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나는 슐로든 놈의 뺨을 힘껏 두 대나 때린 덕에 근육통이 찾아와 이틀을 꼬박 끙끙거려야 했다.
이 몸뚱이는 마력으로 치료할 수가 없어서 디에르고 공작은 전전긍긍하며 나를 지켜봤지만 내 입장에선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때렸으니 후폭풍을 맞는 건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마법처럼 짠! 하고 낫는 게 더 말도 안 되는 거잖아.
태연한 내 태도에도 디에르고 공작은 오직 내 아픈 팔만 걱정했다.
그는 내게 근육통의 원인을 묻지 않았다.
“많이 아프니?”
그저 따듯한 목소리로 날 살피며 달콤한 간식을 손수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레이와 빌을 모욕했던 슐로든의 삼남이 죽었다는 소식도 며칠 후에야 듣게 되었다.
“……앤, 방금 뭐라고 했어?”
“아. 그, 아니……. 저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괜찮으니까 말해 봐.”
책상 주변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책들을 정리하던 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정말 그자가 죽었어?”
“……네.”
“공작님이…… 죽인 거야?”
“그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들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 그딴 새끼는 죽는 게 사회에 훨씬 도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게 남을 깔아뭉개는 놈들은 어딜 가나 있었고, 그런 놈들에게 저주를 퍼부은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중 정말로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처음으로 나와 내 주변을 모욕한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자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기보단 소름이 끼쳤다.
죽었으면 좋겠네, 라고 욕한다고 해서 진짜로 사람이 죽기를 바란 건 아니니까.
“나사니엘 백작가에서 손을 쓴 거야?”
아들을 모욕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와는 달리 그들은 진짜 이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모욕한 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거기도 하니까.
“병이 났대요. 뭐……. 아프면 갑자기 죽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래…….”
내 목소리가 차분해지자 앤은 걱정이 됐는지 애써 밝게 답했다.
“그래도! 그자가 나사니엘 영윤님과 그레이 도련님을 모욕한 건 맞으니까요! 잘된 일이죠! 마음 쓰지 마세요, 아가씨!”
“이번 일로 베르고가 손해 본 건 없고?”
“제가 알기론 없어요! 아가씨는 아무 걱정 마시고 건강하기만 하세요! 팔은 이제 괜찮으신 거죠?”
“응.”
“다행이에요, 아가씨!”
앤이 방긋거리며 웃는 탓에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 * *
“슐로든가의 삼남?”
카라샤펠 황녀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시녀에게 물었다.
“예, 아이작 슐로든이라고 평소에도 행실이 건방지고 성격이 괴팍한 자였습니다.”
“디에르고 공작이 단단히 화가 났나 보구나. 하긴, 그럴 분이지. 여태 고자질 한 번 않던 공자들이 제 여동생을 건드렸다고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나 보네.”
과묵한 시녀는 감상을 말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카라샤펠 황녀는 빙긋이 웃으며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슐로든 후가 제 자식을 직접 처리했나 보군.”
“예. 베르고 공께서 삼남의 시체를 확인시켜 주지 않으면 모든 거래를 끊고 그 땅 위의 살아 있는 것들을 모두 불사르겠다고 전했답니다.”
“슐로든 후의 선택이 맞는 거지. 베르고와의 거래가 끊기면 손해가 만만찮을 테니까. 그 많은 아들 중 하나 치우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게다가 제 목숨도 아까웠겠지.”
황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어릴 적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랏샤, 명심하렴. 베르고를 적으로 두지 마라.”
“왜요, 아버지? 아! 폐하!”
아버지라고 불렀다가 황급히 폐하라고 고쳐 말하며 방긋 웃는 딸을 향해 황제는 사랑스럽다는 듯 마주 웃어 주곤 이어 말했다.
“원래 베르고라는 말은 망령들의 땅이라는 뜻이란다.”
“망령들의 땅이요? 그곳에 귀신이 많습니까?”
소리 내어 웃은 황제는 랏샤의 머리칼을 쓰다듬곤 이어 말했다.
“군사들은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있잖니? 아무리 죽여도 그와 똑같은 옷을 입은 병사들이 또 찾아오니 죽지 않는 망령 같다는 소릴 한 거지.”
“그래도 베르고 공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랏샤는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저와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베르고 공작을 떠올렸다.
분명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런 사람의 군대를 보고 망령이라니. 아버지는 농담을 무섭게도 하신다.
하지만 랏샤의 생각과 달리 황제의 얼굴은 조금 차갑게 굳었다.
“새싹이 자라지 않는 그곳에선 군사들이 움튼단다. 그들을 적으로 만들 바엔 차라리 모두 죽이는 편이 나을 거다.”
“……모두 죽여요?”
“그건 힘든 일이지. 그러니 그저 그들이 하는 대로 두어라. 친구가 되면 좋겠지만 그들은 쉽게 곁을 내어 주지 않는단다. ……주군까지도 골라 섬기는 자들이지.”
‘황제인 아버지가 더 대단하잖아요!’라고 씩씩거리며 말했더니 그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사람들을 잘 봐야 한다. 누가 나의 적이고, 친구인지. ……그리고 누구를 건드리면 안 되는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을 어찌 알아보나요?”
“눈을 보아라, 랏샤. 그들의 눈을.”
“눈?”
황제는 카라샤펠의 반짝반짝 빛나는 파란 눈에 짧게 입 맞추곤 이어 말했다.
“절대 굽히지 않는 눈이 있다. 그런 이들을 적으로 둘 바에야…….”
황제는 말을 끝맺지 않고 입을 닫았다. 하지만 랏샤는 이어질 말을 알 수 있었다.
카랴사펠은 황제의 조언을 떠올리다 말고 픽 웃었다.
충성하진 않으나 배신도 않기에 내버려 두었다니. 아버지, 아까운 일을 하셨습니다.
“……아이작 슐로든이 죽은 진짜 이유를 베르고 영애는 모르겠지?”
“예. 마음이 약해 그런 일은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라며…….”
황녀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렸다.
“마음이 약하다니.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이작의 따귀를 두 대나 후려쳤다는데.”
“그래도 막상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겁을 먹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쎄.”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을 베르고의 공녀는 무언가 이상했다.
긴장한 듯 굳어 있으면서도 세상사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슬며시 가족을 언급하며 떠봤을 때 마주했던 자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황녀는 고개를 들어 메리를 불렀다.
얼마 전 그녀에게 솔레아 폰 베르고에 대해 조사해 오라고 지시했었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가져왔나?”
메리는 숨을 가다듬고는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차례차례 설명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정리했다.
위대한 마법사 이달론의 마력량에 준할 만큼의 마력을 지녔거나 마력이 아예 없을 거라는 추측을 토대로 조사해 본 결과…….
“베르고의 공녀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마법학 고서들을 찾아…….”
“메리.”
“예. 폐하.”
“친구 해도 되는 거야?”
“예?”
“네게 마력에 대한 조사를 맡긴 이유는 내가 공녀와 친구를 해도 괜찮을지 위험성을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조사 결과를 차분한 마음으로 듣기 위해선 그걸 먼저 말해 줬으면 하는데.”
“아.”
“친구 해도 되는 건가?”
메리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아차, 황녀 전하께선 눈동자가 사방팔방 날뛰는 것을 싫어하신다.
얼른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카라샤펠 황녀의 미간은 이미 살짝 좁혀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 눈은 기대감으로 묘하게 들떠 있었다.
“빨리. 위험한 자인가? 엄청, 너무, 굉장히 위험한 자면 즉시 처리하겠다. 베르고의 싹을 잘라서라도 처리할 거야. 하지만 적당히 위험하면 곁에 두고 싶어. 가능하면 계속. 내 곁에. 오래도록. 내가 그녀의 주군이 되겠다. 여태껏 이렇게 욕심나는 이는 없었어. 그러니 빨리 답해. 가능한가?”
“아, 예. 네. 가능합니다.”
“역시!”
황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그제야 의자에 등을 기대며 편히 앉은 카라샤펠 황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말해. 마력이 뭐, 어쨌다고?”
그건 별로 안 중요하신 거 같은데요. 메리는 그 말은 꾹 삼킨 채 설명을 시작했다.
“예……. 지난 한 달 가까이 마력석으로 계속 관찰을 해 보았지만, 베르고 공녀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마력석에 비치지 않았습니다. 마력을 넘치듯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숨기는 데에도 상당한 힘이 듭니다. 마력의 흐름까지 숨길 수 있을 리 없고요. 그러니…….”
“마력이 없다?”
“예. 지금으로선 마력이 없다는 가설이 맞을 확률이 더 큽니다.”
“그럼 공녀가 시체란 말인가?”
“시체는 아닙니다. 생기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마력이 없는 이가 살아 움직이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있긴 있었다는 얘기군.”
“고대 마법서 중 금서로 지정된 책을 찾아보니 딱 한 명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야? 어찌 살아 있었지?”
“2백여 년 전, 펠르아이네르의 마지막 왕자였습니다. 이름이나 나이 등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마지막 왕자가 죽었다가 깨어난 이후, 모든 기억과 마력을 잃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그 질문을 끝으로 한동안 고민하는 듯 말이 없던 황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고 메리에게 물었다.
“그 왕자는 어찌 되었지?”
“깨어난 뒤 1년이 채 되기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기록의 끝입니다.”
황녀의 오른쪽 눈썹이 작게 움직였다.
“공녀도 죽는다는 건가?”
“선례로는 그렇습니다.”
카라샤펠은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왠지 모르게 목이 타서 평소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다 식어 버린 차를 들어 목을 축였다.
“메리, 나는 그녀를 친구로 두고 싶다 했어.”
“……예.”
“나는 베르고의 공녀를 살릴 거고 너 또한 그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 메리는 그대로 방을 나가려다 황녀를 향해 질문했다.
“……전하. 이리 정성을 들이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거짓이 없는 자를 만나는 건 드물지만 가능한 일이다. 꽤나 정성을 들이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지. 너처럼.”
황녀는 붉은 입술이 비소를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독을 품은 자에게 거짓이 없기란 불가능해. 나는 그런 자를 본 적이 없다. 공녀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야.”
카라샤펠은 사람을 만날 때면 항상 눈을 바라봤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눈이 흔들리고, 자신감이 없는 자는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그리고 잃을 것이 없는 자의 눈은 아무런 미동이 없다.
솔레아의 깊은 두 눈은 들끓는 분노를 담고 있는 주제에 고요했다.
하지만 딱히 숨길 마음이 없는지 그녀의 자안은 함께 있는 내내 미동도 없이 오롯이 황녀만을 향했다.
“나는 그자가 길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었다 해도 곁에 뒀을 거야.”
말을 마친 황녀는 메리에게 펠르아이네르의 마지막 왕자에 대해 더 알아보라 일렀다.
메리가 나간 후 황녀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조용히 혼자 중얼거렸다.
“차라리 거지였으면 쉬웠겠지.”
카라샤펠은 천천히 눈을 감고 솔레아가 저를 ‘랏샤’라고 부르는 모습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