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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192)

27화

황녀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 댔다.

“몸이 안 좋다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가요?”

“예,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운동도 하고 있고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레이에게 시선을 보냈지만 그 역시 황녀를 말릴 순 없는지 그저 웃고만 있었다.

“드레스가 잘 어울려요.”

“황녀 전하께서 입으신 드레스만 못합니다.”

대답한 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황녀와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호수 같은 파란색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황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잡고 있던 손을 짧게 힘주어 잡았다가 놓아 주었다.

“심약하다 들었는데 소문과는 다르군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그렇지, 애런?”

애런은 또 누구야.

황녀의 옆에 선 남자가 그림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가 처음이니 잘 모르겠네요, 여긴 내 동생이에요.”

“아, 동생분…….”

얼떨결에 말했다가 몇 초 뒤에야 깨달았다.

황녀의 동생이면 황자잖아.

내 뒤에 서 있는 헤이먼이 황급하게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동생이 사교계가 처음이라 실례했습니다.”

아, 젠장.

저는 평등한 나라에서 와서 머릿속에서 바로바로 귀족들의 가계도 세팅이 안 된단 말이에요.

“괜찮습니다.”

애런 황자는 헤이먼에게 짧게 대답하며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실수를 포장해 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애런이 먼저 편하게 말을 걸었다.

“오히려 평범하게 인사를 해 주니 색다르고 좋네요, 베르고 영애. 저도 남들처럼 인사를 해도 될까요? 애런 베일리 드 제르노아입니다.”

이름이 길어요.

거울을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날뛰고 있다는 걸.

애런의 연한 갈색 눈이 곱게 휘었다.

“애런이라 불러도 됩니다, 영애.”

“아닙니다. 황자님.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최대한 공손히 대답하곤 헤이먼에게 도와 달라 눈짓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헤이먼이 분위기를 바꿔 보려 얼른 끼어들었다.

“황자 전하께서 마법에 관심이 많으시다 들었습니다.”

“예.”

헤이먼이 일부러 마법 얘기를 꺼냈는데 황자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웃고 있기도 하고 대답도 하긴 했는데.

뭔가…….

사람을 개무시하는 느낌인데.

내 표정이 조금 굳은 걸 봤는지 그레이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너 괜찮아?”

맞다, 그레이가 있었지.

나는 그레이의 옷소매를 잡아당겨 내 옆에 세웠다.

“전하. 여기는 제 셋째 오빠인 그레이입니다.”

갑자기 황자에게 소개되었지만 역시 그레이는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난번 오르슬빈가의 파티에서 짧게 인사드리고 처음 뵙네요, 전하.”

“……그렇군요.”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자 황녀는 자연스럽게 내게 미소 지으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운동은 얼마나 자주 하는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건지.

예전에 공작 부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녀와 내가 똑 닮았다는 것까지.

황녀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주며 대화를 리드해서인지 어느새 나도 그녀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그렇게 황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애런 황자가 갑자기 몸을 휙 돌려 말을 걸었다.

……그레이랑 대화하던 중 아니었나?

애런은 그레이를 완전히 등진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영애의 데뷔탕트는 언제쯤이 될까요?”

“……이미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가 지나서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대답을 하긴 했지만 기분이 구렸다.

쎄한 느낌을 받은 건 나뿐인지 헤이먼과 그레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황녀는 내가 불편해하는 걸 알아차린 듯 얼른 대화를 다시 이끌어 갔다.

“공작가에서 파티를 열게 된다면 나도 가고 싶군요. 영애와 친구가 되고 싶거든요.”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

황녀는 싱긋 웃으며 헤이먼과 그레이에게도 짧은 안부를 물은 후 내게 눈인사를 건네고 다른 사람들에게 걸어갔다.

황녀의 눈부신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애런인지, 개런인지 하는 놈은 미소가 구렸다.

개런이 황녀를 따라 연회장 반대편으로 간 뒤, 나는 헤이먼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놈 왜 저렇게 재수가 없어?”

“쉿. 그런 말 하지 마.”

“그래서 지금 귓속말하잖아. 황녀 전하는 친절하신데 저 사람은 왜 저래. 가정 교육을 덜 받았나.”

“원래 저런 분이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싫어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그만해.”

이게 무슨 답답한 소리야.

그럼 무시당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란 거야?

열이 나서 얼굴까지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그레이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 들어도 너네 무슨 말 했는지 알겠다. 솔레아 표정 봐라.”

“넌 화 안 나?”

“작게 말해.”

속에서 천불이 나네. 이 둔팅이들. 하도 답답해서 그레이를 데리고 벽 쪽에 놓인 소파로 가 앉았다.

“그래도 황족이면 저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어쨌든 너희는 베르고의 공자들이잖아. 솔레아가 공작이 된다 쳐도 그 소공작의 오빠들인데.”

“그레이 감동했쪄. 솔레아가 그레이 걱정해 줘서.”

“아씨, 장난치지 말고.”

사람이 많아서 그레이 멱살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공작저였으면 짤짤짤 흔드는 건데.

그레이는 누군가 소파에 두고 간 듯한 부채를 요염하게 펼쳐 제 입을 가리고는 조금 더 명확한 음성으로 말했다.

“애런 황자는 5황비 소생인데, 황태자 자리를 노리고 있어. 베르고가 그 계획에 걸리적거리겠지.”

“왜?”

“무시하자니 너무 큰 공신가고, 옆에 두자니 거슬리는 애물단지들이 셋이나 있으니까.”

“……너 말 똑바로 해. 무슨 애물단지 말하는 거야? 티온, 헤이먼, 너. 그 세 명 말하는 거면 가만 안 둬.”

음산한 내 목소리에도 그레이는 아랑곳 않고 부채를 팔락팔락 부쳐 대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힝, 우리 레아가 오빠 걱정도 다 해 주네.”

“이게 진짜. 아니, 어쨌든 저런 식으로 싸가지 없게 구는 건 기본 예의가 없는 거잖아.”

멀찍이 서 있다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 헤이먼이 손바닥 위에서 작은 새를 만들어 냈다.

“야, 넌 마력 낭비 좀 하지 마라. 매번 골골대면서.”

그레이의 핀잔에도 노란 날개를 가진 새는 종이처럼 팔랑거리며 날아와 소파에 앉아 있는 우리 두 사람의 사이에서 파스스 부서졌다.

새에게서 헤이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미동도 없는 걸로 봐선 이 목소리는 우리 둘에게만 들리는 마법인 모양이었다.

‘원래 저런 놈이야. 생각 없고 여성 편력 화려하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감히 황녀 전하의 자리를 노리는.’

풉!

웃음이 터지려고 하길래 그레이가 잡고 있는 부채를 뺏어 들어 얼른 얼굴을 가렸다.

그레이 역시 웃음을 참는 건 마찬가지였는지 다리를 꼬고 몸을 반대로 돌려 아예 벽을 바라보았다.

마법으로 험담을 들려준 헤이먼만 태연했다.

뒷담화를 마법으로 까다니.

역시 은밀하고 앙큼한 놈.

셋이서 낄낄거리고 있으니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서자 두 사람은 마치 호위 기사처럼 내 양옆에 따라붙었다.

“솔레아, 그레이랑 춤출까?”

“나 춤출 줄 모르는데.”

“가르쳐 줄게.”

내 손을 잡고 연회장 중앙으로 이끄는 그레이의 뒤로 개런이 반갑다는 듯 웃으며 걸어왔다.

그는 아까도 그랬듯, 헤이먼과 그레이를 투명 인간 취급 하며 내게 바로 말을 걸었다.

“영애. 파티가 처음이라 많이 부담스럽죠? 나가서 잠깐 걸을까요?”

“……예?”

곤란해하는 내 얼굴을 봤는지 그레이가 얼른 끼어들었다.

“전하, 동생이 이런 곳은 처음이라 아무래도 제가 챙겨야…….”

“그래서 내가 챙긴다잖아.”

방금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애런은 짜증스러운 말투로 그레이를 살짝 밀어 냈다.

민다고 밀릴 놈이 아닌데도 그레이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우리 그레이는요.

사람을 발로 차면 뼈도 부숴요.

그리고 손에 도끼를 쥐여 주면 손목을 자르라는 말인 줄 아는 거친 남자인데.

“하지만 전하. 솔레아는…….”

“귀족끼리 얘기하고 있지 않나.”

이 새끼 말하는 거 보게.

귀족끼리 얘기하고 있지 않나?

그럼 그레이는 귀족이 아니라는 거잖아.

황녀 전하 있을 때는 그레이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하더니 이젠 그것조차 안 하고.

개런은 내 인상이 더러워지는 걸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너 같은 놈 한 트럭을 갖다줘도 우리 그레이 못 준다.

옛 어른들 말씀에 친구는 가려 사귀라고 했어.

나를 진정시키듯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린 헤이먼의 손바닥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레이는 황자에게 들은 말 때문인지 더 이상 끼어들지 못했다.

차갑게 식은 내 얼굴을 읽어 내는 최소한의 눈치도 없는 건지 개런 황자는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자네도 놓지. 베르고 영애와 할 얘기가 있으니.”

이 개새끼가 주둥이에 똥을 처발랐나.

나는 가볍게 웃으며 애런에게 잡힌 손목을 빼냈다.

“전하. 제 오빠가 저를 부축해 주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애런이 내게 귓속말이라도 하려는 듯 몸을 숙였다.

“영애, 우린 아마 좋은…….”

“아.”

나는 곧장 뒤로 물러나며 헤이먼에게 등을 기댔다.

“전하. 갑자기 이리 다가오시면 조금…….”

헤이먼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능청스럽게 답했다.

“제 동생이 기억을 잃어서 낯선 사람을 보면 구역질을 합니다.”

“……뭐야?”

그레이가 냉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내 등을 토닥였다.

“많이 역겨워? 그냥 나갈까?”

헤이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그레이가 내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메스껍다고? 토할 것 같다고? 알았어.”

나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이 자식아.

연기하는 것보다 웃음 참기 챌린지가 더 힘들다.

“내가 역겹다는 건가?”

개런의 인상이 더럽게 구겨졌다.

나는 얕은 숨을 뱉으며 울상을 하고 두 손을 짤짤 흔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다만 제가 침대 위에서만 전전하다 오늘 겨우 밖으로 나온 탓에 바깥 공기가 낯설어서 그렇답니다.”

내 가증스러운 말투에 개런의 눈빛이 험상궂게 변했다.

“아까 황녀 전하와 붙어 얘기할 때는 멀쩡하더니. 나한테만 그렇다는 건가, 영애?”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 황녀가 우리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대놓고 이쪽을 보진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거리며 나와 개런 황자를 향했다.

황자는 꽤나 억울한 듯 황녀에게 고자질을 시작했다.

“누님. 베르고 공녀가 아까까진 멀쩡하더니 저와 얘기를 하자마자 구역질이 난다며 난립니다. 거실까지 싹 치우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며 체력을 키운다면서 고작 낯선 이를 봤다고 구역이 치민다는 게 말이 됩니까!”

황녀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 말은 꼭, 베르고에 심어 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촉새처럼 나불대던 개런의 주둥이가 드디어 다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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