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흠칫 놀라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이먼이 으음, 하는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깬 줄 알았네, 젠장.
나는 작게 마른침을 삼키며 펜던트의 잠금장치에 손을 올렸다.
17억.
내 꿈이었던 일확천금과 밝아 오는 여명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나는 단번에 펜던트 줄을 풀었다.
펜던트가 흔들리는 소리에 헤이먼이 깨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만약 깨어난 그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어도 해명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사이에 재수 없이 ‘귀환’의 뒷부분이 제대로 쓰여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으니까.
나는 풀어낸 펜던트를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바닥에 내려 뒀다.
지금 더 중요한 건 일기장을 수정하는 일이었다.
그때, 밖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아 오는데. 다시 펜던트를 쥐어야 할까. 저게 없이 돌아가면 난 다시…….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고민했다.
그러다 닭이 한 번 더 우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있는 힘껏 펜을 쥐고 종이 위로 내려 눌렀다.
겨우 펜이 종이에 닿은 순간, 종이 위에 글자가 써지기 시작했다.
“안 돼……!”
귀환까지 얼마 남지 않은 티온이 제일 무섭게 생겼다니.
과연 침대 위에서는 어떨까. 헤이먼처럼 고분고분하면 좋을 텐데.
……이게 진짜 돌았나.
렘샤 부인 취향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이쪽 아니라고요. 그리고 헤이먼은 그냥 자고 있는 거잖아.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
한 줄을 띄운 채 다음 문장이 마저 적혔다.
지키고 싶은 가족들이 생겼다.
몇 시간 내내 난리 브루쓰를 떨었는데 저렇게 간단한 내용이라니.
명료하게 적힌 문장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근데 이봐요, 렘샤 부인. 가족이라고 쓸 거면 위의 문장을 적으면 안 되죠.
……다른 사람들한텐 야설로 보여서 진짜 천만다행이네.
어이가 없어 웃으며 펜을 묶고 있던 천을 풀어냈다.
밤을 꼴딱 새웠지만 잠이 오진 않아서 옷을 챙겨 입고 후원으로 나갔다.
아까 그 목소리들은 이달론에게 간 것 같으니까 몇 시간은 조용하겠지. 돌아와도 바로 헤이먼을 건드릴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이달론이 바라는 게 대체 뭘까.
이름이 두 개인 사람들의 마력을 뺏어서 어디에 쓰는 거지?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거고? 헤이먼에게 읽으라고 시킨 글자는 또 뭘까?
생각에 잠긴 채 조용히 후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커다란 인영이 몸을 웅크리고 벤치 위에 앉아 있었다.
“……아! 깜짝이야!”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아 푸르스름한 풍경 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있던 큰 덩어리가 몸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잔뜩 긴장한 채 덩치를 노려봤다.
“아가씨.”
돈이었다.
돈은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벤치 위에 놓여 있던 텅 빈 그릇을 들어 보였다.
“저 밥 먹었어요.”
“뭐라고?”
“아가씨가 여기서 밥 먹으라고, 다 먹으면 확인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돈의 표정에서 원망이라고는 단 한 줄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꼬리가 달렸다면 붕붕 흔들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밝고 뿌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밥 다 먹은 거 확인받으려고 후원에서 기다렸다는 거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잠깐만. 그건 어제 점심이었잖아!”
당황한 내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돈의 눈꼬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자리를 비운 사이 아가씨가 후원에 내려오실까 봐 저녁은 가지러 못 갔어요. 그, 그래도 점심은 진짜로 잘 먹었어요. 여기…….”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라……. 응? 그러면 어제 점심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렸단 말이야?”
빠르게 돈에게 걸어가 겉옷을 벗어 그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아, 아가씨, 저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돈의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아야.”
또 한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아야.’를 뱉어 낸 돈은 내게 한 대 맞고도 그저 좋은지 처진 눈을 접어 웃었다.
“그래도 저 밥 다 먹었어요.”
싹싹 비워진 그릇을 내게 보여 주며 돈은 배시시 미소 지었다.
아무리 곧 여름이라 해도 밤부터 새벽까지는 아직 쌀쌀했다.
돈의 두 볼이 추위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무심코 손을 들어 돈의 빨개진 볼을 감쌌다.
“하……. 이 바보야.”
“예?”
“얼굴이 이렇게 빨갛게 되도록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 아가씨가…… 확인한다고 하셔서. 저, 열심히 밥 받아 와서, 다 먹고…… 기다렸는데…….”
돈의 검은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저 또 잘못했어요?”
“그래. 멍청아. 따듯한 데서 기다려야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 괘, 괜찮아요. 아가씨. 저 한겨울에도 이것보다 얇은 옷 입고 일한 적 많아요. 정말, 진짜 괜찮은데…….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 없는데.”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더니 시선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큰 눈에 슬픔이 가득 들어찼다.
“전 정말 괜찮아요. 아가씨.”
“이놈의 괜찮아요.”
“예?”
“남한테 들으니까 기분 정말 구리네. 서운하고, 괜히 짜증도 나고.”
짜증이 난단 소리에 돈의 머리가 다시 아래를 향했다. 커다란 덩치에 맞지도 않게 한껏 서글픈 표정이었다.
내게 혼나는 것 같아 적잖이 서러운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 돈. 넌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이런 말만 하잖아. 너 이제 ‘괜찮아요.’ 금지야. 알았어?”
“네…….”
너스레를 떨며 말했는데도 돈은 작게 대답하며 내게서 한 걸음 살짝 떨어졌다.
돈의 뺨에 닿아 있던 내 손이 허망하게 공중에 떠 버렸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눈빛으로 왜 몸을 떨어뜨린 건지 묻자 우물쭈물하던 돈이 대답했다.
“아, 너무 오래, 닿아 있으면……. 더러울까 봐.”
“너 세수 안 했어?”
“했어요! 했는데, 그래도…….”
“너 얼굴이 얼어 있잖아.”
다시 성큼 다가가서 두 손으로 돈의 얼굴을 잡으려 했지만 돈은 굽히고 있던 허리를 우뚝 펴고 까치발까지 했다.
“저 정말 괜찮, 아니, 다 좋아요! 일 없어요! 아가씨 추우실 테니까 얼른! 드, 들어가세요!”
‘일 없어요.’라니. 이북에서 왔나.
돈은 어쩐지 아까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걸치고 있던 내 옷까지 벗어 다시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런데 내 양쪽 어깨 위에 옷을 둘러 주고도 돈은 손을 떼 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왜?”
시선을 맞추며 묻자 돈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확인도 받았으니까, 이, 이제 가 볼게요.”
돈은 서둘러 후원을 빠져나갔다.
꽤 늦게 잠이 들었는데도 헤이먼은 아침이 되자마자 눈을 떴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방에 갔다 온 헤이먼은 평소답지 않게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내 오전 운동이 끝나길 기다리는 건지 그는 후원에 그림처럼 서서 나와 그레이가 가볍게 몸을 푸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헤이먼과 내 대화를 듣던 그레이가 내 옆구리를 죽죽 찢어 버릴 듯 스트레칭시키다 말고 끼어들었다.
“둘이 어디 가? 헤이먼은 옷을 왜 그렇게 입었어? 무도회라도 가냐.”
“솔레아가 헤이먼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너도 그렇게 부르면 안 되지. 형이라고 불러라, 그레이.”
“형. 나 빼고 어디 가는데. 솔레아랑.”
“호수에 가기로 했어.”
그레이가 사실이냐는 듯 나를 힐끔 바라봤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씩 웃었다.
“나는 왜 안 데려가는데. 나도 오늘 별거 없는데.”
“넌 늘 별거 없잖아.”
“이게 또 오빠를 놀리네.”
그레이가 내 머리를 팔로 감싸 헤드록을 걸고 마구 헤집듯 머리를 벅벅 힘주어 쓰다듬었다.
얘 지 빼고 놀러 가지 말라고 일부러 내 머리 망치는 거 같은데.
헤이먼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솔레아가 너랑 같이 가기 싫다던데.”
“……뭐?”
안 그래도 무섭게 생긴 그레이의 표정이 굳었다.
별 감정도 없이 놀라 굳은 거겠지만 얇게 빠져 살짝 올라간 긴 눈꼬리는 그 표정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쫄게 했다.
헤이먼은 팔짱을 낀 채 미소 지었다.
“솔레아가 나와 둘이 가고 싶다고 했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눈을 깜빡이던 그레이가 이내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씩씩하게 끄덕거렸다.
“잘했어, 솔레아.”
“어?”
서운해할 줄 알았더니.
그레이는 장하다는 듯 내 머리카락을 곱게 쓸어 주고는 헝클어져 풀리기 일보 직전인 머리끈도 주욱 당겨 풀더니 내 뒤에 서서 직접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헤이먼이 불쌍해서 하루 같이 놀아 주는 거구나. 그래, 우리 동생은 어쩜 이렇게 착할까. 그레이랑은 어차피 ‘매일’ 보고, ‘제일’ 친하니까 괜찮아.”
묘하게 몇몇 단어를 강조하듯 힘줘 말한 그레이는 말을 마친 후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내 머리를 다시 높이 올려 묶어 준 그는 내 머리통을 양손으로 붙잡고 휙 뒤로 꺾더니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둘째 오빠 하루 챙겨 준 걸로 그레이는 안 삐져요.”
“뽀뽀는 왜 자꾸 해?”
“우리 솔레아 다 컸다 싶어서. 오빠는 눈물이 나.”
일부러 흑흑 소리를 낸 그레이는 옷소매로 눈꼬리를 콕콕 찍어 내는 시늉까지 하며 헤이먼을 약 올렸다.
확실히 헤이먼보다 그레이랑 더 친하긴 했다.
얼굴도 더 자주 보고, 얘기도 더 많이 하니까.
하지만 고작 나랑 더 친하다는 게 약 올릴 만한 소재가 되나.
……되네.
소재가 되나 보네.
그것도 너무 되나 보네.
늘 여유 만만한 표정이던 헤이먼이 보기 드물게 씩씩거리며 나와 그레이를 노려보다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다 큰 동생한테 뽀뽀하는 거 굉장히 보기 껄끄럽군.”
“지가 못 하는 거면서. 난 솔레아랑 친해서 이마에 뽀뽀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내가 못 하던 운동 동작을 성공해 내거나, 팔 굽혀 펴기를 평소보다 더 많이 하거나, 연무장에서 하는 달리기를 목표치보다 한 바퀴라도 더 뛰면 제 일처럼 기뻐하며 박수를 쳤고, 가끔은 장하다며 나를 껴안고 빙빙 돌기도 했다.
누가 보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줄 알겠네 싶은 정성이었다.
내가 건강한 게 그 정도로 기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레이가 환하게 웃는 게 좋아 나도 별말은 하지 않았었다.
고작 건강한 것만으로도 웃음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됐다는 게 여전히 안 믿겼지만.
나도 모르게 그레이와의 추억들을 되새기며 배시시 웃자 헤이먼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헤이먼이 내 손목을 덥석 잡더니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비열하게 웃었다.
“그래, 어쨌든 솔레아는 오늘 이 둘째 오빠랑 놀다 올 거니까 넌 집이나 지켜.”
진짜 집 지키는 건 일 많은 공작님이랑 정시 퇴근 사냥꾼 라트엘인데.
얼떨결에 헤이먼의 뒤를 따라가며 그레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헤이먼, 그레이도 같이 가자고 할까?”
“싫어. 매일 그레이랑 있잖아.”
“그레이랑은 운동하는 거고, 둘이서 논 적은 없어.”
“그럼 둘이 노는 건 내가 처음이면 되잖아.”
더 말하기 싫은지 헤이먼은 나를 그대로 어깨에 둘러멨다.
“야! 내려 줘! 너 어깨 빠지는 거 아냐?”
“괜찮아. 그레이만큼 힘이 세진 않아도 너 정도는 가뿐하니까.”
어지간히 짜증이 났는지 헤이먼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한 게 느껴졌다.
“하하,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삐지네. 내가 뭐라고.”
나를 어깨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단 채 걸어가던 헤이먼은 정원 한가운데 도착해서야 나를 내려놓고 여전히 삐진 것 같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가 너지. 뭐긴 뭐야.”
내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래, 오빠. 가자.”
헤이먼의 손을 잡아끌고 가며 일부러 장난을 쳤다.
너 힘들어서 내려놓은 거지.
아니. 네 얼굴 보고 말하려고 내려놓은 거야.
너 숨소리가 씩씩거리잖아.
그레이 때문에 열받아서 그런 거거든.
아닌 거 같은데.
맞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