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92)

43화

“그레이. 이 통나무 헤이먼한테 들고 갈 수 있을까?”

“네가? 불가능.”

“네가.”

“아, 내가? 당연히 가능하지. 넌 날 뭘로 보고. 이 정도야 거뜬하지.”

돈은 그레이가 비킨 후 곧장 다시 통나무 위에 눕더니 찹쌀떡처럼 찰싹 붙어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레이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돈에게 명령했다.

“돈, 나와.”

“아, 도련님…….”

“왜 이래, 진짜. 여기 무슨 꿀이라도 발랐어?”

“그러게. 개다래나무에 붙은 고양이도 아니고.”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통나무를 만끽하던 돈은 미적미적 겨우 일어섰다.

그레이가 으쌰, 소리와 함께 통나무를 들어 올리더니 앞서 걷기 시작했다.

“가자, 솔레아.”

“응.”

그대로 그를 따라가려다 후원에 홀로 남아 아무 욕심도 없이 배시시 웃고 있는 돈이 마음에 걸려 뒤돌아섰다.

“돈. 점심 어디서 먹을 거야?”

“……그냥, 아무 데서나……. 전 괜찮아요, 아가씨.”

괜찮아요, 라는 말에 노이로제 걸릴 거 같네.

“솔레아! 빨리 오라니까! 내가 쉽게 들었다고 해서 이게 가벼운 게 아니에요!”

“돈. 저 사람 봐. 지 몸이 얼마나 튼튼하고, 근육도 얼마나 많은지 아는데 저 통나무 하나 들었다고 저렇게 힘든 티를 낸다. 저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너도 배고프면 그냥 식당 가서 밥 먹어 봐. 눈치 보지 마. 괜찮을 거야.”

“……네.”

두 손을 모은 돈이 작게 대답하긴 했지만 여전히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아니면 식당에서 밥 받아 와서 여기, 후원에서 먹어.”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괜찮아요!”

“솔레아악! 그레이 통나무에 깔려 죽음!”

“이따 밥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확인할 거야. 꼭 먹어야 돼.”

“예, 아가씨.”

이제야 마음이 좀 놓여 그레이를 따라가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돈이 나를 붙잡았다.

내게 직접 접촉한 건 처음이었다.

돈은 커다란 눈을 유순하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아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어느새 옆에 다가온 그레이가 어깨에 통나무를 짊어진 채 험악한 얼굴로 애교 넘치게 말했다.

“돈, 자유를 찾아 준 나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더니. 그레이 속상해. 정말.”

“도련님께도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돈의 대답을 들은 그레이가 씩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꽤 긴 통나무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돌아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악! 야!”

“뭐야, 어디 맞았어? 왜!”

“너 눈알을 뒤통수에 박고 다녀?”

“눈알이 뒤통수에 있었으면 너 안 부딪치게 내가 잘 조절했겠지. 머리에 또 혹 난 거 아냐?”

“사과부터 해. 그레이 새끼야.”

“죄송합니다. 솔레아 다치게 해서 그레이도 너무 슬퍼.”

아웅다웅 그레이의 다리를 발로 차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에 붙어 있지 않으면 또 머리를 박을지도 모른다며 그레이는 통나무를 짊어진 어깨의 반대쪽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너 손잡고 싶어서 쇼한 거지?”

“이잉. 그레이는 그런 거 모르는데.”

그 상태로 헤이먼의 방으로 들어가자 그는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우리를 맞았다.

“……통나무를 왜 짊어지고, 아니, 둘이 손은 왜 잡고?”

“이거 팔아 보려고.”

“응?”

“이걸?”

그레이와 헤이먼이 놀라서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근육이 뭉친 사람들한테는 분명 필요할 거야. 근데 이렇게 무거우면 못 팔아. 그러니까 가볍게 만들어 줘.”

이해가 가지 않는지 헤이먼의 눈가가 곤란한 듯 찌푸려졌다.

“무게를 줄인들, 이게 팔릴지 모르겠네.”

그레이가 내 편을 들기 시작했다.

“내가 아까 누워 봤는데 편하긴 했어. 형도 누워 봐.”

“……나보고 통나무 위에 누우라고?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누가 하지?”

나는 손을 올려 그레이를 가리켰다.

그레이가 얼떨결에 나를 따라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그런 품위 떨어지는 짓 하고 다니지 마. 솔레아 너도 그레이 그만 놀리고.”

“하, 참내. 마력이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말을 하지. 왜 시비를 걸……어.”

마력이 부족해?

무심코 줄줄 흐르는 대로 나온 말에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헤이먼에게 마력이 부족하다.

사람마다 타고난 마력의 양이 있다는 건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내가 뱉은 문장에서 느껴지는 이 묘한 데자뷰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손끝이 떨려 와서 나는 주먹을 꼭 쥐어야 했다.

내가 화난 것처럼 보였는지 헤이먼은 한숨을 폭 내쉬곤 차분하게 말했다.

“판매하려면 적어도 수백 개에 마력을 넣어야 해. 마법사 고용 비용이 더 들어갈 거야, 솔레아. 무한정으로 솟아나는 마력의 샘물 같은 게 있으면 몰라도 누가 이걸 팔겠니.”

“……그래, 맞아. 맞는 말이야.”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표정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인 그레이가 얼굴이 굳은 걸 확인하곤 따듯한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 솔레아한테 왜 그렇게 말해. 얘 섭섭하게. 너 예민한 거 아는데 그래도 좀 좋게 말해. ……가자, 솔레아.”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그레이는 내 기분을 달래려 말을 마구 걸어 댔다.

“레아, 많이 속상해? 같이 피구할까? 내가 사람 불러올게.”

“일부러 통나무 헤이먼 방에 두고 왔어. 쟤 저거 옮기려면 꽤 고생할걸. 나 잘했지?”

“레아, 응? 나 봐 봐. 그레이 잘생겨서 화 풀리지 않아? ……안 잘생겼나 보네.”

“솔레아. 화 풀어. 헤이먼이 성깔이 지랄맞아 그래. 원래도 그렇지만 몇 달에 한 번씩 더 예민하게 성질부리곤 하잖아. 형이지만 진짜 성격 더러워. 그치?”

멍하니 걷는데 문득 그레이의 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제자리에 멈춰 선 채 그레이의 팔을 붙잡고 되물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아. 넌 기억 못 하지. 뭐, 그 전에도 너는 거의 침대에만 있었으니까. 헤이먼 두어 달에 한 번꼴로 온갖 짜증 다 내면서 비실비실 휘청거리고 그랬잖아.”

생각해 보니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도 헤이먼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짜증스럽게 군 적이 있긴 했다.

“그러다가 헤이먼이 언제 다시 말랑해졌더라?”

“마법 연습인지 훈련인지 그거 한다고 밖에 나갔다 오거나, 집으로 이달론 부르면 괜찮아졌잖아. 쟤는 무슨 마법 수업으로 스트레스를 푸냐.”

그레이를 보내고 혼자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찰칵, 하고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이달론.

마력.

헤이먼.

생각났다.

헤이먼이 그날 내 기억을 지웠던 이유까지.

헤이먼은 마력이 부족한 마법사가 아니야. 이달론에게 마력을 받아 겨우 살아가는 거야.

……그에게 이용당하면서.

나는 무언가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휙 돌려 지나온 길을 되돌아봤다.

……헤이먼을 구해야 하는데.

마법사의 꼭두각시로 살게 하면 지금 이런 돈벌이도 아무 의미가 없는데.

하지만 어떻게?

마력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그놈을 이겨?

이달론을 없앤 후엔?

마력이 없는 헤이먼은 살아갈 수 있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것 같았다.

어떡하지.

……실패하면? 내가 실패해서 아무것도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펼쳐지면?

헤이먼이 죽어서, ……그나마 느꼈던 다정함들도 물거품처럼 다 사라지면?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밀려들어 오자 귀에 물이라도 가득 찬 것처럼 멍해졌다.

지금 멈추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은 너무 쉽게 무너지는데,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쉽게 부서지는데.

엄마가 숨이 막힌다고, 차라리 네가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나를 끌어안고 같이 죽자고 귀에다 속삭였던 날처럼.

사랑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는데.

공작, 헤이먼, 그레이.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나 하나조차 행복하지 못했는데.

애초에 솔레아도 아닌 나한테 자격이 있어?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다니. 내 것이 아니었던 행복을 받았으니 갚고 싶다니.

말도 안 돼. 못 해, 나는.

혼자 남은 방 안의 공기가 하염없이 무거워지며 나를 짓눌러 오기 시작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집에 가자.

아무도 사랑할 필요가 없었던 곳으로 가자.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책임져야 할 것이 없었던 곳으로 돌아가자.

괜찮아,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살면 돼.

지금 가면 지난날들을 행복했다고 반추하며 살아갈 수 있어. 좋은 꿈 꿨다고 털어 내고 웃을 수 있을 거야.

……적어도 나 때문이라고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물밀듯 밀려온 기억에 패닉 상태가 되어 아랫입술이 덜덜 떨려 왔다.

휘청거리며 서랍장으로 가 일기장을 꺼내 펼쳤다.

손에 펜을 쥐고, 흰 천으로 칭칭 감아 묶은 뒤, 하얀 백지 위로 펜을 내렸다.

펜을 밀어 내는 강한 압력은 여전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영화처럼 머릿속에서 잔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엉켜 엉망이다.

‘레아, 차가 너무 뜨겁진 않니?’

‘역시 내 발이 제일 예뻤나 보군.’

‘다친 덴 없고? 아프면 말하렴.’

‘누가 괴롭히면 나 불러.’

‘우리 딸 언제 이렇게 컸지.’

‘야, 너는 오빠한테 미친놈이 뭐냐.’

‘놀라서 넘어질까 봐 잡는 거다.’

‘넌 무슨…… 이런 책을 보냐. 진짜 돌았어?’

‘여긴 재회의 언덕이야.’

종이 위로 물방울이 비처럼 후드득 떨어진다.

“아, 안 돼. 젖으면 안 되는데…….”

소매로 종이를 닦아 낸 뒤, 얼굴을 힘껏 문질러도 물방울은 멈출 줄을 모르고 종이를 적신다.

“제발, 그냥, ……그냥 지금 가게 해 줘.”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도저히 막을 수 없어 그저 손에 힘을 주고 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에만 집중했다.

‘귀환’

이 두 글자만 적으면 뒤에 어떻게 이어지든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가장 확실한 단어니까.

까만 하늘과 별처럼 시야를 가득 메운 노란 반딧불이들, 나를 돌아보며 부서지듯 환하게 웃던 헤이먼과 그레이.

‘다음에 또 오자, 솔레아.’

손이 벌벌 떨려서 글자를 쓰는 게 쉽지가 않다.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땀에 젖어 척척해진 손에 힘을 주고 겨우겨우 한 획씩 적어 내려갔다.

글씨가 엉망으로 일그러졌지만 겨우 적는 데 성공했다.

귀환.

끝났다.

일기장을 덮고 그대로 두 다리를 접어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괜찮을 거야. 실망하는 얼굴 안 봐도 돼.

옷이 눈물에 축축하게 젖어 갈 때쯤 문이 열렸다.

“솔레아. 일단 하나를 가볍게 만들어 봤, ……왜 그래?”

헤이먼의 단정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옆으로 다가왔다.

들고 있던 통나무도 내려놓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내 옆에 주저앉은 헤이먼은 내게 손도 대지 못한 채 당황한 목소리로 옆에서 중얼거렸다.

“울어? 왜, 왜? 네 잘못도 없는데 왜 우는 거지. 솔레아?”

헤이먼의 따듯한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그럼 너는 네 잘못도 아닌데 왜 포기했어? 죽을까 봐 무서웠어? 아니면 나처럼 버림받을까 봐?

마음에 맺힌 말을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가만히 헤이먼의 온기에 몇 분 동안 갇혀 있었다.

왜 하필 다정해선.

고개를 들고 헤이먼의 분홍색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마력도 얼마 없는데 이딴 건 왜 만들었어.”

눈물 젖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헤이먼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 시선을 내리깔며 민망한 듯 작게 답했다.

“……네가 근육통이 심하니까 네 거라도 만들어 주려고 했지.”

헤이먼은 어색하게 덧붙였다.

“내일 같이 호수 보러 갈까.”

차갑게 식은 손을 들어 헤이먼의 옷깃을 붙잡았다가 천천히 놓았다.

아니, 오늘이 끝이야.

그때 창가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나?’

‘쟤 운다!’

나 지금 되게 슬픈데 누가 약 올리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