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 *
디에르고 공작의 머릿속에 솔레아가 했던 말이 둥둥 떠다녔다.
‘제게 신경 쓰지 마세요.’
잉크를 충분히 머금은 펜이 종이 위에서 아무런 글자도 쓰지 못한 채 가만히 멈춰 있었다.
물안개처럼 퍼지는 검은 잉크 자국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디에르고는 펜촉으로 종이 위를 툭툭 두드렸다.
“기억을 잃고 낯설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서운하게 한 일이 있나.”
원래 조용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눈이 마주치면 살포시 웃어 주던 아이였다.
몸도 마음도 심약해, 딱 그거 하나가 걱정이었는데.
어째 거리가 백만 년은 멀어진 기분이었다.
디에르고가 작게 한숨을 폭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헤이먼입니다.”
“들어오거라.”
집무실 중앙까지 걸어온 헤이먼은 디에르고의 책상 위에 손수건으로 싼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지.”
“솔레아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놈의 혀입니다.”
단번에 디에르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리 집안에서 심부름을 하던 놈인데 그레이가 잡았습니다. 죄가 명백한데도 계속 억울하다 하길래 공작님께 네 죄를 직접 물어보겠다 하고 가져왔습니다.”
무덤덤하게 이어지는 헤이먼의 말을 들으면서도 디에르고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진한 보라색 눈동자가 천천히 헤이먼을 향했다.
“살려 뒀니.”
“지금쯤 죽었겠네요.”
“잘했다. 이건 가는 길에 버리렴.”
피가 묻은 손수건 뭉치를 힐긋 바라본 디에르고가 작게 한숨을 내쉬다 말고 퍼뜩 머리를 들었다.
“솔레아가 알고 있니?”
“아니요.”
헤이먼이 모건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이런 일은 본인이 알아 봐야 아무런 득도 없다. 상처만 될 뿐.
이제 겨우 건강해지고, 활달해져서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이딴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다시 방에 틀어박히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디에르고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듯 둘은 묵묵히 손수건을 바라봤다.
“됐다, 괜히 들고 다니지 않는 편이 낫겠구나.”
디에르고는 손수건을 그대로 들어 올려 벽난로를 향해 던졌다.
여름이 가까워졌으나 아직 저녁은 쌀쌀해서 불을 피워 놓은 난로의 불길 속으로 작은 뭉텅이 하나가 떨어졌다.
입을 함부로 놀리던 사내의 혀가 그 즉시 전소되어 사라졌다.
파르륵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던 디에르고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며 덤덤히 물었다.
“헤이먼, 안색이 안 좋구나. 혹시 마력을 쓴 거니.”
“……조금 사용했습니다.”
“마력을 쓸 때마다 안색이 안 좋아지는구나. 몸이 아프진 않고?”
“네.”
“언제든 아프면 쉬렴.”
“괜찮습니다.”
그 말에 디에르고 공작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애들은 왜 항상 괜찮다고 하는지.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말해 주면 좋을 텐데.”
헤이먼은 불꽃 그림자가 진 디에르고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걱정을 끼치는 게 싫으니까요.”
디에르고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도 이제 내겐 너희뿐이잖니. 조금 더 걱정하게 해 주겠니.”
디에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신과 키가 비슷해진 헤이먼을 껴안았다.
벽난로 속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헤이먼은 속으로 조용히 덧붙였다.
‘죄송해요. 아버지.’
* * *
밥을 다 먹은 후 그레이는 나를 따라 내 방으로 올라왔다.
“너 근데 오늘 운동 안 해서 어떡해. 내일 두 배로 할까?”
“나 오늘 운동 했어.”
“혼자서?”
“아니, 돈이랑.”
“……누구?”
“돈. 헤이먼이 데려온 사람.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 운동할 때 옆에서 개수 세고, 응원하라고 했지. 확실히 동기 부여가 잘되더라고.”
잠깐 아무 말이 없던 그레이는 조금 불퉁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앞으론 혼자 하면 되겠네.”
쟤는 왜 또 저래.
“아, 무슨 소리야. 오늘도 네가 가르쳐 준 것들 조금씩 섞어서 했는데. 발전이 있으려면 스승이 있어야지.”
‘스승’ 소리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레이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아유, 말랑한 사람.
사르르 햇살처럼 웃은 그레이는 앤을 불러 명령했다.
“솔레아도 파티에 갈 거니까 드레스 좀 가져와.”
“……저희 아가씨가 파티에요?”
“원래 예정되어 있던 건 아니지만 초대장에 ‘베르고 공작가’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상관없겠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그레이의 말에 앤 역시 동의하는 듯 활짝 웃으며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쟤는 참 솔레아를 좋아하네.”
나는 또 무심코 3인칭으로 솔레아를 칭했고, 그레이는 놀릴 건수를 놓치지 않았다.
“그레이도 솔레아 좋아하는데.”
“솔레아는 그레이 별론데.”
“……야, 너는 그래도 오빠한테……. 아까 남매라고 해 놓고.”
“세상천지에 자기 오빠 좋아하는 여동생이 어디 있어. 남매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전투 유전자를 타고 태어나는 거래.”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띤 채 그레이가 말했다.
“같은 유전자도 아니잖아, 우리.”
“같이 자란 거 아냐? 그럼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기억을 잃었어도 너 볼 때마다 짜증 나는 걸 보면 분명히 오빠가 맞는데.”
장난기 섞인 내 말투에 그레이의 얼굴에 떠오른 잔잔한 우울감은 금세 사라졌다.
그레이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그래.”
넌 진짜 평생 활짝 웃어야겠다.
살짝 웃으면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 같아 보인단 말이야.
“대체 전생에 무슨 업보를 쌓은 거야. 이목구비가 왜 그렇게 못되게 생겼어?”
“아니, 아까는 잘생겼다면서.”
“약간 재질이 다르다니까. 헤이먼만 해도 그래. 얼마나 배우처럼…….”
내 말이 끝나기 전, 방문이 열렸다.
하지만 들어온 건 앤뿐만이 아니었다.
진한 남색 더블 재킷에 흰색 크라바트를 목에 두른 헤이먼이 긴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몸도 안 좋은 애가 파티에 어떻게 가.”
“내가 몸이 안 좋아 보여?”
아직 근육이 많이 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운동을 해서 그런지 걷다가 쓰러질 정도로 보이진 않았다.
헤이먼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지 그는 잠깐 말이 없다가 시큰둥하게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어제 노예 사건 때문에 꽁한 것 같았다.
“여태까지 한 번도 파티에 가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갔다가 무슨 일을 치려고. 그리고 네가 밖에 나가는 거 아버지는 아셔?”
“말하고 나가야 돼? 왜? 화내셔?”
설마 이 공작님도 집에 자식이 없으면 물건을 부수나?
그럼 더더욱 조용히 나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돌아와야 하는 거 아냐? 그게 맞는 거잖아.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레이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졌다.
“아깐 아니라고 했는데 혹시 솔레아 너…….”
“야.”
그레이의 말을 끊은 헤이먼은 조금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당연히 걱정을 하시지.”
“……걱정?”
“딸이 말없이 사라졌다가 들어왔는데 걱정 안 하는 부모가 어디 있어. 당장 가서 직접 말씀드리고 와.”
“바빠서 저녁도 방에서 드셨는데. 내가 방해하면 어떡해?”
기가 죽은 목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내 입장에선 정말로, 바쁜 공작을 배려해서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와 헤이먼의 표정은 더 진지해졌다.
헤이먼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 입을 여는 순간, 그레이가 먼저 말했다.
“솔레아. 이 저택에서 널 방해꾼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아버지께 파티에 가서 놀다 올 거고, 우리랑 같이 갈 테니까 걱정 마시라고,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와.”
“……그렇게만 말하고 오면 돼? 그럼 나갈 수 있어?”
안 그래도 험악한 그레이의 인상이 한층 더 악랄해지기 전에 헤이먼의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멍청한 소리 그만해. 널 가둬 놓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참 이상하지.
평소 같으면 왜 말을 삐딱하게 하냐고 바로 받아쳤을 텐데.
날 가둬 놓는 건 아무것도 없다니.
두 사람을 올려다보던 내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또다. 이상한 기분.
발가락이 간지럽고, 목뒤가 따듯해지고, 가슴 언저리가 울렁거린다.
내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본 건지 그레이는 손바닥으로 내 등을 밀며 방 밖으로 내보냈다.
“갔다 와. 우린 여기서 네가 입고 갈 드레스 고르고 있을 테니까.”
“파티에서 입을 만한 드레스가 있나 모르겠군.”
나는 문이 닫히기 전, 돌아서서 헤이먼에게 말했다.
“헤이먼, 돈을 데려와 줘서 고마워. 네가 생각하는 그 이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돈이 있어서 운동 편하게 했어.”
내 눈을 피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헤이먼이 대답했다.
“……얼른 다녀와. 시간 없으니까.”
“알았다, 이 자식아.”
“뭐?”
헤이먼의 목소리가 커지는 걸 모른 척하고 일부러 휙 뒤돌아서 도망치듯 빠르게 걸었다.
뒤에서 그레이가 큰 소리로 웃으며 ‘거봐, 내가 뭐랬어. 쟤 완전 웃긴다니까.’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즐겁다.
가슴의 울렁거림이 발바닥까지 내려간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공작의 방 앞에 다다라서야 겨우 마음이 진정됐다.
아까 그레이가 한 말 그대로 하면 되는 거겠지.
숨을 고르고 있는 와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모건, 거기 있나.”
“악!”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온 디에르고 공작 때문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발이 꼬여 뒤로 넘어질 뻔했다.
맨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기 전, 내 손목을 붙잡은 디에르고 공작이 나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솔레아! 다친 덴 없니. 노크를 하지!”
다소 격앙된 목소리긴 했지만 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공작님은 마치 무도회라도 온 것처럼 붙잡고 있는 손목을 중심으로 내 몸을 좌우로 돌리며 다친 곳은 없는지 열심히 살폈다.
내가 실실 웃고 있는 것도 발견 못 할 정도로 그는 놀란 것 같았다.
“넘어졌으면 어쩌려고, 세상에. 당장 복도에도 푹신한 융단을 깔라고 해야겠구나. 발은? 발은 접질리지 않았니?”
가만히 내버려 두면 손수 발목까지 잡고 이리저리 돌려 볼 것 같아서 나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내가 한 걸음 물러서자 공작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서렸다.
“아……. 미안하구나. 깜짝 놀라서 불쑥 다가가 버렸구나…….”
공작은 내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일부러 공작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지 않은 채 양발을 번갈아 콩콩 뛰었다.
“보세요. 저 발목 괜찮아요.”
공작의 얼굴에 물안개가 퍼지듯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젠 정말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공작은 웃으며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허공으로 올려 빙그르르 돌리며 나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게 만들었다.
“그렇구나. 건강하네, 우리 딸.”
“그래서 오늘 파티에 가려고요.”
“응?”
웃고 있던 공작의 얼굴이 약간 굳은 것 같았지만, 음. 기분 탓이겠지.
“그레이랑 헤이먼이랑 같이 다녀오려고요. 늦지 않게 돌아올 거예요.”
“파티……. 네가 파티를 갈 수 있는…… 나이던가.”
“저 열여덟 살이라던데요. 앤이.”
“아, 그래. 그렇지…….”
잠깐 고민하던 공작이 비장하게 말했다.
“그곳에 가면 청년들이 네게 춤을 추자고 하거나,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
아. 파티에서의 애티튜드를 가르치려나 보다.
나는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공작의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느끼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중세 시대 예의범절은 잘 모르니까 잘 들어 놔야지.
“그땐 일단 그레이를 앞세워라.”
“네?”
청년들이랑…… 그레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