계심이 가득한 내 목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마가리트가 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그자와 함께 계셨잖아요. 그것도 곁을 지키는 이 하나 없이.”

“뭐?”

이맛살을 찌푸리며 되묻자 아이나가 냉큼 대답을 가로챘다.

“그 입양된 자요! 평생 침대에 누워 계셨으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실 수도 있지요. 많이 떨리셨죠? 저희가 왔어요, 공녀님.”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네.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확인차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말은, 내가 호위 기사도 없이, 인적이 드문 호수에, 내 오라비와 단둘이 있으면 위험할 것이다?”

“그럼요! 작위 승계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합니까. 저희는 공녀님께서 건강해지셨다는 소문을 듣고 베르고 공작가도 이제야 겨우 한숨 돌렸겠구나, 했다고요!”

“공녀님이 계신 지금 이곳만 해도 보세요! 저 물이 얼마나 깊고 고요한지! 저희가 마침 지나갔기에 망정이지. 혼자 계시다 그자에게 변고라도 당하셨으면!”

“어유, 끔찍해!”

마가리트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미친 것들이.

비소가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오빠들이 나한테 정말 그럴까?”

일부러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말하자 아이나가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하, 정말! 이리 순진하신 공녀님을 어쩌면 좋아. 당연히 그러겠죠! 그자가 청순한 얼굴을 하고서 공녀님께 독이라도 먹였을지 어찌 알아요? 물에 빠뜨리기라도 했으면요?”

“그러니 이리 오시죠, 공녀님.”

시안 투들로가 매너 좋은 신사인 척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가리트는 오물이라도 본 것처럼 헤이먼이 챙겨 온 도시락 상자를 발로 툭 차 엎어뜨리고는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저희 마차로 공작저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저희와 함께 가요.”

내 손목을 잡고서 생글생글 웃는 마가리트를 마주 보며 나도 함께 웃었다.

“마가리트.”

“네, 공녀님!”

“아이나, 시안. 맞지?”

“예, 공녀님! 저희 이름을 금세 외워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기억해 주세요! 공녀님의 앞날에 영광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지. 내 영광스러운 앞날에 그대들은 필요가 없겠는데.”

나를 잡고 있던 마가리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

마가리트와 아이나, 시안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소문이 느린가 봐. 내가 우리 오라비들을 모욕한 놈의 따귀를 후려친 걸 모르나? 지금 조용히 가면 못 들은 걸로 해 주지. 그러니 꺼져.”

시안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흔들렸다.

입술을 잘근대며 씹던 남자가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공녀님.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저희는 그저 공녀님의 안전을 생각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무슨 근거로?”

“예?”

“무슨 근거로 감히 나의 안전을 걱정해. 그것도 내 오라비를 살인자로 몰아가며.”

“그자가…….”

“그자가?”

“출신도 불명확한 데다, 야릇한 머리색하며…… 요상한 이목구비에, 지저분하고…….”

“아하하!”

진심으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 깔깔대던 나는 아이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 방금 우리 오빠한테 ‘청순한 얼굴’이라지 않았어? 근데 시안은 지저분하다고 하네. 나한테 오기 전에 둘이 입도 안 맞췄어? 참 이상하네. 내가 보기에도 헤이먼은 미남인데. 같은 남자가 보기엔 영 별로인가? 아니면 질투해? 우리 오빠가 잘생겨서?”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자 시안이 벌게진 얼굴로 발을 쿵 굴렀다.

“공녀님!”

“그 입에 나를 올리지 마라.”

싸늘히 굳은 표정으로 시안을 응시했다.

나야 어찌 됐든 이 몸의 주인인 솔레아는 저런 놈의 입에 오르내릴 신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헤이먼을 모욕하다니.

나조차도 분노를 느끼는데 진짜 솔레아였다면 오죽했을까.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눈에 새기듯 바라봤다.

그때 마가리트가 진심으로 내가 불쌍하단 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내 손을 붙잡고 설득했다.

“공녀님은 지금 속고 계신 거예요. 이리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출신도 모르는 천한 놈이 공작님과 공녀님을 등에 업고 건방지게 귀족 행세 하며 다니질 않습니까! 제발, 제발 정신 차리세요! 공녀님!”

“……뭐라고?”

“버러지 같은 자를 믿으시다니요!”

“이……!”

그대로 마가리트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솔레아!”

어느새 달려온 헤이먼이 내 손목을 붙잡고 나를 막았다.

“이거 놔!”

“솔레아, 진정해!”

온몸으로 나를 끌어안으며 막는 헤이먼 때문에 마가리트의 얼굴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마가리트를 시안과 아이나가 데려갔다.

“고, 공녀님이 미치셨나 보군요!”

씩씩거리는 동생들 앞으로 시안이 나섰다.

“하! 무슨 말로 꾀어냈는진 모르겠지만 베르고의 유일한 후계자를 아주 제 입맛대로 요리해 놓았군.”

픽 웃으며 거들먹거리는 시안을 향해 헤이먼이 평소의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말투가 아버지와는 다르군.”

“……뭐?”

“돈을 빌리러 온 적이 있어 기억이 나.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이기 싫다 하던데. 그리 귀하게 여기는 자식이 내게 이리 나댄다는 걸 알고도 자네 아버지가 우리 저택에 돈을 빌리러 올지 궁금하네?”

비소를 머금은 헤이먼은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시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헤이먼은 시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내 동생한테 미쳤다는 소릴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주지.”

“그, 그, 저 공녀님이 제 동생을 때리려 해서…….”

“내 동생이 휘두른 주먹보다 내가 휘두른 권력이 더 아플 거야. 날 믿어, 시안 투들로.”

부드럽게 말한 헤이먼이 시안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 마치 위로라도 하듯 툭툭 두드렸다.

말을 마친 헤이먼은 몸을 돌렸고, 그가 안 보는 틈을 타 얼른 앞으로 달려 나간 나는 시안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윽!”

“오빠!”

마가리트가 휘청거리는 시안을 부축하는 사이에 아이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달려오는 아이나의 머리채를 그대로 휘어잡아 그녀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악!”

“아이나!”

웅크리고 있던 시안이 아이나에게 손을 뻗고는 내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우리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헤이먼이 시안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주저앉아 있는 시안의 어깨를 발로 지그시 밟았다.

“아윽……!”

“쉿. 내 동생이 마음이 약해서 오빠 욕 하는 소릴 잘 못 듣거든. 그럼 이만.”

그길로 곧장 나를 데리고 마차가 있는 곳까지 올라간 헤이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헤이먼. 괜찮아? 많이 속상하, 울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헤이먼의 얼굴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눈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물방울이 그렁그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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