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92)

45화

‘당연하지!’

목소리들이 신나서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쟤는 깨끗하니까!’

‘원하는 마력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고, 싫으면 얼마든지 뱉어 낼 수 있으니까!’

‘정해진 끝이 없으니까!’

‘모양도 없으니까!’

‘아무거나 담을 수 있으니까!’

‘분홍 머리를 싫어했으면 아예 안 통했을 텐데!’

‘더러운 분홍 머리를 좋아해 버려서!’

‘싫어지게 하면 좋을 텐데!’

멋대로 웃고 떠드는 목소리들에게 쌍욕을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내 어깨를 잡은 헤이먼의 두 손이 벌벌 떨리고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치부를 들켰기 때문인지 헤이먼의 두 눈에 투명한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다, 기억나? 내가 여전히 이달론한테 실험이나 당하는…….”

“괜찮아. 너 싫어질 일 없어. 네가 예전에 실험을 당했건, 지금도 당하고 있건, 난 그냥 자주 싸가지 없고, 가끔 착하고, 잘생긴 너를 좋아하는 거야. 내 오빠인 네가 좋아. 너 더럽다고 생각 안 해. 그렇게 생각하는 새끼들은 내가 주둥이를 틀어 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 입 좀 다물고 가만히 안고나 있어.”

“알았어…….”

목소리들이 고요해질 때까지 헤이먼을 안고 다독이며 허공을 힘껏 노려봤다.

방 안의 거울에 비친 내 보라색 눈이 번쩍였다.

아침이 되기 전에 일기장에 적힌 ‘귀환’을 지워야 했다.

목소리들에게 경고하며 마음이 확실해졌다.

나중에 미움을 받더라도, 헤이먼을, 이 가족을 이대로 두고 갈 순 없었다.

근데 얠 재워야 뭘 하든 할 텐데 도무지 잠들 기미가 없었다.

“아, 좀 누워!”

“솔레아, 정말 다 기억하는 거야? 나는…….”

“그래. 어, 기억나. 그러니까 좀 누워. 내일 얘기해.”

나 지금 일기장에 적은 귀환 두 글자 안 지우면 내일 아침에 휙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그럼 너 혼자 남아서 뭐, 어떻게 할 거야.

너한테 버림받았다는 기분 들게 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멍청아.

복잡한 내 속도 모르고 헤이먼은 침대에 앉아서 계속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처음엔 몰랐어. 그런데 계속 점점 아파지니까, 어머니가 걱정을 하셔서…….”

“자자, 어? 내일 얘기하고 오늘은 그만 자자.”

“내일? 난 여기서 자는 건가? 너는 어디서 자고? 그럼 내 방 가서 잘게.”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자마자 목소리들이 아주 작게 속닥이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헤이먼을 강제로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줬다.

“오빠! 그냥 좀 자! 욕 나오게 하지 말고!”

“응……. 미안.”

꽃분홍색 눈을 토끼처럼 뜬 헤이먼은 평소처럼 냉정한 눈빛이 아닌 동글동글 말랑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은근슬쩍 다시 입을 열었다.

“이달론은, 나도 아홉 살 때 처음 봤어. 내가 열흘 동안이나 눈을 안 떴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때 이후로 이달론한테서 정기적으로 마력을 받아서 살고 있어.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사람이 내 목숨을 구한 은인인 줄 알고 계시니까. ……틀린 말도 아니지만.”

씁쓸하게 미소 짓는 헤이먼을 보면서 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를 지 인형처럼 살게 했는데 무슨 은인이야. 패 죽일 놈이지.”

‘쟤가 패 죽일 놈이래!’

‘이달론은 패 죽여도 되나 봐!’

‘걔는 우리끼린 못 죽이는데!’

‘못 죽여!’

‘그럼 한 대씩 패고 오자!’

‘그래, 한 대씩은 팰 수 있어!’

‘패고 오자!’

‘그래, 그래!’

‘그럼 분홍 머리는?’

‘……분홍 머리는 건들지 말자. 쟤 무서워.’

‘응…… 쟤 또 욕했잖아. 일단 그냥 조용히 있자.’

‘그럼 무서운 애가 지키는 분홍 머리 말고, 무서운 애가 싫어하는 이달론 패러 가자!’

‘맞아! 욕 무서워!’

‘욕하는 사람 무서워!’

‘그래, 그래!’

‘좋아!’

소곤소곤 떠들던 음성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헤이먼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나도 어릴 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자기한테 마력을 받는다는 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길래 그래야 하나 보다, 했고. 어쨌든 이달론이 다녀간 후엔 아팠던 몸이 나았으니까.”

“그 가짜 늙은이가 어린애한테 입막음까지 시켰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충 이야기를 듣다가 헤이먼을 재우려고 했는데 이렇게 까놓고 듣다 보니 열이 차올랐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누워 있는 헤이먼에게 물었다.

“걔가 봉사한답시고 널 돕진 않았을 거 아냐? 뭘 바라고 너한테 이래?”

“정확히는 몰라. 그냥 가끔 그 사람이 시킨 심부름을 해.”

이상한 애들도 사라졌으니 얘기 좀 더 듣다가 새벽에 재워야겠다.

“무슨 심부름을 했는데?”

“좀…… 이상해.”

내가 고개를 갸웃 움직이자 헤이먼은 몸을 일으키려는 듯 상체를 움직였다.

심각한 이야기니 각을 잡고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서 아예 진지한 분위기로 갈아타 버리면 밤을 새워 버릴 게 분명했다.

얼른 어깨를 누르자 헤이먼은 내 눈치를 살피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옛날 얘기를 듣는 꼬마 아이처럼 이불을 덮은 채 침대에 곱게 누워 있는 20대의 꽃다운 남성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누군가의 이름을 알아 오라고 했어.”

“지는 그딴 거 하나 못 해? 위대한 마법사라면서?”

“잘 모르겠어. ……남들도 다 알고 있는 이름 말고, 그들의 진짜 이름을 알아 오라고 시키더라고.”

“이름을 두 개 쓰는 사람이 있었어?”

“대부분은 범죄자거나 예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이었어. 드물지만 자유인이 된 노예들은 이름을 바꾸기도 하니까. 아니면, 노예가 되기 전의 이름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알고 있는 노예는 돈뿐이었다.

자유인이 된 돈에게도 예전에 쓰던 이름이 있었을까?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알아 간 이후엔 어떻게 됐어?”

헤이먼의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내 눈을 피해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사라졌어.”

“뭐라고?”

“궁금해서 며칠 뒤에 찾아간 적이 있었어. 그런데 아무도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어.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헤이먼의 눈빛이 침울하게 잠겼다.

“나도 이름이 기억 안 나. 분명히 얘기를 나눴는데. 얼굴까지 생생한데.”

이불을 쥔 그의 두 손이 잘게 떨려 왔다.

“내가 받은 마력이…… 그 사람들의 생명이면 어쩌지. 그럼 나는, 사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나는 손을 들어 헤이먼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상했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그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써 가면서까지 헤이먼을 살려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

“그 심부름 말고 다른 건 안 했어? 아니면 이달론이 너한테 바라는 건 없었어?”

입을 막은 손을 떼 낸 뒤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말해, 헤이먼. 내가 어떻게든 널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

“가끔 이상한 글자가 적힌 종이를 보여 줬어.”

“글자?”

“응. 읽을 수 있냐고. 그런데 단 한 번도 읽을 수 없었어. 타국의 글자도 아니었어. 아예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어.”

아마도 헤이먼에게 읽으라고 한 그 글자들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헤이먼의 눈 위로 손을 올렸다.

“오늘은 내 방에서 자. 그냥 자. 아무 소리 말고.”

그렇게 헤이먼이 잠들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내 손바닥이 촉촉하게 젖었다.

헤이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61번.”

“응?”

“……지하 실험실에서 나를 부르던 이름이야. 나도 이름이 두 갠데……. 나도 잊히면 어쩌지. 쓸모가 없어져서, 언젠가 나도 그 사람들처럼…….”

손을 떼어 내자 헤이먼은 물기에 젖은 눈으로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익숙한 눈이다.

체념과 두려움이 마구 뒤섞인 눈.

거울을 볼 때마다 마주쳤던 것과 닮았다.

목구멍을 타고 울컥 올라오려는 쓰라린 감정들을 꾹 참고 겨우 말했다.

“그렇게 안 둬.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부서지듯 힘없이 웃은 헤이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든든하네.”

“……가족이잖아.”

언제나 듣고 싶었던 말을 그에게 건넸다.

“한참 어린 너한테 위로를 받다니.”

“한참 어린 내가 욕한다고 쫄았으면서.”

눈을 감은 채 푸흐흐 바람 빠지듯이 웃은 헤이먼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무섭게 생겼잖아.”

“내가 뭘 무섭게 생겨? 넌 방에 거울도 없어?”

아까부터 이상한 목소리들이 ‘쟤 무서워!’를 자꾸 외친 탓에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거울 보니까 그냥 좀 도회적으로 생긴 미인이던데 왜 자꾸 무섭게 생겼대.

짜증 난 목소리가 웃겼는지 헤이먼은 웃음기를 거두지 못하고 대답했다.

“걱정 마. 티온이 제일 무섭게 생겼어. 우린 괜찮아.”

“아. 그래? 난 그레이가 제일 무섭게 생긴 줄 알았어. 처음 봤을 때 도망갈 뻔했잖아.”

공감됐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린 헤이먼이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더 가볍게 말했다.

“공작님도 사실 이목구비가 그렇게 온화하시진 않잖아. 공작 부인이 약간 그런 취향이신가 봐. 냉하게 생긴 사람이랑 결혼해서 냉하게 생긴 애들만 데려오고, 냉하게 생긴 솔레아를 낳은 걸 보니.”

헤이먼의 분홍색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고르게 자리 잡은 하얀 이가 벌어지며 청명한 웃음소리가 방을 울렸다.

소리 내 웃던 헤이먼이 작게 덧붙였다.

“어머니.”

“응?”

“공작 부인이 아니라 어머니지. 너를 낳아 주신 어머니잖아.”

“……너한테도 어머니야.”

“……응. 넌 내 동생이지.”

이윽고 말없이 가만히 누워 있던 헤이먼의 숨소리가 차츰 차분하게 잦아들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일정하게 울릴 때쯤 푸르른 빛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라도 헤이먼이 깰까 조심하며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아직 일기장 속 ‘귀환’이라는 글자 뒤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상태였다.

조용히 얕은 한숨을 내쉰 후, 펜을 손에 쥐고 천으로 칭칭 돌려 감아 고정시켰다.

두 글자를 썼으니 오늘은 더 이상 못 쓸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 보는 게 나았다.

최소한 글자 가운데에 작대기라도 긋자.

몸에 힘을 주고 천천히 펜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도무지 펜이 종이에 닿질 않았다.

한 시간 가까이 온몸에 힘을 주고 있자니 팔이 달달달 경운기마냥 떨리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드레스가 땀에 젖어 등에 척척하게 달라붙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걸 못 지우면 안 되는데. 헤이먼이 숨기고 있던 비밀을 듣게 되었고, 그가 가지고 있는 불안까지 알아 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두고 가.

버려졌다고 생각할 텐데.

그 무서운 기분을 너무 잘 아니까, 다른 사람에겐 그걸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가족들은 내게 처음으로 실패할 용기를 준 사람들이었다.

몸을 기울이고 체중을 실어 다시 한번 펜을 종이에 갖다 대려 했다.

그러자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가 짤랑, 하는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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