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슐로든의 얼굴로 돌멩이가 든 장갑이 날아갔다.
제 딴에는 피하려 몸을 틀었지만 그것마저 예상하고 던졌는지 장갑으로 감싼 돌멩이는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슐로든의 광대에 명중했다.
“악!”
광대뼈를 감싸 쥔 슐로든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지만 그레이의 표정은 태연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네가 한 짓 똑같이 한 거지. 난 그래도 예의가 있어서 앞통수로 던졌다. 그리고 이거 결투 신청이야.”
그레이의 말에 구경꾼들은 입을 틀어막으며 저마다 뭐라 뭐라 떠들어 댔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사람에게 돌을 던지다니요. 베르고 공자도 참.”
“부인. 먼저 돌을 던진 건 슐로든 공자 아닙니까.”
“똑같이 행동하는 건 신사답지 못한 행동인 것 같은데.”
“그 말씀도 맞지만 친구의 일에 함께 화내 주는 건 좀 멋있지 않나요?”
암요.
한 대 맞았으면 두 대 때려야지. 그래야 다시는 등쳐 먹힐 일이 없지.
나는 가만히 그레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오빠 야구를 시킬 걸 그랬네.”
옆에 서 있는 헤이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내려다봤다.
“너는 이 상황에 그걸 농담이라고…….”
농담 아닌데. 공중에서 방향이 변하는 무회전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라니. 어느 팀에 들어가도 다들 반길 거야.
게다가 외국 용병이 한국말도 잘하니까 다들 얼마나 좋아하겠어.
장난 섞인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속에선 분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속에 있는 말을 꺼낼 수는 없어 입 닫고 가만히 슐로든과 그레이를 지켜봤다.
돌에 맞은 슐로든의 광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분노로 가득 찬 슐로든이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씨근거렸다.
“감히, 내게 돌팔매질을 해? 귀도 제대로 안 들리는 귀머거리 놈인 걸 여태껏 모른 척해 줬더니 출신도 모르는 놈이 끼어들어서는…….”
작게 이죽거렸지만 근처를 둘러싼 사람들 중 일부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단어 몇 개만 들어도 모욕으로 똘똘 뭉친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감히’ 출신도 모르는 놈에게 돌을 맞은 충격 때문인지 슐로든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바들바들 떨어 대고 있었다.
피에 젖은 얼굴과 악문 턱은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때려죽일 것 같은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그가 한 말을 나무라지 못한 채 쥐 죽은 듯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기에 나는 성큼성큼 걸어 슐로든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내게 말을 걸려는 슐로든의 따귀를 그대로 올려붙였다.
짝, 소리와 함께 슐로든의 얼굴이 돌아갔다.
헙, 하고 숨을 들이켜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아까 돌팔매질에 이어 다시 들려왔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은 후에야 나는 조용히 한 글자, 한 글자씩 씹어뱉듯 말했다.
“감히 건방지게 내 오라버니의 출신을 들먹여?”
출신을 들먹거리는 놈에겐 출신으로 눌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진짜’ 솔레아의 몸이니까.
슐로든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하, 공녀님. 오늘 일 후회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저는 슐로든 후작가의 삼남이며…….”
짝.
다시 한번 그자의 뺨을 때렸다.
“솔레아!”
두 번 때릴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나와 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그레이가 소리를 질렀다.
“네가 슐로든의 무엇이든 상관없다. ‘출신도 모르는 놈’이라고? 네깟 게 제국의 공신인 베르고의 공자에게 출신을 물어?”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슐로든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넌 왜 사탕 뺏긴 애처럼 씩씩대고만 있지? 네가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오빠가 결투를 신청했는데 말이야. 검술을 배우지 못했나?”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천천히 검집으로 손을 뻗던 슐로든이 순식간에 검을 빼 들었다.
내가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베였을지도 모를 각도였다.
다행히 헤이먼이 노란 안개로 순식간에 나를 감싸고 공중으로 띄워 올려 제 쪽으로 당겼다.
갑자기 마법을 써서인지 헤이먼은 평소보다 과하게 숨을 고르며 내게 작은 목소리로 화를 냈다.
“왜 저런 자에게 도발을 해! 슐로든은 예전부터 행실이 안 좋기로 유명하다고.”
“내가 말했지. 저딴 말을 듣고도 가만히 참는 게 이상한 거라고.”
두 손으로 검을 거머쥔 슐로든은 멀어진 나를 힐긋 노려보다가 그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뺨으로 흘러내린 피를 거칠게 닦은 슐로든은 바닥을 구르는 돌멩이 위로 침을 퉤, 뱉곤 그레이를 매섭게 바라봤다.
그레이는 빌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낸 뒤 슐로든을 향해 겨눴다.
내 손이 덜덜 떨리는 게 슐로든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려서인지, 두 사람의 결투가 시작되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내겐 그레이가 지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둘은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슐로든의 얼굴에선 의기양양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하바논 기사단에 최연소로 입단한 나를 상대하겠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난 웃긴데. 넌 긴장되나 봐?”
“……반드시 죽여 주마.”
“뺨 맞아서 뇌가 돌아갔나. 넌 입으로 검 쓰냐?”
특유의 가벼운 말투로 슐로든을 조롱한 그레이가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가 작게 중얼댔다.
“아니, 보폭을 저리 넓게 하면……. 아이고……. 불 보듯 뻔하구만.”
뒤돌아서서 입 닥치라고 말하려는 찰나 두 사람의 검이 맞닿았다.
챙, 하는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날아드는 그레이의 검을 받아 낸 슐로든의 뺨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윽!”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달빛에 의지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살폈지만 내가 있는 방향에선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귀가 없어졌네. 슐로든.”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사방이 워낙 조용해서 차갑게 가라앉은 그레이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제야 바닥을 구르는 슐로든의 왼쪽 귀가 눈에 들어왔다.
몇몇 사람들이 윽, 하는 소리와 함께 헛구역질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야아악!”
괴성을 지르며 그레이의 검을 쳐 낸 슐로든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공중을 길게 가르는 검의 궤도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가 빼낸 그레이가 장난감 칼을 쳐 내듯 슐로든의 검을 쳐 냈다.
다시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웅― 하며 긴 공명을 남겼다.
슐로든의 피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아악!”
너무 빨라 보이진 않았지만 그레이의 검이 그의 어깨를 관통한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검을 놓친 슐로든은 재빠르게 왼손으로 다시 검을 거머쥐었다.
“이 자식이!”
슐로든이 검을 막무가내로 휘두르며 전진했다.
정신없이 검이 날아드는 와중에도 그레이의 냉정한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깔끔하게 모든 공격들을 쳐 내다가 허리를 틀며 슐로든의 검을 위로 쳐올렸다.
슐로든의 검이 날아가 정원 구석에 꽂혔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인을 잃은 채 애처롭게 바닥에 꽂혀 있는 검으로 갔다가 순식간에 슐로든과 그레이에게로 다시 향했다.
어느새 그레이의 검은 슐로든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할 말은?”
“……우연히 나를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라. 근본 없는 놈이 나를…….”
그레이가 검을 쥐고 있는 위치를 바꿔 손잡이로 슐로든의 목을 후려쳤다.
슐로든이 종이 인형마냥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서운하네. 근본도 모른 채 결투를 했다니.”
뺨에 튄 피를 손등으로 부드럽게 닦아 낸 그레이가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곤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레이 폰 베르고다.”
그의 미소를 보니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놓여 움켜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풀렸다.
내가 안도하는 사이,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슐로든에게 뛰어갔다.
아까 내게 시비를 걸었던 레이나였다.
“아이작! 이게 무슨! 피, 피가! 누가 좀 도와줘요! 이봐!”
레이나의 날카로운 음성이 정원을 울렸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하인! 하인 누구 없어! 도와줘! 도와 달라고! 살아 있단 말이야! 아이작! 눈 좀 떠 봐요!”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하던 그녀는 이내 사라를 향해 표독스럽게 외쳤다.
“사라 나사니엘! 당신의 파티에서 당한 변고예요! 당장 하인을 부르지 않고 뭐 하는 건가요!”
빌의 곁으로 가 있던 사라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내 파티에서, 내 오라버니를 모욕한 사람을 도우란 말입니까?”
사라는 제 손수건으로 슐로든이 던진 돌에 맞은 빌의 뒤통수를 감싸며 발걸음을 옮겼다.
쓰러져 있는 슐로든과 레이나에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러게 좀 적당히 하지.”
“아무리 그래도……. 베르고는 공작가잖아.”
“알아서 가야지, 뭐. 누가 챙기겠어. 결투에서 졌잖아.”
작게 소곤대는 사람들 틈에서 중년의 남성이 다 들릴 만하게 외쳤다.
“결투인데 왜 목숨을 끊지 않은 거지? 기사도는 안 배웠나 보지.”
살짝 웃음기가 서린 걸로 봐선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 옆에 서 있던 그레이가 웃음기 띤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솔레아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걸 잘 못 보거든요.”
마침 근처에 서 있던 이가 되게 크게 ‘어? 마음이? 약해?’ 하고 되물었다.
네. 저도 제 마음이 약한 줄 몰랐습니다.
그레이가 빙긋 웃으며 큰 소리로 다시 외쳤다.
“근데 어느 가문의 누구시죠? 기사도에 관해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는데요.”
검을 만지작대며 말하는 걸로 봐선 저 검의 이름이 대화인가 보다.
그레이의 말에 그 누구도 답하지 않은 채 사람들은 다시 우르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중세 시대에선 결투가 그리 큰일도 아니라더니 그들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떠들어 댔다.
“나사니엘 영윤. 그런데 아까 그 얘기가 사실인가요? 귀 말이에요.”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혹시 정말이라면 그동안 배려하지 않았던 게 미안해서 그러지요.”
“귀도 잘 안 들리는데 정말 대견하십니다!”
“그래서 목소리가 컸던 거죠? 정말, 세상에나.”
“제 하인 중에도 귀머거리가 있는데 그자와는 달리…….”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나사니엘은 불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오른쪽 귀는 적당히 들립니다. 목소리가 커서 불편했다면 죄송하군요.”
“아, 그럼 왼쪽은 아예 안 들리나 봐요!”
“날 때부터 그랬었나요?”
빌의 뒤통수를 닦느라 피가 묻은 손수건을 꼭 쥔 사라가 입술을 앙다문 채 벌벌 떨었다.
나는 사라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험한 소리는 내가 할게요.”
그대로 허리를 세우고 큰 소리로 하나씩 말했다.
“대체 누가 아까부터 귀머거리, 귀머거리……. 거슬리네요. 그딴 뒤떨어진 차별적 언어를 쓴 사람이 대체 누굽니까. 그리고 뭐, 대견? 대애견? 대견하다니. 곧 백작가를 이을 나사니엘 영윤에게 누가 함부로 대견하다고 합니까. 할아버지쯤 되시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낮춰 보고 평가하듯 말하는 이가 있다니. 못 들어 주겠네.”
헤이먼이 싱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제 동생이 입은 험하지만 틀린 말을 하진 않습니다. 아……. 손도 험합니다.”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는 헤이먼에게 대놓고 뭐라 할 수 없었던 귀족들은 부채를 펄럭이거나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북적대던 소음이 잦아들자 빌이 슬쩍 그레이의 근처로 가 섰다.
“빌. 할 말 있으면 해.”
“……그레이, 혹시 내 귀 말이야, 전부터 그, 혹시…….”
“알고 있었어. 그게 뭐라고.”
그레이는 빌의 어깨를 툭 치며 이어 말했다.
“야. 나 오늘은 결투 못 한다. 솔레아가 건강해지긴 했어도 막 피 나고 이런 거 잘 못 봐. 마음이 약해.”
웃음이 터진 빌이 고개를 끄덕이곤 슬쩍 눈가를 훔쳤다.
“그렇군! 그럼 다음번엔 차를 마시는 게 어때, 그레이! 내가 초대하지!”
그레이가 평소의 그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 됐어. 바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