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날카롭게 던져진 내 질문에 다시 돌아선 레이나가 비웃음을 머금고 나를 바라봤다.
“네?”
“넌 뭐, 얼마나 알길래 그러냐고 물었어.”
이년은 내가 공부하느라 며칠 밤을 새운 줄이나 알고 떠드는 건가.
“내가 알기론 니르만 황제 4년, 수토비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곳의 포로들을 데려와 노예로 삼은 것이 이 제국의 노예 역사의 시작이었는데.”
“아, 그건…….”
무언가 말하려는 레이나의 말을 끊고 이어서 말했다.
“혹시 최초의 노예가 아니라 최초의 노예 무역에 대해 궁금한 건가? 정쟁 끝에 테르간으로 망명을 가게 된 캄시온 2세가 다시 제르노아로 돌아와 황좌를 차지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테르간 왕의 삼남 올리버 탈리든에게 독점 무역권을 허가해 준 거지. 우리나라 노예 무역도 거기에서 시작했어.”
“……공녀님,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이것도 아닌가? 아, 혹시 번성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던 거야? 올리버 탈리든이 세운 무역 회사는 올리버 3세 때 부흥을 맞게 되는데 그건 그 당시의 황제가 해상 무역 자금을 대 줬기 때문이지. 올리버 무역 회사는 타국에서 노예를 데려오는 것뿐 아니라 각종 향신료와 설탕, 담배도 들여왔어. 그리고 데려온 노예들은 광산이나 농장으로 팔려 나갔지. 이제 이해가 좀 됐나?”
레이나의 표정이 수치로 인해 서서히 벌겋게 물들었다.
“어머나, 설마 백작가에서는 아직도 네르하 콘이 발표한 ‘성서 번역’을 믿고 있는 건 아니지? 그자가 자기 멋대로 죄를 지은 인간은 깨달음을 얻은 인간의 종으로 살며 죄를 씻어야 한다고 덧붙였잖아? 그게 노예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말처럼 전해졌지만 결국 네르하 콘은 말년에 그 모든 번역이 사기임이 입증되어서 감옥에서 죽었고. 모르고 있었나? 설마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텐데. 톨베커만 백작가에선 기본적인 교육도 안 시키나?”
“공녀님! 아무리 그래도 우리 백작가를 모욕하시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레이나의 음성이 커지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는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거지? 선선대 황제께서 ‘노예 제도는 비인도적 처사다.’라고 이미 말씀하신 바 있고 타국에서도 서서히 노예의 수를 줄이고 있는데 왜 제르노아에서는 그게 아직도 성행하냔 말이야.”
내 말에 분이 차올랐는지 붉은 얼굴로 씨근덕거리는 레이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덧붙였다.
“공부를 게을리해 머리가 덜 찼으면 모를 수도 있지.”
그대로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뒤돌았다.
그러곤 아까 레이나 말투를 따라 하며 말했다.
“이번 일은 톨베커만 백작에게 일러도 좋아. 토론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나는 싱긋 웃으며 옆에서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라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도 오늘은 나사니엘 영애의 데뷔탕트니까 이만할까?”
레이나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움켜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 참. 톨베커만 영애. 시간 남으면 책을 좀 읽는 게 어때요? 물론 파티도 좋지만 기억 상실인 나보다 무식해서야 되겠어요?”
나는 레이나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려 비웃은 뒤 사라를 데리고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사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나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왜 그렇게 봐요? 나사니엘 영애?”
“언제 그런 공부를 다 하셨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공녀님! 방금 너무 멋있으셨어요!”
난 미소를 머금고서 나사니엘 영애에게 대답했다.
“딱 하나만 팠는데 그 하나가 시험에 나온 운 좋은 경우죠.”
“네?”
귀여운 소동물처럼 눈을 깜빡이는 사라에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그저 씩 웃고 말았다.
지난 며칠 동안 역사서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살핀 것이 ‘노예의 역사’였다.
제국 최초의 노예, 노예 무역의 시작, 노예 무역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 노예 인식에 대한 변화, 현재 노예들의 위치 등등.
그야말로 잡히는 대로 책을 읽어 나가며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헤이먼 때문에 얼떨결에 우리 공작저로 온 돈이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물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안쓰러운 모습을 본 탓이었다.
근처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라 집중하기가 쉬웠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써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톨베커만은 뭐 하는 백작가인 거지.
설마 나 또 싸웠다고 우리 영지에 피해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그쪽이 먼저 공녀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으니까, 뭐.
혹시라도 공작이 내게 오늘의 일에 대해 물으면 가감 없이 얘기할 작정이었다.
여태 봐 온 디에르고 공작이라면 톨베커만과의 거래를 끊었으면 끊었지, 나를 혼낼 사람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빠니까…….”
“네?”
“아, 아빠가, 그러니까 디에르고 공작님은 오늘 업무 때문에 못 오셨어요. 그래도 나사니엘 영애의 성년을 깊이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 하셨어요.”
나사니엘의 말간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네!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공녀님이랑 공자님들이 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요!”
처음 봤을 때의 낯가림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는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 특유의 해맑은 모습으로 내게 활짝 웃어 보였다.
이곳 기준으로 성년이라고는 하지만 내 눈엔 아직도 어린 10대 소녀였다.
“다들 나를 썩 좋아하지 않던데……. 나사니엘 영애는 내가 괜찮은가 봐요.”
정확히는 나뿐 아니라 베르고 가문 자체를 영 탐탁지 않게 보는 거였지만.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도 사라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생기 넘치게 답했다.
“오빠한테 얘기를 많이 들어서 저는 예전부터 공녀님을 많이 뵙고 싶었어요.”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베르고 공작가에 검을 잘 쓰는 그레이 공자님이 있는데 결투장을 아무리 보내도 대결을 안 해 준다고. 딱 한 번 답장이 온 적이 있는데 동생이 아파서 안 나간다고 했대요.”
“……그랬구나.”
솔레아가 아프지 않았으면 그레이는 빌과 친한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빌이 특이하긴 해도 그레이를 편견 없이 대하는 것 같았는데.
내 얼굴이 어색하게 굳는 것을 봤는지 사라는 내 옆에 바짝 붙으며 작게 속살거렸다.
“그래서 오빠가 병문안 겸 찾아가겠다고 했대요.”
“아, 내가 혹시 이전에 나사니엘 영윤을 만난 적이 있었나요?”
“아뇨. 그레이 공자님이 보낸 심부름꾼이 와서 오빠한테 ‘내 동생 아픈데 걸리적거리지 마.’라고 했대요. 그래서 못 갔어요. 아마 공작가분들 다음으로 우리 오빠가 공녀님이 건강해지시길 바랐을걸요!”
애교 많은 사라는 주변을 슥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까치발을 하고선 근근이 내게 귓속말을 건넸다.
“사실은 저도 공녀님이 너무 궁금했어요.”
귀여워.
너무 귀엽잖아.
헤이먼이 중간에서 전달을 잘못한 거 같아.
‘그 댁 영애도 친절한 성격이니까.’라니.
이건 친절이라기보다는 사랑스럽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모르게 사라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봤는지 사라의 귓불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리구요, 오늘 가시고 나면 나중에 편지 써도 되나요?”
광대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제멋대로 승천하듯 올라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라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때였다.
연회장 바깥, 정원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사람들이 주변을 힐긋거리다가 창문 쪽으로 다가갔고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아예 밖으로 나가서 구경을 시작했다.
“싸움이 붙었나 봐.”
“결투인가?”
주변의 술렁거림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건지 헤이먼이 창문을 확인하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레이의 이름을 중얼거린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몸을 틀었다.
“헤이먼! 지금 싸우는 사람이 그레이야? 넌 어디 있다가 오는 거고?”
내가 달려가 헤이먼의 팔을 붙잡고 묻자 그는 초조한 낯으로 빠르게 내 손목을 잡고 정원으로 향했다.
“잠깐 볼일이 있었어. 나가자. 그레이가 싸움에 휘말린 것 같아. 아무 이유 없이 싸우는 녀석이 아닌데.”
꽤나 걱정이 됐는지 헤이먼은 거의 뛰듯이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그레이가 웬만한 시비에는 반응하지 않는단 걸 알고 있어서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원에 서 있는 건 진짜 그레이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차갑게 식은 눈으로 건너편에 서 있는 한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는 남자가 자신의 일행에게 말했다.
“슐로든 후작가의 삼남이잖아. 저 콧대 높은 자가 이 파티엔 왜 왔지?”
“톨베커만 백작 영애와 만난다는 얘기가 있잖아. 둘이 함께 왔나 보지.”
“아하, 그런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슐로든 영윤이 하는 꼴을 봐. 아무리 그래도 베르고는 공작가잖아. 웬 건방이야?”
“베르고가 공작가라 해도 저 삼남의 출신이…….”
“커흠! 흠! 흠! 공녀님! 흠! 그레이 공자님이! 저기 계시네요! 크흠흠!”
헤이먼과 나를 뒤따라온 사라가 내 옆자리 놈이 헛소리를 하려던 찰나 과하게 헛기침을 하며 나를 불렀다.
그 덕에 옆에 있던 이들은 나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이 다급한 와중에도 사라가 귀엽다니.
나도 돌아가면 꼭 사라한테 편지 써야지. 친해져야지.
얼떨결에 사라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지만 슐로든이라는 놈의 목소리가 들려온 탓에 다시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내가 틀린 말 했나?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그래.”
그레이의 옆에 서 있던 빌은 그레이를 말리려는 건지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바위처럼 꿈쩍도 않은 채 제자리에 서서 슐로든을 무감한 눈으로 계속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구경꾼들이 꽤 모였으니 다시 얘기해 줄까? 두 분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 했습니다. 귀머거리 빌 나사니엘과 베르고의 공자님이라니.”
주변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빌 나사니엘이?”
“나사니엘 백작가의 장남이 귀에 문제가 있다고?”
“그래서 매번 그리 소리를 지른 건가?”
“저런……. 불쌍하기도 하지.”
“나사니엘 백작님이 여태 숨기신 건가?”
“나사니엘 영윤도 대단하네요. 전혀 티 내지도 않고.”
주변의 수군거림이 커지자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린 슐로든이 비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설마 비밀이었던 건 아니겠지? 너무 티가 나서 말이야.”
주변의 소란에도 굴하지 않고 빌이 당당하게 외쳤다.
“슐로든! 이건 가문 간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지 않나! 내게 돌을 던진 건 그냥 넘어갈 테니 이만하는 게 좋겠군!”
하지만 그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부르면 돌아봤어야지. 너 하나 붙잡겠다고 쫄래쫄래 뛰어갈 순 없잖아? 앵벌이 거지도 아니고.”
저 새끼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서려던 찰나, 헤이먼이 내 손목을 잡았다.
놓으라고 말하려던 그때 그레이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천천히 빼내더니 빌에게 말했다.
“빌, 지금 내가 하는 건 결투 신청의 잘못된 예다.”
그레이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아마도 그게 슐로든이 빌에게 던진 돌멩이인 듯했다.
그레이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장갑 안에 돌멩이를 넣더니 망설임 없이 곧장 슐로든을 향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