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거실에 드러누운 채 발을 동동 구르며 한바탕 장난을 친 탓에 드레스가 구겨져 버렸다.
옷을 정돈하러 방으로 올라가자 안에 있던 앤이 울상이 되어 나를 맞았다.
“아가씨……. 이 드레스랑 어울리는 머리 모양도 딱 생각해 놨는데…….”
“하하, 미안. 아니, 그레이가 무슨 다섯 살배기 애처럼 장난을 치잖아. 아빠 앞에서. 헤이먼은 당황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져선 당장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하하하, 그 와중에 라트엘이 아빠한테 계속 ‘공작님. 이제 일하셔야 합니다. 공작님?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왜 안 일어나시는 거죠. 공작님.’ 이러잖아. 얼마나 웃겼는데.”
나는 아직도 웃음이 멈추질 않아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을 낄낄거렸다.
옷의 주름을 다시 잡아 준 앤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뜨겁게 달군 얇은 고데로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말며 말했다.
“아가씨가 이렇게 계속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응?”
거울을 통해 내 뒤에 서 있는 앤의 눈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크게 앓고 나신 뒤 정신을 차리셨을 때, 기억을 잃으셔서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그날 이후로 밤에 달을 볼 때마다 빈단 말이에요.”
“……내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앤은 고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눈물을 슥 훔쳐 내고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요.”
힐긋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한 앤의 손이 빨라졌다.
“기억이야 앞으로 사는 날 동안 계속 만들면 되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기만의 집이 있대요. 그걸 어떻게 꾸미고 사는지는 자기 나름이라는 거예요. 앞으로 아가씨가 마음의 집을 예쁘게 꾸미시면 되죠! 저는요. 제 마음의 집이 꼭 이 저택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매일 청소하고 아가씨가 어디에서든 반짝반짝 빛나도록 신경 쓰고 있어요.”
“하하, 네 마음의 집인데 왜 나를 신경 써?”
“에이. 아가씨랑 같이 있는 게 제 직업이고, 곧 저인걸요.”
귀여운 앤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내가 어릴 때부터 갖고 있는 나만의 집은 얼마나 허접스러울까.
여태 살아왔던 집처럼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곰팡내 나는 곳이겠지.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 때부터 마음의 집이 좁고 더러운 아이들은 어떡하니?”
양옆으로 조금씩 땋은 붉은 머리카락을 윗머리와 묶어 반묶음을 만든 앤은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마음의 집이라고.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커다랗고, 행복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따뜻한 집을 같이 만들어요. 아가씨!”
앤은 서랍에서 작은 핀을 꺼내 내 머리에 꽂고는 밝게 웃었다.
“머리 끝!”
……꿈같은 소리.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누구나 자기 수준에 맞게 사는 거지. 무슨, 주제에 맞지도 않는 커다란 마음의 집 타령을…….
머릿속엔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지만 앤이 한 말은 내 가슴에 천천히 꽃잎처럼 내려앉았다.
‘따뜻한 집을 같이 만들어요. 아가씨!’
방문을 열어 주며 생글거리는 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가씨? 왜 우세요?”
“내가? 울었어?”
“아니, 약간 그렁그렁……. 세상에! 눈물이 흘러서 화장 번지면 다시 해야 하는데!”
요란법석을 떨며 손수건으로 눈 앞머리를 콕콕 찍어 대는 앤 때문에 나는 다시 웃어 버리고 말았다.
“몰래 하품해서 그런가 보네. 갔다 올게, 앤.”
“네, 아가씨! 다녀오세요!”
“……그래, 다녀올게.”
이리저리 헤매도 다시 돌아가게 되는 곳.
그게 집이었지.
긴 복도를 걸어 계단에 다다르자 현관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헤이먼과 그레이가 보였다.
“너어는 오빠들이 어? 기다리다가 눈이 빠져서, 어? 힘들어 죽을 뻔했어! 이거 봐라, 오빠 발이 팅팅 부었잖아? 보이니? 어딜 보니. 레아? 솔레아?”
“머리 모양이 잘 어울리는구나. 레아. 가자.”
“아니……. 형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레아, 드레스 너무 예뻐. 아니, 네가 더 예뻐. 계단 내려오는 거 힘들지?”
일부러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와 내 손을 잡고 함께 내려가는 그레이의 옆모습을 보다가 픽 웃어 버렸다.
“왜 웃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앤, 나도 여기가 내 마음의 집이었으면 좋겠어.
* * *
좀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이 무슨 파티인지 아직도 안 물어봤네.
“지금 누구 파티 가는 거야?”
“일찍도 물어보는군.”
헤이먼이 나를 보며 비웃듯 말했다.
“형은 우리 막내 말에 왜 그렇게 삐딱하게 대답해? 그치, 막내야?”
“……으. 갑자기 왜 이래?”
그레이가 징그럽게 내게 팔짱을 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솔레아. 나 이제부터 너만 믿는다. 알았지?”
“그레이. 약 먹었어? 아니면 먹어야 할 약을 빼먹었어?”
“응응, 그레이 약 먹고 죽어 가는 척할 테니까 네가 대신 싸워 줘.”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맞은편에 앉은 헤이먼을 쳐다보자 그가 대신 대답했다.
“지금 가는 나사니엘 백작가의 영윤이 10년쯤 전에 그레이와 목검 승부를 했다가 졌거든.”
“9년 전이야.”
어느새 내게 기대 있던 몸을 일으키고 똑바로 앉은 그레이가 헤이먼의 말을 수정했다.
“그리고 3년 전 진검 승부에서도 또 졌지. 그때 이후로 그레이를 볼 때마다 다시 승부하자고 계속 귀찮게 굴어.”
“아유, 넌 눈치껏 한 번 정도는 져 주지 그랬어.”
그레이를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불쌍한 강아지 흉내를 냈다.
굳이 비유하자면 여우같이 생긴 놈이.
“힝. 나는 지는 사람이 아닌데.”
헤이먼은 그레이의 잔망을 무시하곤 딱딱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빌 나사니엘은 나쁜 놈은 아니야. 그레이만 보면 승부하자고 귀찮게 구는 게 전부니까. 아마 솔레아 너랑 나는 가만히 파티를 즐기다 오면 될 거야. 그 댁 영애도 친절한 성격이니까.”
“아, 그래?”
“오늘은 사라 나사니엘 영애의 데뷔탕트야. 가서 싸우지 마라, 솔레아. 그레이 너도.”
“나는 다르지. 빌이 계속 싸우자고 하는 거잖아. 난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고 있다니까?”
억울한 그레이가 투덜댐과 동시에 나사니엘 백작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겨우 두 번째 파티인데 별일이야 있겠어?
나는 싱긋 웃으며 저녁 바람을 맞았다.
“왔구나, 그레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으로 들어서자 밖에 서 있던 연한 갈색 머리의 청년이 그레이를 보곤 반갑게 웃으며 빠르게 걸어왔다.
“야, 너 친구 없다며. 쟤는 너 되게 반가워하는데?”
그레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올려다보자 그는 잔뜩 짜증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 표정이 왜 그래우왑!”
내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영윤이 검을 빼 들었다.
“승부를 하자! 그레이!”
“미, 미, 미ㅊ……”
‘미친놈 아니야!’라고 말하려던 찰나 그레이가 어깨동무를 하며 자연스럽게 내 입을 막았다.
“미안, 빌. 난 오늘 동생과 왔어. 동생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진검으로 승부를 겨루는 건 아무래도 그렇잖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나를 보던 청년은 그제야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꽤나 멀쩡한 사람인 척 빙긋이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가 여러 번 결투장을 보냈지만, 그레이에게서 여태 답이 없어 마음이 앞섰습니다. 빌 나사니엘, 이 나사니엘 백작가의 밝고 창창한 미래를 책임질 인재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공녀님!”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인가?
잠깐 고개를 갸웃하며 그레이와 헤이먼을 번갈아 쳐다봤지만 둘 다 내 시선을 무시했다.
빌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헤이먼에게 인사를 건넸다.
“헤이먼 공자님도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사교계에 데뷔했을 때였나요, 그때 헤이먼 공자님이…….”
“오빠! 왜 정원에서 그러고 있어!”
토끼처럼 귀여운 인상의 영애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총총거리며 빠른 발걸음으로 뛰어왔다.
“죄송합니다! 오빠가……! 으악! 베르고 공녀님! 공자님! 안녕하세요! 죄송, 아니,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몰랐어요! 어머나, 죄송해요!”
“아, 사라 나사니엘 영애?”
내가 이름을 부르자 얼굴이 빨개진 영애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가워요. 솔레아 폰 베르고예요. 성년을 맞이한 걸 축하합니다.”
“네, 네. 처음 뵙습니다. 감사합니다! 반갑습, 아. 와 주셔서 기쁩니다. 그리고, 어, 이, 일단 들어가실까요?”
주춤거리며 우리를 저택 안으로 안내하는 사라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나를 힐끔거렸다.
귀엽다. 미어캣 같아.
하지만 사라의 오빠는 불도저였다.
“그레이! 왜 내가 보낸 초대장을 무시하는 거지! 몇 번이나 결투를 신청했는데!”
“빌. 내가 너 얼굴 볼 때마다 말하지만 결투 신청 할 때는 장갑을 던져야 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장갑을 선물하냐고. 너 때문에 서랍이 장갑으로 미어터져.”
“그래도 한 짝만 보내면 쓸모가 없지 않나! 버리지 않았으니 다행이군!”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니.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는 잡초 같은 긍정 마인드네.
파티는 생각보다 괜찮은 분위기였다.
황녀의 파티보다는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참석한 사람이 적었다.
그래서일까, 대놓고 시비 거는 이도 없었다.
사라 나사니엘은 파티의 주인공답게 여기저기 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고, 눈치를 보아 하니 나를 싫어하진 않는 것 같았다.
꽤 시간이 지나자 사라는 눈치를 살피며 내 옆으로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다가왔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주변의 이목을 끌고 있었지만 본인은 최선을 다해 자연스럽게 보이려 노력 중인 것 같아 나도 모른 척했다.
“안, 안녕하세요. 공녀님.”
“네, 나사니엘 영애.”
“저, 제가 듣기로는 저번에 그, 저기…….”
“예. 편히 말하세요. 듣고 있어요.”
“영지에서 노예 무역을 완전히 몰아내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 저희 아버지가 하신 겁니다.”
싱긋 웃으며 답하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머, 나사니엘 영애. 그건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영주민들도 그렇고 베르고 공작님도 그렇고 다들 큰 손해를 봤잖아요?”
고개를 들자 마른 몸매에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톨베커만 백작가의 레이나라고 합니다.”
“……날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내 소개는 굳이 할 필요 없겠네요.”
“그럼요.”
고개를 까딱이며 싱긋 웃은 레이나는 작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기억을 잃으신 분은 편하시겠네요.”
“무슨 의미지?”
싸해진 분위기에 사라가 레이나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늘 내 옆에 있던 헤이먼은 마침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그레이는 빌에게 붙잡힌 채 ‘결투하자, 그레이!’라는 라이브 도전장을 한 시간째 무시하는 중이었다.
레이나는 생글거리며 내게 말했다.
“노예의 역사도, 이 지역의 생리도 모르시니까 그렇게 간단히 공작님께 말씀드리신 거 아니겠어요? 전 다 이해해요. 친구랑 싸우면 화가 난 마음에 아빠한테 이르고 싶을 수도 있죠.”
주둥이가 도를 넘네.
우리 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사라가 도톰한 입술을 꾹 다물며 레이나를 향해 돌아섰다.
“레이나 영애! 당장 그 말 취소하세요! 이런 행동은 참을 수 없습니다!”
작은 입 때문인지 웅얼웅얼 소리치는 모습이 한껏 화가 난 아기 뱁새 같은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사라는 내 대신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사라를 무시한 채 오로지 나만 보며 말했다.
“공녀님, 전 다 이해한다니까요. 아, 이번엔 아버지한테 이르지 마시구요.”
픽 웃으며 뒤돌아선 레이나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그러는 넌 얼마나 아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