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92)

40화

* * *

……뭔가 오싹한데. 왜 갑자기 소름이 돋지?

어딘가에서 미친 집착 광공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뜬금없이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륵 흐르더니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의 ‘쎄’ 레이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숱한 세월 속에서 단련해 온 내 쎄이다가 말하고 있었다.

‘뭔가 쎄하다.’

아이작 슐로든의 병사(病死)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나? 공작이 거기 관여했다든가…….

그게 아니면 헤이먼이 요 며칠 내게 은근히 다정하게 구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늘상 틱틱대는 게 일인 분홍 곤듀님이 최근엔 퍽 살갑게 굴었다.

마치 내가 저를 위해 큰 위험을 무릅써서 감동하기라도 한 양.

며칠 전 ‘지하실에서 널 본 기억이 있는데 생각이 잘 안 나.’라고 말했을 때 헤이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지하실? 꿈이라도 꾼 거 아니야?”

“음……. 그런가.”

하긴. 앤이랑 그레이도 내가 낮잠을 잤다고 했으니까.

날이 갈수록 지하실에 쓰러져 있던 헤이먼의 모습이 흐릿해지는 걸 봐선 정말 꿈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레이는 저번 일을 계기로 빌과 꽤 자주 교류하게 되었다.

물론 그리된 걸 그레이는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 와중에 일기장은 며칠 내내 말썽이었다.

이놈 새끼는 내 말을 지독하게도 들어먹질 않았다.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이 된 정확한 이유가 궁금해서

‘마력’

이라고 기를 쓰고 적어 놓으면 그다음 날엔

마, 력시 당 떨어질 땐 스콘에 버터지.

이딴 소리가 적혀 있기 일쑤였다.

“돌았냐고! 가운데에 반점 찍은 적 없었잖아! 그리고 역시가 왜 갑자기 력시가 되는 건데!”

별로 성의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헤이’

헤이 걸, 헤이 걸, 헤이 걸 걸 걸 헤이 유 고 걸, 대래대래댓댓 댓 걸

“이게 뭐야. 이거 노래 가사 아냐? 이 또라이 같은 게. 너 진짜 확 태워 줘?”

벽난로 앞에서 일기장을 들고 사람 멱살인 양 짤짤 흔들어 봤지만 그래 봤자 나만 미친년이었다.

‘그레’

그레이가 운동을 제대로 안 한다고 꿀밤을 때리길래 화나서 ‘아빠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공작은 집에 없었지만 대신 마르실라가 달려와 그레이에게 한참 잔소리를 퍼붓다가 갔다. 속이 시원하다. 그레이 새끼.

‘파티’

파티 초대장이 또다시 뚝 끊겼다. 황녀가 나를 험담한 시종에게 벌을 내렸다는 이야기 덕에 며칠 동안 초대장이 몰아쳤는데. 아무래도 깽판 쳐서 그런 듯.

하……. 그럴 만도 하지.

남의 파티에 가서 결투를 벌이고, 난장판을 치다 왔으니.

이번 일로 더 확실해졌다.

베르고가 더 견고해지지 않으면 헤이먼과 그레이는 항상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이다.

이 망할 놈의 출신 주의.

홧김에 일기장에 씨발이라고 적은 적도 있다.

‘씨발’

씨발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 앞으로는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해야지.

“너 인공 지능이야?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해야지?’ 야! 나와, 인마. 이달의 운세 불러 줄 때부터 알아봤다! 야!”

보란 듯이 다시 욕을 적었다.

‘시발’

시발점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지! 첫 사업은 어떤 걸로 해 볼까. 역시 땅이 넓으니 파나실리를 롤 모델로 삼아서 양모 사업으로 물꼬를 틀까.

……양모 사업?

맞아, 그게 있었지.

여긴 땅이 넓고, 이 땅 위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마물들도 국경 밖으로 몰아낸 지 오래고, 무엇보다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양 몇십 마리를 돌보는 데 양치기 한두 명이면 충분하다고 했으니까.

나는 책을 뒤져서 양모 사업에 관한 내용이 적힌 페이지를 몽땅 표시한 후 공작의 방으로 달려갔다.

힘차게 달려가다 실수로 드레스를 밟아 자빠졌다.

“아악!”

품에 안고 있던 세 권의 책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복도에 널브러졌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방 안에 있던 공작이 문을 열고 나왔다.

“레아!”

놀란 얼굴로 뛰쳐나온 공작은 손에 펜을 쥔 채였다.

“이게 무슨 일이니!”

나를 벌떡 일으켜 세운 공작은 여전히 애 취급 하며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왜 넘어진 거니? 새로 깔아 놓은 카펫에서 미끄러졌어? 아니면, 뛰다가 발에 걸린 거야? 이 책은 또 뭐니. 책 너무 많이 읽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아니면, 선생을 하나 붙여 줄까? 저번에 물었을 땐 혼자 하는 게 편하다며 싫다고 했잖니. 어디 까진 데는 없고? 약이라도 발라야 하지 않니.”

“하나씩요, 아빠. 하나씩 물어보세요.”

머쓱하게 웃으며 공작을 올려다보자 그는 펜을 쥔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이마에 검은 자국을 만들어 냈다.

“아이고.”

제 실수가 민망한지 공작은 헛웃음을 지으며 손등으로 이마를 슥 닦아 낸 뒤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괜찮니?”

“네, 괜찮아요.”

“옷을 밟고 넘어졌니. 평소엔 편하게 바지를 입지. 아, 아니면 발목 길이의 드레스를 준비하라 할까?”

“그래도 돼요?”

“집인데 뭐, 어떠니.”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레 씩 웃은 디에르고는 방 안에 있는 보좌관 라트엘에게 명령했다.

“자네 퇴근하는 길에 살롱에 들러서 우리 애 옷 좀 주문해 주게.”

“저 반대 방향인데요.”

퇴근길에 후진이란 없는 라트엘의 덤덤한 목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 나왔다.

공작이 내 책을 모두 주워 준 뒤 다시 방문 앞에 섰다.

“그럼 내일 출근길에 들러.”

“반대 방향에서 온다니까요.”

공작의 관자놀이가 움찔했다.

“……한 시간 늦게 출근하면 되잖아.”

“공작님 내일 바쁘십니다. 그럼 제 퇴근도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미리 일하고 있을 테니까 자네는 마리에 살롱에 들러서 편하게 입을 만한 가볍고 짧은 드레스 주문하고 와.”

“예, 그럼 제가 오기 전까지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보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내일도 정시에 퇴근하니까요.”

라트엘은 업무가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도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그는 기분 좋게 퇴근을 하려 했다.

하지만 양모 사업에 대해 물어보려면 라트엘도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라트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제게 말입니까?”

“아버지한테도 여쭤볼 거지만 라트엘도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퇴근 귀신 라트엘은 시계를 살폈다.

“16분 안에 정리 가능하십니까?”

“내 딸이 하는 말인데 좀 들어 주지 그러나. 이놈아.”

“욕하시면 안 되죠. 공작님.”

라트엘은 무덤덤하게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은 공작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니?”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이 땅을 그저 군사 훈련 장소로만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베르고 영지 중에서 쓸 만한 땅을 골라 양모 사업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난 라트엘과 공작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내 얘기를 듣고도 라트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공작은 나를 잠시 가만히 보다가 책상 위에 둘둘 말린 채 놓여 있던 종이를 한 장 펼쳤다.

베르고의 지도였다.

“솔레아. 잘 봐라. 이쪽 남서부의 땅을 관리하는 리잔트리 자작은 성질이 고약한 데다 돈을 좋아하지.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아. 안전하고 높은 수익이 보장되는 쪽에만 투자한단다.”

“네.”

이 얘길 갑자기 왜 하지? 나 양모 사업 말하던 중이었는데.

“북동쪽 땅은 어떠니. 다른 쪽 평야보다 크기는 작지만 우리 영지에서 처음으로 하는 시도니 여기부터 하는 것도 좋겠구나.”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라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도 여기가 좋을 듯합니다. 사업이라고 부를 만큼 크게 하진 않더라도 일단 양의 개체 수를 차츰차츰 늘려 나가는 데에 집중하면요.”

말을 마친 라트엘은 고저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이렇게 키운 양모의 질이 다른 곳보다 떨어지면요? 양모 사업은 이미 게르투만에서 크게 하고 있습니다. 땅의 크기가 훨씬 넓고 비옥해 양들이 토실토실하고 당연히 양모의 양도 월등히 많죠. 만약 우리 양모의 질이 떨어져 팔리지 않으면 투자금과 만드는 데 들어간 시간은 어떻게 메우죠? 그 전에 이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우리 영지는 마물 위험 구역이나 전쟁터에 기사를 보내 주고 그에 걸맞은 금액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벌이가 나은 사업 수완입니까, 아가씨?”

나는 들고 있던 책을 라트엘의 가슴팍에 던지듯 안기며 대답했다.

“목숨 걸고 벌어 오는 돈보다는 뭐가 됐든 낫지 않겠어요?”

라트엘은 지지 않고 여전히 차분하게 답했다.

“확실한 이득이 있어야지요. 여기는 많은 영주민들의 목숨이 달린 자리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르투만의 양모 사업을 따라잡기 위해선 몇 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가 없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내가 가만히 서서 눈알만 빠르게 굴리자 공작은 조용해진 나를 살피다가 슬쩍 라트엘을 만류했다.

“그래도 레아가 처음으로 의견을 낸 거니 해 보면 좋지 않겠나.”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장차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이 되실 거라면 희망 정도로는 안 됩니다. 확실한 기획이 있어야죠. 이건 사업입니다.”

라트엘이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려 손목을 들어 올렸고 나는 그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시계 줘 봐요.”

당황하면서도 라트엘은 일단 시계를 풀어 내게 내밀었다.

그에게서 시계를 건네받은 나는 그대로 바닥에 던져 발로 밟아 깨부숴 버렸다.

“레아?!”

공작의 눈이 커다래졌고, 라트엘 역시 당황한 듯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나는 라트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의연하게 물었다.

“시계를 새로 사야겠네요. 시계는 어디 제품이 좋나요?”

아까보다 불쾌한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라트엘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시계는 레체타가 잘 만듭니다. 고장이 잘 안 나죠. 하지만 저처럼 시계를 자주 보는 게 아닌 사람은 아마델로 제품을 주로 사용합니다.”

“왜요?”

“거기가 예쁘게 잘 만들거든요. 시간만 맞으면 이왕이면 비싸고 예쁜 걸 사죠.”

“비싼데 더 잘 팔린다고요?”

“겉치레로 두른 물건들의 가격이 권력의 크기를 상징하기도 하니까요.”

“……양모라고 다를까요?”

그는 의도성 짙은 내 질문에 아무런 말 없이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양모는 굳이 더 화려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화는 ‘굳이’에서부터 옵니다.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야죠.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여겨지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먹힐 거예요. 충분히 승산 있어요.”

라트엘의 눈썹이 움찔 올라갔다.

사람 사는 거야 어디든 비슷하다.

비싸고 화려한 것.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것.

그런 걸 공작새마냥 몸에 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더 새롭고, 더 화려한 것을 좇는다. 물론 돈도 아끼지 않고.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라트엘이 말했듯, 이건 사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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