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번쩍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헤이먼은 듣지 못했는지 그는 걱정스레 나를 살피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런가?’
‘저번처럼 불 밝혀 줄까?’
‘또 욕하기 전에 얼른 하자!’
‘그래, 그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지 헤이먼은 내 눈치를 보며 얼른 덧붙였다.
“둘이 가는 게 싫으면 그레이도 부르지.”
‘화났나 봐! 쟤 얼굴 무서워!’
‘불, 불!’
‘하나, 둘, 셋!’
“하지 마!”
얼른 목소리를 높이자 여러 목소리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행히 밖은 잠잠했다.
헤이먼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 그럼 둘이 가자. 점심 먹고 출발할까? 오전엔 네가 운동을 하니까.”
일단 헤이먼을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나를 달랬다고 생각한 헤이먼은 그제야 안심한 듯 엷게 미소 지으며 내 옆에 가벼워진 통나무를 두고 일어섰다.
“울지 마.”
‘쟤가 울렸나 봐!’
‘혼내 줄까?’
‘혼내 주자!’
‘이 방에서 나가면 혼내 주자!’
‘그래, 그래!’
‘어떻게 혼내?’
‘제일 무서워하는 거 보여 주자!’
‘그래! 그러면 다시 지하 실험실로 끌려가는 미래를 보여 주자!’
‘좋아!’
‘가족들한테 잊혀서 혼자 남도록 하자!’
‘그래, 그래!’
‘이 방에서 나가면!’
‘이 방에서 나가기만 하면!’
목소리들이 쉬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통에 빠르게 판단이 되지 않았다.
헤이먼은 아직 쪼그려 앉아 있는 나를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그러다 바닥에 놓인 책을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것보다는 네게 도움이 되는 책을 읽는 게 어때. 책상 위에 저 많은 양서를 두고 왜 하필 이거야.”
아직도 목소리들이 떠드는 통에 헤이먼이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자 헤이먼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책을 펼쳤다.
안에 적힌 내용을 몇 줄 읽었는지 헤이먼의 분홍색 눈동자가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였다.
그의 미간이 또 찌푸려졌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갑자기 성격이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바뀌었나 했더니, 이런 책을 읽으니까 그렇지.”
‘무슨 책?’
‘저거! 분홍 머리가 읽는 책!’
‘야한 책!’
‘하지만 안 야한걸!’
‘마력을 다 빼내면 분홍 머리도 안 야한 걸 알 텐데!’
‘그럼 오해 안 받게 우리가 마력을 다 빼 주자!’
‘그래, 그래!’
‘이 방에서 나가면!’
“이건 내가 버리도록 하지.”
그대로 일기장을 들고 나가려는 헤이먼의 손목을 다급하게 잡으며 외쳤다.
“안 돼!”
‘안 된대!’
‘우리가 쟤 말을 들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쟤가 안 된대!’
‘쟤 무섭잖아!’
‘그럼 하지 말자!’
내 대답을 들은 헤이먼이 한숨을 쉬며 나를 내려다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어 버렸다.
“이 책이 그렇게 소중해?”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다시 솔레아를 야한 소설 마니아로 만들어 버렸지만 지금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들리는 이 목소리들은 뭐고, 헤이먼에게 보여 주겠다는 미래는 또 뭔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책을 협탁 위에 올려 둔 헤이먼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올렸다가 어색하게 툭툭, 두어 번 두드리곤 물러났다.
“너무 자주 읽지는 마. 차라리 연애 소설을 읽지 그래.”
목소리들이 다시 떠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욕했으니 헤이먼을 혼쭐내 주자는 내용이었다.
“아냐, 이게 좋아. 이게 좋으니까 욕 그만해. 난 이게 좋다고.”
“흠, ……그래. 그래도 취향을 좀, 온건하게…… 바꿔 보지 그래.”
기껏해야 기사랑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내용일 텐데 왜 그러지.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헤이먼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람을 묶어 놓고 그러는 건 좀 잘못된 취향 같아.”
“어?”
“썩 대중적인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골라서 온 건지……. 차라리 발 페티시가 더 나은 것 같은데.”
“읽어 봐.”
협탁 위에 있는 책을 들어 헤이먼에게 내밀자 그가 흠칫 떨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아니, 나 가 볼게. 눈물 그쳤으면 됐다. 내일 보지.”
사방에 깔린 목소리들이 신났는지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나간대!’
‘무서운 거 보여 주자!’
“헤이먼 가지 마!”
또다시 나가려는 헤이먼을 붙잡았다.
헤이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다른 사람 부를까?”
“그런 게 아니라……. 너 아무것도 안 들려?”
“왜? 혹시 환청이 들려? 이딴 책을 읽으니까 그렇지.”
‘환청 아닌데!’
‘우리 가짜 아닌데!’
‘화나!’
‘화 많이 나!’
‘분홍 머리가 다시는 환청이라고 못 하게 해 버리자!’
‘실험실을 생생하게 보여 주자!’
“아, 씨발 하지 말라고.”
‘……하지 말자.’
‘그래, 하지 말자.’
겨우 사방이 조용해졌다.
문제는 헤이먼도 조용해졌다.
그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말했다.
“미안……. 취향 무시해서 화났구나.”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아니래!’
‘할까?’
‘그래! 제일 무서워하는 것들로.’
이상한 목소리들이 헤이먼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싶어 나는 다급하게 말을 바꿨다.
“사실, 그래, 맞아! 너 내 취향 무시하지 마! 사람 묶어 놓고 이것저것 하고 싶을 수도 있지! 다시는 내 취향 무시하지 마! 알겠어?!”
“……알았어, 미안해…….”
잔뜩 당황한 낯으로 우물쭈물하던 헤이먼은 슬쩍 문을 가리켰다.
“나 이제 가 봐도 될까?”
‘쟤 나간대!’
“가지 마!”
“그럼 뭐, 여기 계속 있으라고?”
“으, 응. 여기 앉아 있어.”
통나무를 가져다주려고 왔던 헤이먼은 나를 달래다가, 얼결에 방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돼 버렸다.
헤이먼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만 받으면 나도 헤이먼을 내보낸 뒤 이 목소리들과 대화를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헤이먼이 저 문을 나서면 당장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방법이 없었다.
방에서 개기는 수밖에.
하지만 그것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 여기 앉으면 돼?”
‘분홍 머리 마력 더러워!’
‘구역질 나!’
‘우리가 깨끗하게 해 주자!’
‘그래! 비우면 깨끗해져!’
‘마력을 탈탈 비우자!’
‘그래, 그래!’
“아, 좀! 가만히 있어!”
의자에 앉으려던 헤이먼은 다시 엉거주춤 일어섰다.
결국 앉지도 못한 채 헤이먼은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서 있었다.
“솔레아, 뭔가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호수에 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건 좋아. 좋은데.”
잠깐 조용해진 목소리들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 찾는 거지?’
‘침대 밑에 숨겨 둔 야한 책을 보여 주려는 것 같아!’
‘하녀가 손이 안 닿아서 못 버린 책이 하나 남아 있어!’
‘그래! 우리가 얼른 보여 주자!’
‘꺼내 오자!’
목소리들은 물체도 옮길 수 있는지 침대 밑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헤이먼도 들었는지 그의 시선이 침대 아래로 향했다.
“저기 뭐 있어?”
“아니, 아무것도 없어.”
‘있는데!’
‘길들여진 황제라고 적혀 있는데!’
“소리가 들렸잖아. 잠깐만. 내가 볼게, 솔레아.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어.”
헤이먼이 허리를 숙이려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또 욕을 뱉었다.
“아무것도 없다니까, 썅.”
‘없대…….’
‘있는데…….’
‘들키기 싫은가 봐…….’
‘아니면 황제를 길들이기 싫은가 봐!’
‘맞아!’
‘쟤는 황녀랑 더 친하니까!’
‘그럼 황녀를 길들이는 책을 찾아와야 돼?’
‘그러자!’
이 새끼들 누군지는 몰라도 잡히면 가만 안 둬야지.
얼굴이 저절로 시뻘게졌다.
헤이먼한테 욕을 할 생각은 없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별이 버거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쉽고 슬펐는데 갑자기 욕할 일이 생기다니.
거듭되는 쌍욕 퍼레이드에 헤이먼의 얼굴에는 당황을 넘어 당혹이 서려 있었다.
“오늘 좀 이상한데. 솔레아. 몸이 안 좋아?”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가만히 있어. 제발. 아무 말도 안 해도 돼.”
‘분홍 머리가 말하는 게 싫은가 봐!’
‘그럼 입을 꿰매 버리자!’
‘그래, 그래!’
“아니! 아니다! 헤이먼, 말해!”
“말을…… 하라고? 무슨 말?”
“나 신경 쓰지 말고, 아무 말이나 해 봐.”
자꾸 횡설수설하는 내가 어지간히 걱정됐는지 헤이먼은 화내지도 않고 손을 내밀어 나를 당기고는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이상했지만 오늘은 정말 확실하게 이상한데.”
“나 이상한 거 아니야. 지극히 정상이니까 환청, 이상하다, 그런 말 하지 마. 괜찮아, 오빠.”
“그래.”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헤이먼은 여전히 팔자로 꺾인 눈썹을 펴지 못한 채 나를 살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헤이먼의 두 손을 꼭 잡고 최대한 단단하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너 못 건드려.”
“으, 응?”
내 말에 당황한 낯으로 묻는 헤이먼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어디에서 들리는지 모르는 목소리들을 향해 경고했다.
“손가락 하나도 못 건드려. 진짜 가만히 안 둘 거야. 너 아프게 하거나, 무섭게 하거나, 아무튼 네 신상에 조금이라도 흠나면 누가 그랬든 찾아내서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고마워. 근데 그렇게까진…….”
“아니. 꼭 그렇게 할 거야.”
헤이먼의 말을 끊고 허공을 바라봤다.
잠깐 뭔가가 반짝했던 거 같은데 확실하진 않았다.
그쪽 방향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고 덧붙였다.
“네 미래는 반드시 행복해야 돼. 두려움에 떨거나 외롭거나 그딴 건 없어. 알았어?”
“……으응.”
한참 동안 쉬지 않고 떠들던 목소리들이 점점 잦아들더니 방 안이 고요해졌다.
이제야 겨우 조용해져 나는 헤이먼의 손을 터질 듯 꽉 잡고 말했다.
그가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넌 나한테 좋은 기억을 준 사람이니까.”
헤이먼이 갑자기 내 등에 손을 올리더니 나를 천천히 당겨 안았다.
그의 어깨 위로 간신히 눈만 빼꼼 나왔다.
헤이먼에게 안겼지만 내 신경은 온통 주변의 목소리들에게 쏠려 있었다.
따스한 체온으로 나를 감싼 헤이먼이 낮은 목소리로 먹먹하게 말했다.
“고마워, 솔레아. 나를 지켜 주려고 하는 네 그 마음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야. 하지만 난…….”
‘……그래도 분홍 머리 마력은 더러운 마력인데…….’
‘우리는 분홍 머리를 없앨 수 있는데에…….’
“입 닥쳐. 내가 너 지킬 거니까. 아무도 손 못 대게 할 거니까.”
“으, 응……. 알았어.”
험악한 말에 뭔가 더 얘기하려던 헤이먼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헤이먼의 뒷덜미 칼라를 잡고 그의 몸을 떼어 낸 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마력이 더럽든 말든, 난 신경 안 써. 그냥 네가 살아 있으면 됐어. 난 네가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의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기억이……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