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92)

23화

이후로도 몇 개의 운동을 더 하고 녹초가 된 솔레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겨우 일어났다.

“내일 근육통 안 오면 찢어 버려야지.”

“……예?”

“말이 그렇단 거지. 내가 누굴 찢겠어.”

솔레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돈의 입장에선 귀족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을 찢고자 하면 정말로 찢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제 운동을 끝내려는 듯 수건으로 땀을 닦은 솔레아가 방향을 틀고 거실 밖으로 향했다.

‘근육통 안 오면 사람을 찢어 버려야지.’

‘근육통 안 오면 사람 짼다.’

‘근육통이 없으면 널 찢어 죽이겠다.’

주인의 말은 돈의 머릿속에서 잔인하게 변질되어 갔다.

돈은 울며 겨자 먹기로 큰 용기를 냈다.

“주인님!”

“응?”

“……부족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온몸이 후들후들 떨릴 때까지는 하셔야…….”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귀족에게 감히 이런 말을 꺼내다니.

돈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쿵쿵 울렸다.

하지만 주인에게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하긴. 맞는 말이야. 겨우 이 정도로 근육통이 오진 않겠지. 그레이가 근육이 찢어진 자리에 영양소를 채워 넣어야 근육이 커진댔어.”

알 수 없는 운동 상식을 중얼거린 솔레아가 다시 바닥에 누워 두 다리를 90도로 높이 올렸다.

“이건 힘드니까 열 개씩 세 번 할게.”

“……열다섯 개씩 세 번 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주인님은 가능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솔레아의 얼굴이 잠깐 구겨졌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 이런 트레이너 선생님도 있어야지.”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인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돈은 솔레아가 운동을 끝내려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붙잡고 몇 번 더 하기를 권유했다.

솔레아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돈은 입을 다물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 땀을 닦고 있는 솔레아에게 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주인님.”

“으, 죽겠네. 돈. 그 호칭 말이야.”

“아! 네! 예.”

“그냥 남들처럼 공녀님이나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될까? 주인님은 뭔가…… 뭔가 듣기에 좀 그래.”

돈은 잠깐 멍한 얼굴로 솔레아를 바라봤다.

역시 이 주인은 좋은 사람이다.

비록 운동 효과가 보이지 않으면 찢어 죽이겠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체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돈은 감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아가씨!”

“그래. 무슨 말 하려고 했어?”

“혹시 저를 왜 사신 건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운동하실 때 옆에서 숫자를 세 드리는 용도인가요?”

“흐음……. 뭔가 오해가 있어서 헤이먼이 널 샀는데……. 아무튼 신경 쓸 필요 없어. 넌 잘하고 있으니까. 오늘처럼만 해.”

솔레아는 격려 차원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제 방으로 향했다.

혼자 거실에 남은 돈은 두 손을 꾹 말아 쥐고 수줍게 미소 지었다.

* * *

하, 위험했다.

자칫하면 노예 제도에 찬성할 뻔했네.

옆에서 응원하고, 몇 개 더 하라고 권유하고, 개수도 세 주고, 또 그 외에는 조용하고.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안 돼. 21세기의 지성인이 돼 가지고 이러면 안 되지.

앤이 따듯하게 데워 놓은 물이 가득 찬 욕조 속에 몸을 담그자 피로가 물씬 느껴졌다.

어째, 몸이 좀 단단해진 것 같은 느낌인데.

조바심이 생겨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얼른 몸을 헹구고 나와서 옷을 후다닥 갈아입고 서랍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너 이 새끼, 오늘은 딱 작살을 낸다.”

만년필을 꺼내 오른손에 쥐었다.

이제 안다.

단순히 손목과 팔 근육만으로는 이 염병할 일기장을 조질 수 없다는 걸.

나는 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복근과 아랫배 안쪽 어딘가 코어라고 불리는 부분까지 힘을 줬다.

광배근에 힘을 주고, 견갑골부터 어깨, 팔까지 온 힘을 써서 만년필을 내리눌렀다.

“……으으.”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거 같은데.

헐, 진짜 닿을 거 같아!

엄청 가깝잖아!

전에도 몇 번 힘으로 글씨를 쓰려 했지만 이렇게 종이에 가까이 간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진짜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위에서 누가 눌러 주면 더 나으려나.

그러면 또 만년필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종이와 펜촉의 거리가 1cm도 채 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한국에서 이미 젖 먹던 힘을 쓰면서 살아와서 설마 지금 힘을 못 쓰는 건 아니겠지.

저한테 남은 거라곤 악과 깡뿐인데 그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힘이 빠지려는 순간, 로또 종이가 들어 있는 펜던트가 턱에 툭, 부딪쳤다.

알겠어, 우리 예쁜 17억이. 엄마가 힘낼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만년필을 내리눌렀다.

내 정성에 감복했는지 만년필촉이 일기장에 닿았다.

“와!”

감탄을 내지른 순간 만년필이 그대로 종이 위를 쭉 미끄러져 내려왔다.

“됐어! 진짜 됐어!”

가설은 진짜였어.

정말로 근육왕이 되면 이 일기장에 글씨를 쓰고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마법사가 존재하는 이 이상한 판타지 세상에서 왜 하필 근육을 키워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답은 근육에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엔 숫자 ‘1’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미끄러졌는데도 1이라니. 다음엔 여러 번 미끄러져서 17억까지 써야지.”

흥이 절로 나네.

오늘은 이걸로 됐다.

아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맨몸 트레이닝을 했을 때만큼 숨이 찼다.

일기장을 덮은 뒤 다시 서랍에 넣고 나니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오예. 중세 판타지 놈들아. 나는 17억 들고 집에 갈 거지롱.

빚도 갚고, 지방에 집도 사고, 휴대폰도 현금빵으로 사야지. 나도 남들처럼 살아야지.

아, 그리고 운전면허도 따 봐야지.

차 사면 세금 내야 되니까 차는 사지 말고, 렌트해서 어디 놀러 가면 좋겠다.

누구랑 같이 가지?

헤이먼은 너무 까탈스러우니까 그레이랑 가야지. 재밌겠다.

근데 걔 은근히 잔소리 심해서 속도 낮춰라, 커브는 천천히 돌아라, 하면서 분명히 옆에서 한참 떠들겠지?

그렇게 혼자 킥킥거리다 문득 깨달았다.

돌아가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아……. 깜빡했네.”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왜 이럴까.

여긴 솔레아의 집이고 걔들은 내 가족이 아닌데.

“미안해, 솔레아. 내가…… 잠깐 헷갈렸어.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봐.”

아무도 없는 허공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오랫동안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돌아가면 또 혼자네.

무슨 소리야. 난 늘 혼자였잖아. 이젠 그게 편하잖아. 그러려고 돌아가는 건데,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렇게 당해 놓고도 또 ‘가족’을 믿고 싶어지다니.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꿈이었잖아. 이제 진짜 그럴 수 있는데.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차갑게 식은 손으로 목걸이를 꾹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짜인 거 티 내지 말고 적당히 지내다 돌아가면 돼. ……괜찮아, 난 그거면 돼.”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서자 넓은 식탁에 그레이 혼자뿐이었다.

“공작님은 또 안 드셔? 헤이먼은?”

“아버지는 업무가 쌓여서 방에서 간단하게 드신다고 했고, 헤이먼은 이따 파티에 가야 해서 준비한다더라.”

“파티?”

그레이가 말을 얼버무렸다.

“음……. 뭐, 그런 게 있어.”

귀족들이 가는 파티인데 남한테 숨길 이유가 뭐가 있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빛이 음흉해졌다.

요놈들∼ 으른의 파티를 즐기나 보네.

하긴, 중세 시대 귀족들이면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어릴 때 만화방에서 베르사유의 어쩌구랑 만화책 많이 읽었어.

19금 달린 중세 시대 만화책도 주인아줌마 몰래 구석에서 열심히 읽었다고.

흐뭇하게 미소 짓는 내 얼굴을 본 그레이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너 또 무슨 생각 중이길래 얼굴이 그래?”

“넌 왜 맨날 내 얼굴 갖고 난리야. 그러는 네 얼굴은 고와?”

“내 얼굴이 뭐, 어때서.”

“너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너 쳐다도 안 보지?”

“그건 내가 귀족이고, 평판도 별로 좋지 않고…….”

“아니야, 그레이. 너 못생겨서 그런 거야.”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하녀들의 눈이 잠깐 커지는 게 보였다.

안다, 나도.

그레이 잘생긴 거.

아주 뒤집어지게 잘생긴 거 안다.

그런데 어떡해.

얘랑 붙어 있으면 이상하게 약 올리고 싶다고.

그리고 진짜 잘생긴 사람들은 이런 걸로 타격 안 받아.

하지만 그레이는 이제껏 한 번도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못생겼다는 말을 들은 그레이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 그 정도야?”

“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입양아라서 남들이 피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잠깐만. 그게 아니라. 내 말 들려? 그레이?”

그레이는 스푼을 뒤집어 제 얼굴을 확인했다.

지금 본다고 뭐가 달라지냐.

잘생겼겠지, 인마.

하지만 그레이의 표정은 심각했다.

손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코와 입술도 쿡쿡 찔러 보던 그레이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실비아. 솔직하게 말해 봐. 내 얼굴이 피하고 싶을 정도야?”

그레이의 잔에 물을 채워 주던 하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실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빠르게 도리도리 저은 뒤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레이는 허망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야, 나 진짜 못생겼나 봐.”

아니요, 선생님.

제가 보기에 실비아는 심장이 멈출까 봐 도망간 것 같아요.

그렇게 간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묻는데, 대체 누가 멀쩡하겠냐고요.

날카로워 보이는 이목구비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레이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졌다.

“오늘 파티 나도 가려고 했는데……. 안 가야겠다.”

“그레이. 미안해. 농담한 거야. 너 잘생겼어.”

뒤늦게 그레이를 달래 보려 했지만 그레이는 애처롭게 웃으며 오히려 나를 달랬다.

“괜찮아, 나 파티 안 가도 돼. 어차피 헤이먼 혼자 보내기 좀 그래서 가려고 했던 거였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진짜 잘생겼다니까. 정말이야. 진짜로. 내 근육을 걸고.”

“……너 근육 얼마 없잖아.”

“야! 너 이게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근육인 줄 알아?!”

울컥해서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가 다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일단 지금은 그레이부터 달래야 했다.

“오빠.”

“응?”

“나 기억을 잃고 눈 떴을 때 오빠 얼굴 보고 너무 잘생겨서 속으로 소리 질렀잖아.”

“야, 무슨 그런 말을 해.”

입은 아니라지만 몸은 솔직하구나.

그레이의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정말이야. 너무 잘생겼어. 아부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진짜 잘생겼어. 크고 긴 눈인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서 대박 섹시해. 입술도 붉고 도톰해서 완전 사람 홀려. 남매끼리 이런 말 하는 거 버거운데 나 진짜 마음 크게 먹고 말하는 거야.”

“남매?”

지금 잘생겼다고 팔만대장경 수준으로 칭찬하고 있는데 왜 거기서 제동이 걸려.

하지만 그레이는 남매 소리가 더 듣기 좋은 것 같았다.

뻣뻣하던 표정이 한껏 풀어졌다.

무표정으로 있으면 사람 손목 발목 다 자를 것같이 생겼는데 웃으니까 세상 햇살이 다 네 얼굴에 있네.

“넌 진짜 아이돌 해야 돼.”

“그게 뭔데?”

“그, 모두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 줘.”

그레이의 입꼬리가 삐죽거리며 점점 더 위로 어색하게 올라갔다.

“넌 나 좋다는 말을 뭐, 그렇게 하냐……. 알았어. 오늘 파티에 너도 데려가 줄게.”

아니, 난 파티가 아니라……. 아유, 그래 기분 풀렸다면 됐다.

저거 아주 인간 겉바속촉이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