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92)

25화

내 얼빠진 표정을 보고도 디에르고 공작은 모른 척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레이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헤이먼이라도……. 아니, 헤이먼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은근히 무심해서, ……역시 그레이가 딱인데.”

왜 그레이를 앞세워야 하는 거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공작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친구를 사귀는 게 싫으세요?”

“뭐?”

“……그러실 수 있겠네요. 갑자기 파티에 가게 된 데다, 제가 기억을 잃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니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잖아요.”

공작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무슨 소리니!”

공작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더듬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음, 그게, ……그레이는 친구가 별로 없으니까, 네 오빠한테 먼저 기회를 주라는 거였지.”

“아, 정말요?”

그레이 친구 없구나.

“그래, 넌 파티에 몇 번 더 참석한 뒤,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고 나서 친구를 사귀는 게 어떻겠니. 아빠는 그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알았어요.”

공작은 부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청년들이 말 걸면 무조건 그레이한테 넘기렴. 걔는 친구를 좀 사귀어야 해.”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네! 공작님!”

각오를 다지며 내 방으로 돌아가자 헤이먼과 그레이는 이미 외출 준비를 다 마친 상태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입어야 할 드레스는 방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솔레아는 이렇게 입고 가는 건가.

아무리 파티가 처음이라지만, 이런 평상복 차림으로 가면 안 된다는 건 나도 아는 상식인데.

“솔레아가 입을 드레스는?”

“그레이가 보니까 솔레아가 입을 만한 드레스가 없더라고. 드레스부터 사자.”

쟨 또 왜 3인칭을 쓰는 거야.

헤이먼이 조금 뻘게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헤, 헤이먼도 그렇게 생각한다.”

헤이먼까지 왜 저러지.

나는 속으로 그레이를 안쓰러워하며 측은하게 쳐다봤다.

네가 자꾸 3인칭을 쓰니까 친구가 별로 없지. 니네 아버지도 걱정하시더라.

하지만 둘 다 꽤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인심 쓴다는 마음으로 3인칭 쓰기에 동참하기로 했다.

“……솔레아는 그레이가 예쁜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작게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들은 그레이가 웃으며 걸어와 내 뒤의 방문을 열었다.

“걱정 마. 그레이는 항상 예쁘니까. 오늘은 솔레아도 중요하니까, 어서 가자.”

……공작님. 그레이가 이렇게 사람을 잘 후리는데 가만히 내버려 둬도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요.

헤이먼과 그레이, 그리고 나를 실은 마차가 어딘가로 출발했다.

이곳에 온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마차를 타고 저택 밖으로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창문 열어도 돼?”

은근히 신난 목소리가 티 났는지 그레이는 팔을 뻗어 직접 창문을 열어 주었다.

다그닥다그닥 천천히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시원한 바람이 두 볼을 스쳐 지나갔다.

공작저의 넓은 부지를 지나자 곧 사람들의 말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길거리 사람들의 시선이 열린 창문 너머의 내게 부담스럽게 꽂히자 헤이먼이 창문을 닫았다.

“곧 도착이야.”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헤이먼과 그레이가 재빠르게 문밖으로 내렸다.

그러곤 둘이 동시에 아직 마차 안에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려, 솔레아.”

“누구 손을 잡으라고 둘 다 내미는 거야?”

내 질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잠깐 응시하긴 했지만 둘 중 누구도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그레이 손이 더 크니까 솔레아는 당연히 그레이 손을 잡아야지.”

“그런 논리라면 내 손이 더 안성맞춤이지. 잡기에 편하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마부가 눈치를 살피며 내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둘 다! 둘, 다!’

마부의 조언대로 나는 두 사람의 손을 양손에 각각 잡고서 마차에서 내렸다.

“우와.”

탄성이 절로 나오는 건물이었다.

마치 공작저를 작게 본뜬 것처럼 생긴 커다란 상아색 건물 앞에는 진한 남색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마리에 살롱’

건물 외관에 넋이 나간 나를 이끌며 헤이먼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간 없어. 일단 오늘은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부터 사고, 다음에 사람을 불러 드레스를 몇 벌 주문하는 게 낫겠어.”

“그래, 파티에 너무 늦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들어가자, 레아.”

“……아버지만 레아라고 부르시지 않나? 그레이.”

“형도 친하면 레아라고 부르든가. 아, 아직 덜 친해서 못 부르나?”

그레이의 이죽거림에 헤이먼이 세상 비열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난 ‘레아’에게 딱 좋은 노예를 선물했는데 넌 뭘 했지?”

“난 오늘 ‘레아’가 밖에 나올 수 있을 만한 체력을 직접 만들어 준 사람이지. 형은 그동안 뭐 했어?”

“난, ……발이 예쁜, 아니 그게 아니라…….”

“가자, 레아.”

헤이먼이 버벅거리는 사이 그레이가 내 손을 잡고 살롱의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에는 화려한 옷과 천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하지만 화사한 색채감보다 먼저 나를 사로잡은 건 달콤한 꽃향기였다.

향수도 함께 파는 곳인지 바깥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향에 기분이 저절로 들떴다.

가게의 직원들이 문 양옆으로 죽 줄지어 서 있었고, 그중 가장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세요! 베르고 공자님, 공녀님! 저는 이 살롱의 주인인 리끌로네 마리에라고 합니다. 방금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드레스 몇 벌을 준비했는데, 사이즈가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언제 들어왔는지 헤이먼이 빠르게 대답했다.

“레아는 말랐으니 몸에 너무 붙는 옷은 안 돼. 적당한 걸로 부탁하지.”

마리에의 얼굴 위로 올라온 자본주의 미소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내 안의 코리안 유교걸은 반응했다.

마리에가 못해도 서른은 넘어 보이는데…….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반말을?

아니, 물론 귀족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사용인들에게도 반말을 하니까.

아, 그래도 내 양심이.

눈동자가 흔들리며 아래로 점점 떨어지고 있을 즈음, 그레이가 살짝 허리를 숙여 내게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왜 그래? 불편해?”

“……아니, 나도 반말을 해야 하나 싶어서. 그게 조금.”

“아.”

짧은 탄성을 뱉은 그레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마리에의 손을 살포시 잡아 올렸다.

“그레이 폰 베르고입니다. 내 동생을 오늘 하루 제일 멋지게 만들어 주길 바랍니다, 마담 마리에.”

말을 마친 후 그레이는 마리에의 손등에 짧게 키스했다.

와.

보고 있는 나까지 열이 오를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였다.

마리에 역시 그렇게 느꼈는지 그녀의 미소가 한층 더 밝아졌다.

저건 자본주의 미소가 아니야.

저건 진심으로 행복할 때 나오는 월급 통장 앞에서의 함박웃음이야.

공작님. 그레이가 사람을 후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요.

이미 충분히 청춘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 목소리는 당연히 공작에게 닿지 않았다.

“네! 그럼요, 공자님. 맡겨만 주십시오.”

옆에 서 있는 헤이먼이 작게 ‘쳇.’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나 역시 지금 그레이에게 정신이 팔려 있어서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마리에는 내가 이 세계로 와서 본 미소 중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공녀님께 어울릴 드레스를 준비하겠습니다. 공자님들께선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리에를 따라 안으로 이동하자 온갖 드레스들이 줄줄이 걸려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공녀님. 혹시 좋아하는 색이나 디자인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긴장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시면 여기 걸린 것들 중에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신가요?”

마리에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원래의 나라면 진작 도망쳤을 분위기였다.

이런 귀한 대접은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저는 백화점도 잘 안 가는 사람이에요.

내가 백화점에 갈 때는 저녁 8시뿐이었다.

시간 맞춰서 지하 1층으로 가면 유부초밥을 떨이로 세 팩 만 원에 파니까.

그걸로 세끼를 해결하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제가.

잔뜩 긴장한 나를 보며 마리에는 능숙하게 말을 이었다.

“공녀님. 아쉽게도 저희가 주문 제작을 주로 하는 살롱이라 준비된 드레스는 고작해야 열 벌 남짓입니다. 그럼 하나씩 제하는 방식으로 결정해 볼까요?”

“네, 네.”

“머리나 화장은 옷을 고른 다음에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공녀님 생각은 어떠세요?”

“예, 좋아요.”

“어쩜, 공녀님은 저와 생각이 잘 맞으시네요!”

그냥 마리에가 장사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것 같은데요…….

마리에는 활짝 웃으며 내게 작은 쿠키를 건넸다.

“저는 달콤한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공녀님도 하나 드셔 보시겠어요?”

“네.”

달콤한 쿠키를 입에 넣자 그대로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공녀님께서 뭘 좋아하실지 모르니 일단 열 벌을 모두 가져와 보라고 할게요.”

잠시 후, 내 앞에 총천연색의 화려한 드레스들이 줄줄이 펼쳐졌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날뛰는 걸 봤는지 마리에는 내 옆에서 다정하게 말했다.

“공녀님은 마르셨지만 어깨가 좁지는 않으셔서 드러내도 좋을 것 같아요, 어떠세요?”

멍하니 대답했다.

“네, 네. 좋아요.”

열 벌 중에서 두 벌이 사라졌다.

“그리고 아까 쿠키를 드실 때 보니 손목이 가느셔서 손목을 드러내는 깔끔한 디자인이 잘 어울릴 것 같으세요. 저기 보세요, 공녀님.”

마리에가 직접 드레스 두 벌 사이로 걸어가 손목 부분을 보여 줬다.

하나는 화려한 패턴의 옷감에 프릴까지 달린 디자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끝부분에 자수 처리가 된 디자인이었다.

“둘 중에 어떤 게 좋으세요?”

“……오른쪽이요.”

“안목이 아주 고급스러우세요, 공녀님.”

마리에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전 아무리 생각해도 마리에가 장사를 잘하는 것 같다니까요.

그런 식으로 몇 벌을 더 제하고 나니 연한 살몬빛의 드레스와 아주 진한 초록색 드레스만 남았다.

“남은 두 벌은 직접 입어 보시고 공자님들께 의견을 여쭤보는 게 어떨까요?”

마리에가 이끄는 대로 옷을 갈아입은 뒤 머리를 가볍게 올렸다.

처음은 짙은 초록빛의 드레스였다.

어깨가 넓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밖으로 나서자 긴 소파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걸로 하지.”

헤이먼은 계산을 하려는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레이는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보다가 조심스레 오른손을 들었다.

“마담? 실례지만 솔레아는 뒷문으로 빠져나갔나요? 내 동생이 안 보이네요.”

바짝 긴장해 있었는데 그레이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그제야 나는 긴장을 풀고 평소처럼 그레이에게 장난을 쳤다.

“아이씨, 너 눈 뜨고도 안 보여? 감겨 줘?”

“저기요. 저는 아이씨가 아니라 그레이거든요.”

“그레이, 죽고 싶어?”

“힝. 그레이는 솔레아랑 파티 가고 싶은데.”

“그럼 마차 뒤에 매달아 줄 테니까 뛰어와. 난 헤이먼이랑 마차 안에 타고 있을게.”

“넌 오빠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그레이와 장난치며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데 마리에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눈썹을 파르르 떨던 그녀는 갑자기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공녀님!”

“네, 네?”

“이미지가……. 이, 이런 이미지에 이 옷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시, 다시! 공자님! 아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얼떨떨하게 그레이를 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는데 마리에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를 끌고 다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