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애런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머뭇대는 사이 황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속이 안 좋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영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 않니.”
황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뻗어 맞잡자 황녀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행히 내겐 구역질이 나지 않나 보군요.”
“……아, 네. 당연히.”
“그럼 잠깐 쉬었다 올까요?”
쉬었다 가자는 말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판타지 세상에서 황녀가 나한테 쉬었다가 오자고 할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잡아먹지 않을 테니 겁먹지 말고 따라와요.”
새파란 하늘을 담아낸 것 같은 그녀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올곧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잡힌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아서 저절로 긴장이 됐다.
애런은 말하는 본새가 재수 없어서 셋이서 돌아가며 바짝 약을 올렸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잖아.
어쩌면 차기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황녀 앞에 서 있으니 저절로 목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황녀의 곁에 서 있던 시녀가 한 걸음 멀어지자 황녀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헤이먼과 그레이에게 말했다.
“공자들은 사용인들 단속을 해야겠군요. 불필요한 이야기까지 퍼지면 안 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황녀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살짝 몸을 틀어 애런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나 헤이먼, 그레이에게 말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애런에게 명령했다.
“까불지 마. 이건 내 파티고, 널 데리고 온 건 순전히 5황비 전하의 체면 때문이니.”
애런이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장 싱그럽게 웃으며 황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 어머니 들먹거리지 마세요. 황제가 ‘사이좋은 가족’을 좋아하니 그에 맞춰 놀아 준 것뿐이면서.”
“놀아 주었다, 라고 주제를 잘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황녀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지 않고 내 손을 잡은 채로 물 위를 걷듯 사뿐사뿐 부드럽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연회장 밖으로 나가기 전, 나는 뒤를 살짝 돌아봤지만 헤이먼과 그레이라고 할지라도 황녀를 말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살려 줘. 이 남매 쪼끔 무서워. 웃으면서 욕하잖아. 난 그래도 욕할 때 인상은 쓴단 말이야.
하지만 마음의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커다란 홀 형식의 연회장을 나와 사람 대여섯 명은 너끈히 이불을 깔고 누워 잘 수 있을 법한 복도를 걸었다.
황녀는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고, 나는 난생처음 보는 건물 형식에 넋이 나가 있었다.
“궁이 신기한가요?”
“아! 네. 처음 보니까요.”
“저택에만 있었으니 답답했겠네요.”
“……딱히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공작님과 오라버니들이 심심하지 않게 잘 대해 준 덕분에…….”
과분하게도요.
뒷말은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황녀가 복도 끝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서자 뒤에서 따라오던 시녀가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다.
손님들이 쉬었다가 가는 방인지 안에는 긴 소파 두 개와 테이블 하나뿐이었다.
“차를 마시면 속이 좀 가라앉겠죠. ……로빈.”
“예, 전하.”
황녀의 부름을 받은 시녀가 짧게 머리를 숙인 뒤 방을 나가자 넓은 방 안에는 황녀의 호위 기사 둘과 다른 시녀 하나,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나만 남았다.
“앉아요, 영애.”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은 황녀는 싱긋 웃으며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예, 감사합니다. 전하.”
어디에 앉아야 하지?
맞은편에 앉아도 되나?
아니, 근데 황녀랑 마주 보고 앉을 수가 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중세 시대 배경 영화를 한 편 보는 건데.
……아니지. 대체 누가 중세 시대로 올 걸 알고 미리 공부하겠냐고.
고민하는 사이 황녀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군요. 제이드, 퀴온. 잠깐 나가 있어.”
기사들이 나가자마자 황녀는 시녀에게 두툼한 방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영문 모를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자 황녀는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침대에 오래 누워 있다 보면 욕창에 걸릴 수도 있지요. 아픈 몸을 이끌고 내 탄일 파티에 와 주어서 기쁩니다.”
“저야말로 영광, 예? 욕창이요?”
무슨 욕창이요.
시녀가 소파의 정가운데에 두툼한 방석을 깔아 줬고, 앉을 자리가 정해졌으니 안 앉을 수가 없었다.
가운데 앉아도 되는 거였구나.
하지만 욕창은 아닌데.
“전하,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저는 욕창이 아니라…….”
“괜찮아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도 책을 읽느라 의자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엉덩이와 허리, 어깨가 아프곤 합니다.”
그건 그냥 아픈 거고, 지금 멀쩡한 사람을 욕창 환자로 만드셨잖아요.
“……아니면, 치질인가요?”
황녀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아닙니다! 욕창이에요! 심하지 않아요! 거의 나아 갑니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앞으로는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을 차차 줄이면 되겠죠.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에 좋은 피부약을 선물할게요.”
“……영광입니다. 전하.”
“욕창이야 뭐, 나으면 될 일이고. 공녀가 오늘 파티에 참석한 이유가 따로 있겠죠?”
저는……. 그레이 화 풀어 주려다가 걔가 따라오라 그래서 따라왔는데요.
어차피 집으로 돌아갈 텐데 가기 전에 중세 유럽 구경이나 해 보고 가자 싶어서 따라왔어요. 한국은 지금 전염병 때문에 해외로 못 나가거든요. 뭐, 저야 돈이 없어서 원래 가 본 적 없지만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라면 황녀에게 온갖 헛소리를 했을 수도 있지만 이젠 여기가 가짜 세상이 아니란 걸 안다.
이 황녀가 바라는 대답이 있는 거 같은데 그녀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말없이 머뭇거리고 있자 황녀는 시녀가 가져온 차를 마시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능청스레 말했다.
“먼저, 내 이름을 말해 주는 게 좋겠네요. 파티에 오기 전에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황녀의 이름을 본인에게 직접 듣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진 않을 테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몰라도 괜찮을 것 같아요.
“카라샤펠 로즈 폰 사파테아도 드 제르노아.”
여기 사람들은 다 이름이 기네.
한국에선 세 글자도 다 안 불러서 서로서로 김 형, 박 형 하면서 사는데.
황녀는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랏샤라 불러도 됩니다.”
랏샤라는 애칭에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 황녀는 커다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하지만 그 속의 푸른 동공은 나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대를 가지고 싶듯, 그대도 날 가질 거라면.”
……뭐요?
외국이라 그런가, 되게 개방적이네.
전혀 의도한 적 없는 개방감에 당황해서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는 공작가를 물려받겠죠?”
찻잔을 손에 든 채로 황녀는 태연하게 물어 왔다.
“……전하, 실례지만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적개심이 가득한 눈이네요.”
웃음기를 머금고 있긴 했지만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당당한 사람인 듯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황녀는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쳤다.
헤이먼이나 그레이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고귀함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대가 나의 검이 되어 준다면, 내가 그대를 베르고의 공작으로 만들어 드리죠. 물론, 그대가 공작이 되었을 때의 베르고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될 겁니다.”
황녀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이 몸 안에 들어온 이후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소공작으로 대했다. 심지어 헤이먼과 그레이조차도.
내가 이 몸으로 들어왔든, 안 들어왔든, 어쨌든 적자인 솔레아에겐 공작이 될 명분이 충분했다.
그러니 솔레아 입장에선 수지가 안 맞는 장사일 텐데.
하지만 왜 황녀는 그것을 두고 나와 거래를 하려 하지?
몰라.
일단 도망가자.
“전하, 황송하지만 공작님께서 아프신 곳 없이 건강하시고, 업무를 하시는 데도 전혀 지장이 없으신데 후계를 얘기하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애런만 재수 없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황녀도 재수가 없네.
굳이 곤란한 상황으로 나를 밀어 넣은 황녀에게 속으로 쌍욕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카라샤펠 황녀의 단단한 음성이 나를 붙잡았다.
“베르고의 공자들이 평생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 건 어떨까요?”
“……예?”
“꽤 사이가 좋은 것 같더군요.”
소파에 앉은 카라샤펠 황녀 주위로만 여유로운 공기가 느릿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무도 그들을 깔보지 않고, 조롱하지 않고, 그 누구도 그들의 과거를 입에 담을 수조차 없도록 해 주겠다.”
티온은 만난 적도 없다.
헤이먼은 가끔 장난을 치지만 그뿐이다.
그레이는 이곳에서 가장 친해진 사람이지만 어쨌든 그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람이다.
공작은 다정하고 솔레아를 깊이 사랑하지만 나는 그녀가 아니다.
나는 그들의 가족이 아니다.
그러니 황녀가 한 말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카라샤펠 황녀의 조건은 솔레아의 가족을 향한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가슴 한가운데를 부지깽이로 쑤시는 듯한 감각을 부정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녀가 내건 조건이 내가 평생을 바랐던 일이기 때문이겠지.
거지새끼, 불쌍한 것, 엄마 도망갔다며, 이래서 못 배운 것들이랑은,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다고 끼어들어, 말 한마디 했다고 죽자고 달려드네. 건방지게, 머리 써야 되는 작업이니까 넌 빠져, 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
칼날처럼 날아온 온갖 말들이 머릿속을 웅웅 울린다.
아무도 나를 깔보지 않고.
누구도 나를 조롱하지 않고.
다시는 내 과거를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저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나는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랐었다.
하지만, 그건 남이 이뤄 줄 수 없는 꿈이었다.
내 과거를 가장 깔보는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겨우 힘을 주어 열었다.
“……사양하겠습니다. 도와주실 필요 없습니다.”
카라샤펠 황녀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나를 바라봤다.
“알아들었습니다. 이만 가 보셔도 좋습니다.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황녀는 방금까지의 대화는 내 환상이었다는 듯 말끔하게 웃었고, 나는 그녀보단 못한 얼굴로 억지로 미소를 띠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전하.”
방을 나오고 나서야 가슴이 미친 것처럼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 * *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네. 공녀가 저리 강단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은 지나가는 참새에게서조차 들은 적 없는데.”
여태껏 방 안에서 조용히 있던 시녀 하나가 구석에서 작은 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전하, 영상석은 어찌할까요.”
카라샤펠은 누구를 만나든 영상을 찍어 기록을 남겨 두었다.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담보를 마련해 두는 것이었다.
“베르고의 공녀에겐 쓸 일이 없겠다. 이런 사사로운 대화 따위로 약점 잡힐 만한 사람도 아닌 것 같아 보이고. 그건 그냥 부숴 버려.”
카라샤펠은 베르고 공녀에 대해 알아보는 걸 조금 뒤로 미루기로 결심했다.
마법사인 그녀의 시녀가 상상도 못 한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전하, 영상석에서 공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