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나를 탈의실로 데리고 들어간 마리에는 재빠르게 옷을 벗기더니 직원들에게 시키지도 않고 직접 다른 방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나는 안에 입는 드레스만 입은 채로 서서 직원들을 바라봤지만 그들도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밖에서 헤이먼과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 솔레아는 어디 갔어?”
“우리 ‘레아’는 한 번 더 변신을 하러 갔지. 네가 성질 급하게 돈부터 들이밀러 간 사이에.”
“……‘레아’한테 딱 어울리는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나은 게 있나 보지.”
“그러니까 말이야. 형이 급하게 계산한 레아의 드레스는 일단 마차에 실으라고 해 뒀어.”
“……내 돈으로 샀으니 내 선물이야.”
“네, 네. 형 보기보다 되게 유치하네.”
“생각 없이 유치한 건 네 얘기겠지.”
둘이 아웅다웅 싸우는 동안 마리에는 탈의실 안쪽에 딸린 방 안으로 들어가 한참 휘적거리더니 어두운 붉은색의 드레스를 가져왔다.
하지만 방금 보여 준 드레스들에 비하면 화려한 색감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옷이었다.
어깨 위로는 천 쪼가리 하나 없는 튜브톱 드레스였다.
여배우 시상식 드레스 같네. 근데 솔레아는 몸이 너무 말라서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나를 본 마리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입어 보시죠, 공녀님.”
마리에의 말을 따라 옷을 입어 보니 내게 맞춘 것처럼 잘 맞았다.
마른 사람만 입을 수 있게 만든 건지, 허리 부분이 딱 맞았다.
“저, 마담. 저는 근데 머리가 빨간색이라서 이렇게 다 빨갛게 하면 너무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노출이 좀…….”
우려 섞인 내 목소리에 마리에는 답도 않고 또다시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 검은색 천을 한 무더기 들고 나왔다.
“이걸 걸치시는 겁니다!”
안이 훤히 비치는 아주 얇은 검은색 천이 내 양어깨 위를 둘러쌌다.
드러난 어깨 부분을 숄처럼 감싼 천 때문에 가슴과 어깨가 적당히 가려지긴 했지만 안이 비치는 소재라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음……. 잠깐만요! 기다려 주세요, 공녀님!”
내 모습을 보며 턱을 매만지던 마리에는 또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제 더러운 성질머리에 영감받지 마세요, 마리에 님.
거울 앞에 서니 돈 많고, 성질도 적당히 더러운, 환불 잘 받아 올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마리에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검은색의 폭넓은 레이스를 품 안 가득 들고 있었다.
마리에는 내 앞에 주저앉아서 빠르게 바느질을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공녀님. 저는 바느질이라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이제 정말 거의 다 됐어요!”
그녀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스는 완성됐다.
어깨선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팔뚝을 감싸고 내려오는 검은색의 긴 천 때문에 노출이 과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고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치맛단의 촘촘한 레이스도 위로 올라올수록 일정하게 간격이 넓어져서 방금 손으로 바느질한 퀄리티로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내 눈동자를 본 건지 마리에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생긋 웃었다.
“완성품이라 보기엔 부족한 솜씨니 이건 그냥 무료로 드릴게요, 공녀님.”
“……아니, 그래도 이건.”
“잘 어울리셔서요. 그 어느 분보다. ……자! 시간이 너무 지체됐으니 얼른 머리를 할까요!”
마리에의 말에 몇 사람이 달라붙어 화장을 해 주고, 동시에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달구어진 고데로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만 다음 위로 올려서 고정시키자 긴 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자, 공녀님. 아까 공자님과 농담할 때처럼 표정을 지어 보세요. 이렇게 삶은 감자 같은 말랑한 얼굴 말고요. 긴장 푸세요!”
마리에도 긴장이 많이 풀렸나 봐요. 삶은 감자 같은 말랑한 얼굴이라니…….
내가 픽 웃자 마리에는 입을 쩍 벌리며 박수를 짝짝 쳤다.
“이거예요! 이거! 자신감 넘치는 미소!”
마지막으로 금색 줄이 늘어진 화려한 머리핀까지 꽂고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차를 마시기 위해 찻잔을 들었던 헤이먼은 나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고, 그레이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상해? 표정이 왜 그래.”
혼이 빠진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보던 그레이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더니 성큼성큼 걸어왔다.
“야, 이씨. 와.”
“왜 갑자기 욕이야.”
“와, 무슨. 아까도 내 동생 안 같았는데, 이건…….”
“지금도 솔레아 아니라고 해 보시지.”
“아닙니다. 완벽한 솔레아예요. 이만큼 널 잘 살릴 수 있는 드레스는 없어. 가자.”
말을 마친 후 그레이는 갑자기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더니 마리에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세상에, 공자님! 이건 안 돼요!”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계라니, 이 드레스는 공녀님께 무료로 드리기로 했는걸요!”
“그럼 이거 받으시고 우리 레아한테 어울릴 옷 몇 벌 더 저택으로 보내 주세요. 사이즈는 오늘 봤으니 아실 테고.”
마리에는 감동한 얼굴로 시계를 꽉 움켜쥐었다.
헤이먼은 헤이먼대로 다시 계산대 앞에 가 있는 상태였다.
“시계야 저놈 변덕이고, 드레스값은 내가 내지.”
마리에가 손사래를 치며 돈까지 낼 필요 없다고 말렸지만 헤이먼은 굴하지 않았다.
“돈을 내게끔 옷을 입혀 놓고 돈을 내지 말라니. 제멋대로군.”
쟤는 인성이 지갑으로 다 몰렸나.
물론 마리에의 안목은 뛰어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과하지 않나.
나는 헤이먼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 내 쪽으로 돌렸다.
“헤이먼, 나 때문에 그렇게 큰돈 쓸 필요 없어.”
“그게 무슨 말이지.”
헤이먼의 미간이 구겨졌다.
“말 그대로야. 굳이 나를…….”
“솔레아.”
내 말을 끊은 헤이먼은 내 한쪽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내 표정이 어땠는데.”
헤이먼은 내 질문을 무시하고 가볍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이 드레스엔 오만한 표정이 잘 어울리겠단 건 알겠군.”
마리에가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네! 거만하고! 당당한!”
마리에는 시계가 사라진 그레이의 손목에 화려한 팔찌를 채워 줬다. 그리고 내 목에는 그의 것과 세트인 듯 비슷한 디자인의 목걸이를 걸어 주려 했다.
“이 목걸이는 뭔가요? 뺄까요?”
로또 종이가 들어 있는 펜던트를 빼려고 하는 마리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건 안 돼요!”
다급한 내 목소리에도 마리에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프로의 웃음을 지으며 목걸이를 그대로 두었다.
“그럼 이쪽 목걸이는 줄을 더 길게 해서 두 번 감을게요. 그게 더 잘 어울리겠네요.”
마리에는 능숙하게 방금 걸었던 목걸이의 줄을 다른 것으로 바꿔 끼우고 손수 내 목에 걸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이먼이 끼어들었다.
“……내 건?”
“물론 있습니다.”
자본주의 미소로 화답한 마리에는 헤이먼에게 우리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브로치를 건넸다. 그는 그것을 곧장 왼쪽 가슴에 매달았다.
뿌듯한 표정의 마리에는 마차까지 우리를 배웅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봐도 세 분이 가족이라는 걸 바로 알겠어요.”
가족이라는 말에 그레이는 티 나게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고, 별다른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헤이먼 역시 인상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내가 어색하게 웃는 게 보였는지 그레이는 내 머리 장식을 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솔레아.”
“왜.”
“아무리 헤이먼이 싫어도 그렇게 표정을 굳힐 건 없잖아. 헤이먼 섭섭하게.”
“무슨 소리야. 헤이먼 때문에 그런 거 아닌데!”
“뭐야, 그럼 나 때문이야? 힝. 그레이 슬퍼. 그레이는 솔레아가 그레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솔레아는 가족이 맞긴 한데.”
나는 아니란 말이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깐 버벅거리던 사이 그레이는 대화 주제를 바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티장에 도착한 듯 마차가 멈춰 섰다.
“그런데 오늘 어떤 파티야?”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며 묻자 헤이먼이 그것도 모르고 따라왔냐는 표정으로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깔끔하게 손질된 분홍색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긴 헤이먼이 커다란 문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녀 전하의 탄일 파티다.”
“아, 황녀 전하의 탄일 파……. 뭐?”
아까 마부가 ‘베르고 공작가입니다.’라고 인사한 뒤에도 한참 동안 마차가 달리더라니.
그게 넓은 황궁 내 부지를 달리느라 그런 거였냐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끝도 없이 펼쳐진 정원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도저히 걸음이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의 손목을 잡고 정원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왜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나 파티 처음이잖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괜찮아. 누가 네게 춤을 추자고 말을 걸면 은근슬쩍 그레이한테 넘겨라.”
이 자식, 공작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그레이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 일단 나한테 넘겨.”
“……넌 그래도 괜찮아?”
너 진짜 친구 없어?
차마 속에 있는 질문은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레이는 자신감 넘치게 웃어 보였다.
“당연히 괜찮지.”
괜찮긴 개뿔이 괜찮아. 집에만 있던 애보다 친구가 없으면 어떡하냐고.
아, 안 돼. 아픈 상처 건들지 말자.
나는 고개를 짤짤 흔들고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래, 오늘의 주인공은 탄일을 맞이하신 황녀 전하와 친구를 만들러 온 그레이다! 내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확실히 부담이 덜했다.
나는 아까 마리에가 가르쳐 준 대로 오만불손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걸었다.
아치형으로 된 넓은 문 앞에 선 후, 헤이먼은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베르고 공작가의 헤이먼 폰 베르고 님, 그레이 폰 베르고 님, 솔레아 폰 베르고 님 입장하십니다.”
연회장 안 사람들의 시선이 곧장 우리에게 꽂혔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꽤나 가까이서 들려왔다.
“베르고의 공녀도 왔다고?”
“처음 아닌가? 아프다며.”
“전하께 눈도장이라도 찍으러 온 건가.”
힐긋거리며 위아래로 훑는 눈알들을 보아 하니 썩 좋은 반응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이 두 사람이 입양아라 해도 베르고 공작가는 공신 가문이 아니던가. 게다가 첫째인 티온도 지금 전쟁터에서 공을 꽤 많이 쌓고 있다고 들었는데.
기분이 더러워지자 표정도 같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내 얼굴을 본 그레이가 옆에서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너 지금 옷이랑 얼굴이랑 딱 잘 어울린다. 성질 완전 더러워 보여.”
“사람들이 말을 개같이 하잖아.”
“네 표정이 더하니까 괜찮아. 우리가 이겼어.”
크게 웃지 않으려고 입꼬리에 힘을 주다 보니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히 올라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흠칫 떨더니 고개를 돌리고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얘 지금 일부러 나 웃긴 건가.
“둘 다 조용히 해.”
우리에게 주의를 준 헤이먼은 긴 다리로 파티장을 가로질러 짙은 푸른색의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금발 머리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 사람이 황녀겠지.
레몬색의 밝은 금발이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헤이먼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그레이도 허리를 살짝 숙이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같이 인사하라는 거구나.
나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올렸다.
황녀의 기품 넘치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헤이먼.”
“탄일을 경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그레이.”
“예, 전하.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레이 폰 베르고입니다.”
“그대는 처음 보네요.”
황녀가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투명한 파란색 눈동자가 호기심에 반짝거렸다.
“……솔레아 폰 베르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대의 첫 파티가 내 탄일 파티라니 기쁩니다. 파티가 처음이라 낯설죠?”
우아한 미소와 함께 황녀가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청년이 말을 걸면 그레이한테 넘겨야 하는 건 알겠는데 황녀가 말을 걸어도 넘겨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