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 *
아니나 다를까, 일기장에는 그레이가 한 말이 그대로 적혀 버렸다.
기억이 없어도 큰형을 좋아하게 될 거라니. 흥. 웃기는 소리.
젠장.
짜증을 내며 일기장을 덮고, 제르노아 제국의 역사서를 펼쳤다.
책을 읽다가 기절한 뒤 3일이나 못 깨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공부를 멈출 순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귀족들 앞에서 헤이먼과 그레이가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마음 깊은 곳 양심의 소리가 내게 ‘이미 가족으로 받아들인 거 아니야?’라고 속삭이고 있긴 했지만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솔레아가 고열에 시달리다 사라지지만 않았더라도 이건 전부 그녀가 누렸을 행복이었다.
나는 행복을 훔친 대가를 갚는 것뿐이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 제르노아 역사서를 읽으며 종이에 필기했다.
한국에서 못 했던 공부를 여기서 하네.
아버지를 피해 도망쳤을 때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게 서러웠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면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다시 공부할 수 있을까 했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지윤 씨 중졸이라 그랬죠?’
‘……고등학교 중퇴요.’
‘그게 중졸이죠. 가서 이거 복사 해 와요. 아, 복사할 줄 모르죠? 손 많이 가네, 정말. 소개로 들어왔으면 도와주신 분 민망하지 않게 본인이 알아서 좀 잘해요. 이런 거 하나하나 묻지 말고. 머리가 안 좋으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물어본 적도 없는데 시발 놈아.
처음으로 공장이 아닌 회사에서 일한 기억은 썩 좋지 않았다.
여기로 오기 전 마지막 출근 날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내가 머리가 안 좋은 게 아니란 걸 보여 주지.”
가만있어 보자, 베르고의 첫 번째 영주는…….
몇 시간 뒤, 책상 위는 제르노아 제국과 베르고의 역사에 대해 정리한 종이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렇게 정리하면서 읽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캄시온이 누구더라. 얘는 왜 옆 대륙으로 가 있었어? 엥? 갑자기 왜 돌아왔어?”
“지도가 왜 이래? 아까 앞 장에서는 이거보다 땅이 크지 않았나? 뭐? 언제 조약을 맺어서 넘긴 거야?”
“얘는 즈그 땅도 아니면서 왜 끼어들어? 왕의 처남이라 정통성을 주장하며 쳐들어왔다고? 누구랑 결혼을 했는데 처남이라는 거야.”
공부가 쉬운 게 아니구나.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 사이로 풀썩 엎드렸다.
“……머리 터질 것 같아…….”
그대로 눈을 감으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해 뜰 것 같은데 대충 정리하고 잘까?
안일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래! 공부는 내일!
침대로 가려던 그때, 연회장에서 멀뚱히 서 있던 헤이먼과 그레이의 안쓰러운 뒷모습이 떠올랐다.
“하…….”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다시 책상으로 향했다.
“힘내자. 난 공부를 잘하진 않지만 포기하진 않을 거야.”
들어 본 적도 없는 나라의 역사를 머릿속에 새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쉴 새 없이 움직여 뻐근한 손목을 원을 그리며 한 번 돌려 준 후, 다시 펜을 잡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여느 때처럼 피곤한 아침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평소보다 경쾌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앤…….”
목이 잠겨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는데 앤은 그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어휴! 아가씨! 얼른 일어나세요! 세상에, 얼굴이 이게 뭐예요! 드레스 입어 보셔야 하는데!”
“드레, 큼! 무슨, 드레스?”
눈을 반쯤 뜨고 비몽사몽으로 답하는 사이에 앤은 창가로 가 커튼을 확 젖혔다.
“앤……. 정신 차릴 시간 좀 줘.”
“안 돼요! 저녁에 파티에 간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지금 얼른 드레스 정하고, 장신구 정하고, 아이고, 너무 바빠! 오늘 아침에 드레스들이 도착해서 천만다행이죠!”
앤은 내가 고이 덮고 있던 이불을 빼앗고는 내 두 팔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파티? 무슨 파티?”
내가 얼빠진 얼굴로 질문하자 앤이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초대장이 태풍처럼 날아들었잖아요! 헤이먼 도련님이 오늘 파티에는 꼭 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대답하는 시간조차 아까운지 앤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넋을 잃은 부랑자 꼴로 앉아 있는 나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한 앤은 그대로 잠옷을 벗겨 내곤 곧장 욕실로 집어넣었다.
“잠들지 마시고 얼른 씻고 나오세요! 빨리요, 아가씨! 진짜 빨리요!”
느릿느릿 씻고 나오자 방 안엔 드레스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자! 하나씩 입어 봅시다!”
“솔레아가 파티에 가는 게 흔한 일이 아니라 그런가. 신났구나, 앤.”
“아가씨 말씀 또 재밌게 하시네. 네, 앤은 지금 너무 신나요!”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기까지 한 앤은 연한 노란색에 소매가 풍성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내게 입혔다.
“이건 아무래도 좀 너무 색이 유치하죠? 아가씨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앤의 말에 대답하기 직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마리에 살롱의 마리에입니다.”
“네? 아, 들어오세요.”
마리에가 활짝 웃으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에요? 살롱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요?”
“저번에 공자님께 받은 시곗값이라고 쳐주세요. 오늘도 공녀님을 멋지게 변신시켜 드릴게요.”
콧잔등을 찡그리며 싱긋 웃은 마리에는 냉큼 내게 달려들어 입고 있던 노란 드레스를 순식간에 벗겨 냈다.
“앗! 아니, 잠깐!”
“시간이 없어요. 하녀 아가씨! 저기 진한 푸른색 드레스를! 아니, 그거 말고 그 옆에 거!”
“네! 마리에 님!”
드레스 전쟁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옷을 입어 본 후에야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나도 거울…….”
“아까 보여 드렸는데. 아가씨도 참. 아직 잠이 덜 깨셨나 봐요! 호호호!”
“……어디로…….”
“지금 밖으로 나가는 중이죠. 오늘은 야외 파티라고 했더니 마리에 님이 옷감이 자연광을 받을 때 어떻게 빛나는지 확인해야겠다고 하셨거든요.”
“아…….”
나는 멍하니 앤의 팔을 잡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정원으로 나가자 마리에가 박수갈채를 치며 이렇게 색감이 진한 감색 드레스가 어울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며 환호를 퍼 부었다.
그리고 그녀는 앤에게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들을 여러 개 설명한 뒤 빠르게 살롱으로 출근해 버렸다.
바쁜데도 와 줘서 감사하다고 내가 인사를…… 했던가.
아유, 잠이 안 깨네. 누가 머리를 헤집어 놓기라도 했나.
마리에를 보낸 뒤, 앤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내 뒤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깜짝 놀라 커다래진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공작님과 눈이 마주쳤다.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공작은 한쪽 무릎을 꿇고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 아빠! 괜찮으세요?”
그를 부르며 달려가자 디에르고가 그제야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 하하……. 내가 착각을 해서, 어, 그러니까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안 다치셨어요?”
내가 내민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공작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옷은 처음 보는구나. 색감도……. 20년 전에나 유행했던 것 같고.”
“마리에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이걸로 골라 줬어요.”
“그래……. 그랬구나.”
말을 하는 디에르고 공작은 어쩐지 그리운 눈을 하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눈은 내가 아니라 다른 곳을 보는 것처럼 초점이 흐릿했다.
“공…… 아빠?”
내 목소리에 공작은 눈썹을 움찔 떨더니 평소처럼 온화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 공딸. 공아빠가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 들어가자.”
“그만 놀리세요.”
힐긋 노려보자 공작이 씩 웃어 보였다.
“파티 때문에 드레스를 입었구나.”
“네. 헤이먼이 중요한 파티라고 꼭두새벽부터 이 고생을 시켰어요.”
“저런. 아무리 파티가 중요해도 동생 잠도 못 자게 괴롭히면 안 되지. 오늘 헤이먼이 너보다 안 멋지면 아주 혼쭐을 내 줘야겠네.”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한 디에르고는 나를 저택으로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의 손바닥이 등에 닿을 듯 가까웠지만 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디에르고 공작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어쩐지 잔뜩 응석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네. 그리고 그레이도 혼내 주세요.”
“그레이는 왜?”
“오늘 파티 준비 하느라 오전 운동 못 한다고 했더니 아까 문밖에서 운동을 빼먹으면 어떡하냐고 성질을 부리는데. 어휴…….”
“그놈 참. 동생이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레이도 파티 가기 전에 연무장 열 바퀴 뛰고 가라고 하마. ‘그 좋아하는 운동 너나 해라!’ 이렇게. 어떠니?”
나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디에르고는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내게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건지 디에르고는 헤이먼과 그레이를 불러와 한 소리씩 퍼부었다.
“헤이먼. 사교계도 중요하지만 동생 몸도 안 좋은데 새벽부터 무리를 시키면 안 되지!”
“하지만 아버지, 오늘 파티는 솔레아에게도 중요한 파티입니다.”
“어허! 그리고 그레이 너도. 동생이 일찍부터 준비하느라 바쁜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운동 빼먹었다고 화내는 게 말이 되니. 오빠가 돼 가지고 말이야. 동생을 챙겨 줘야지.”
“저는 동생 건강을 챙겨 주는 거잖아요, 아버지!”
“상황에 따라 동생이 이럴 때는 이렇게 봐주고, 저럴 때는 저렇게 봐주고. 그래야지.”
어쩐지 쌤통이라 나는 디에르고 공작의 뒤에 서서 모르는 척 혀를 빼꼼 내밀었다.
유치한 장난인 걸 아는데도 이상하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레이가 억울한 듯 펄쩍 뛰며 내게 삿대질했다.
“아니, 아빠! 쟤 지금 메롱 하잖아요! 저, 저! 웃는 거 봐! 얄미워 죽겠네, 저거!”
“동생한테 저거라니! 그리고 솔레아! 아빠가 지금 진지하게 네 편 들어 주고 있는데 오빠를 놀리면 안 되지!”
“방금 솔레아 편 들어 준다고 하셨어요? 아들은 너무 서러워! 아빠가 딸 편만 들어 준대! 아들 서러워!”
그레이가 오버스럽게 난장을 피우며 거실 바닥에 드러눕자 헤이먼이 인상을 찡그리고 그레이에게 말했다.
“일어나라. 아버지 앞에서 무슨 추태야.”
헤이먼의 진지한 목소리에도 그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하듯 말했다.
“파티는 딸만 가! 아들은 여기서 살 거야! 아빠 아들 안 사랑해!”
아이처럼 난동을 부리고 있지만 그레이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레이! 무슨 소리냐. 나는 너희를 차별 없이 키웠는데! 호, 혹시 서운한 게 있다면 말해 주면 고치마!”
디에르고 공작의 당황한 얼굴 때문에 웃음이 크게 터져 버렸다.
내가 웃자 그레이가 슬쩍 윙크하며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나도 그레이의 옆에 눕자 헤이먼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솔레아! 너까지 뭐 하는 거냐! 아버지 앞에서 바닥에 드러눕다니!”
“딸도 오늘 피곤해! 딸은 파티 안 가! 파티는 둘째 아들만 가!”
“솔레아! 아버지 앞이다! 일어나!”
그제야 장난인 걸 눈치챈 디에르고 공작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의자에 앉은 채로 두 팔을 늘어뜨리곤 똑같은 말투로 말했다.
“그래! 아빠도 일 안 해! 파티는 둘째 아들만 가!”
“공작님. 일은 하셔야 됩니다.”
그 와중에 나직하게 울리는 보좌관 라트엘의 목소리 때문에 모두 또다시 웃음이 빵 터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