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모건은 입이 무거운 경비병과 기사 둘을 불러왔다.
“이 세 명은 지하실 감옥에 가두고, 엘드먼과 실리, 폴은…… 별관 뒷문으로 데려가지. 조용히 처리해야 하니.”
“예, 알겠습니다.”
저택에서 나와 후원 쪽으로 빠르게 향하던 그레이 도련님을 봤던지라 경비병과 기사들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시킨 일이라면 군말 없이 이행하는 것이 옳았다.
별관으로 조용히 이동하기 위해 그들은 저택 내 복도가 아니라 바깥 회랑을 이용해 걸어갔다.
엘드먼과 실리는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떨고 있었다.
기절한 탓에 뒷덜미가 잡힌 채 끌려가던 폴은 몸부림치며 깨어났다.
본능적으로 눈을 뜨려 했지만 찢어진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어……? 어어, 어?”
손으로 제 얼굴을 만지작대던 폴이 이내 괴성을 질러 댔다.
“으아악! 눈, 내 눈! 으, 아악!”
“닥치고 걸어라.”
“아, 아악! 으아악!”
폴은 저를 붙잡고 있는 기사들을 밀치며 사지를 마구 휘둘렀다.
찢어진 눈꺼풀과 입가에서 피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 내가……. 내가 뭘 어쨌다고, 흐으, 악! 아악!”
발악하듯 소리를 지를 때마다 피가 쏟아졌지만 기사들은 아랑곳 않고 그를 짐승처럼 다루며 끌었다.
회랑을 한참 걸어 드디어 별관 뒤쪽의 비좁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빠르게 앞서 걷던 모건이 우뚝 멈춰 서자, 그의 뒤를 따라 걷던 다른 이들도 걸음을 멈췄다.
오직 두 눈을 잃은 폴만 침묵 속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돌바닥에 딱, 딱 부딪치는 납작한 구두 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곧 낮고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렸다.
“시끄럽군.”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마법 연습이라도 한 건지 앞머리가 적당히 땀에 젖은 헤이먼이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폴은 검은 시야 너머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생소한 목소리였다.
그럼 일단 일반 하인은 아닐 테고.
다른 사람들이 겁에 질려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걸 보면 분명 공작일 거다.
……그래, 공작님이라면 이렇게 잔인한 벌을 내리라고 하지는 않으실 거야.
안 그래도 주워 온 놈들이라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는데 제 양아들에게 악랄하다는 소문까지 더해지길 원하진 않으실 테지.
머릿속으로 짧은 고민을 끝낸 폴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호, 혹시 공작님이십니까?! 저, 저는 억울합니다! 그레이 도련님이 공작님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멋대로 처리하는 방식은 상당히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건 그 뭐냐, 월권 아닙니까! 공작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게다가 무자비하고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도 없, 컥!”
피가 줄줄 흐르는 눈꺼풀을 움찔움찔 떨며 말하던 폴이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무언가가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모건.”
“예, 도련님.”
“자네가 설명해.”
“이자들은 그레이 도련님이 직접 추려 내신 뒤 벌을 내리라 명령한 자들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지?”
“처음엔 솔레아 아가씨께 폭력을 휘두른 걸로 의심되어 잡아 오셨으나 대질을 거쳐 보니 엘드먼은 상습적인 가정폭력을 저지르고 있었고, 실리는 상점가에서 폭력을 휘둘러 공작가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폴은…….”
모건은 차마 이어 말하기조차 거북스러운지 잠깐 쉬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레아 아가씨와 자신이 은밀히 사귀는 사이라며 아가씨에 대해 품평하는 등의 저급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헤이먼의 눈살이 단번에 구겨졌다.
“솔레아가 알고 있나?”
“모르십니다. ……말씀드릴까요?”
“아니. 절대.”
차분히 대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폴은 숨이 막히는지 바닥에 쓰러져 버러지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엘드먼과 실리는 그것이 제 미래 같았는지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레이가 무슨 벌을 주라고 했지?”
모건은 차분히 그들에게 내려진 벌을 하나씩 설명했다.
모건의 이야기가 끝나자 고개를 짧게 끄덕인 헤이먼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그레이가 왜 그랬을까.”
기사들이 차마 티는 못 내고 미약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적합한 벌이라 생각했다.
이들 모두를 더 심하면 심하게 처벌했지, 용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는데.
헤이먼은 조용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냥 죽이면 될 것을. 아무래도 솔레아가 엮인 일이라 그레이가 마음이 여려졌나 보네.”
헤이먼은 차분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한 걸음씩 가까워져 오자 제일 먼저 엘드먼이 쿨럭거리며 목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다음엔 실리가 엘드먼처럼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뜨고 주저앉았다.
“천천히 죽여. 폴은……. 공작님께 심판을 받고 싶다고?”
목이 막혀 간신히 코로 킁킁거리며 숨을 쉬던 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자네의 억울함을 풀 마지막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 주지.”
헤이먼이 마법을 풀었는지 숨쉬기가 자유로워진 폴은 몸을 웅크린 채 헛구역질을 하다가 급하게 산소를 들이켜곤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
하지만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폴의 몸이 그대로 옆으로 넘어갔다.
몸이 마비가 된 건지 피가 흐르는 눈꺼풀 속의 안구만 빠르게 움직였다.
“에이본 경. 저자의 혀를 잘라 오게.”
“예.”
기사 에이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폴의 혀를 자른 후 손수건으로 감싸 헤이먼에게 넘겼다.
“억울하다 하니 잘못을 저지른 혀만 데려가는 게 옳지.”
마력을 사용한 탓에 한층 하얗게 질린 낯으로 헤이먼이 차갑게 말했다.
“나머지는 그레이의 말대로 해. 숨통을 조여 놨으니 길어야 3분이다. 그 안에 줄 수 있는 고통은 모두 주도록.”
조금은 지친 얼굴로 말한 헤이먼은 저택의 본관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비명 한 줄기조차 지르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집사장 모건은 조용히 생각했다.
제르노아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을 이끄는 베르고 공작가다.
그 집안의 막내딸을 건드려 놓고 조용히 넘어가길 바랐다니.
웃음도 나오지 않을 농담이었다.
* * *
그레이가 후원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본 건 도끼를 들고 노예를 내려치려는 솔레아의 모습이었다.
“야! 뭐 하는 거야!”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두 손으로 야무지게 도끼를 쥔 솔레아가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레이에게 혼날 것 같았는지 솔레아는 재빠르게 변명을 시작했다.
“그레이. 이상해 보이겠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라 난 그냥 이 사람이.”
“그래. 다 알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난 또 이상하게 오해한 줄 알았네.”
안심이 된다는 듯 솔레아는 손을 들어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았다.
“도끼 들어 본 적도 없는 게. 그러다 베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도끼를 들고도 태연한 솔레아의 모습이 조마조마했는지 그레이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솔레아에게서 도끼를 가져갔다.
“내가 할게.”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너같이 말라빠진 애가 왜 이런 일을 직접 해.”
“안 그래도 앤한테 시키려고 했는데 앤은 심장이 떨려서 못 하겠다고 하더라고.”
“보통 일은 아니지. 너도 저리 빠져 있어. 튈라.”
“파편? 아,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알았어.”
솔레아가 뒤로 물러나는 걸 보며 그레이는 잠깐 아리송해졌다.
피가 튈까 봐 걱정돼 한 말이었는데, 파편이라니.
날이 잘 든 도끼로 손목을 자르면 살점이 튀지 않을 텐데.
……솔레아는 마음이 약하니까 그런 걸 무서워할 수도 있지.
그레이는 바위 위에 수갑 찬 손목을 올려놓고 있는 노예와 솔레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 새끼가 솔레아 널 괴롭힌 그 새끼란 말이지.
그런 놈을 직접 처단하려 하다니. 제 원수에게는 가차 없이 구는 담대함이 있구나.
그레이는 강해진 동생을 대견해하며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
부들부들 떠는 노예가 그저 가소로웠다.
감히, 누구한테.
도끼를 쳐든 그레이가 아래로 내려치기 직전, 솔레아가 말했다.
“그레이. 사슬만 잘 자를 수 있지?”
“그럼! 그, 어? 뭐라고?”
이미 두 팔 근육의 힘을 최대한 이용해 정확히 노예의 두 손목을 향해 내려치는 중이었다.
노예는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솔레아는 소리를 질렀다.
“사슬만!!”
“읍!”
급하게 팔의 방향을 틀었지만 어떻게 될지 그레이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꺄아아악!”
지켜보던 앤의 비명 소리가 후원을 가득 채웠다.
도끼와 바위가 부딪치는 캉―! 하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긴 이명을 남겼다.
두 눈알이 안으로 파고들 정도로 힘주어 눈을 감고 있던 노예 돈은 결국 실금을 지려 버리고 말았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솔레아가 황급히 달려와 그레이의 등짝을 후려쳤다.
“오해하지 말랬더니 이미 했네! 왜 사람 손을 자르려고 해!”
“너, 너는 왜 갑자기 도끼를 들고 설쳐!”
“제, 흐윽, 제 손목이 잘렸나요? 너무 금방 잘려서 아픔이 없는 건가요……? 주인님 제발 알려 주세요.”
돈의 얇은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괜찮아. 잘린 건 사슬뿐이야.”
돈은 그제야 눈을 한쪽씩 번갈아 떴다.
다행히 그레이가 마지막에 방향을 튼 덕분에 정확하게 두 손목과 목을 연결하는 긴 사슬만 잘려 있었다.
바위 위에서 상체를 옆으로 누이고 있었던 돈은 뒤늦게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하지만 남매는 듣지 않았다.
“솔레아, 진짜 미쳤냐! 열쇠 놔두고 왜 도끼로 난리야!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상식적으로, 도끼로! 그것도 사람 손목을 자르는 미친 새끼가 어디 있겠냐?!”
조금 전 정원사 손목을 자르라고 명령하고 온 그레이는 입을 잠깐 다물었다.
열쇠가 부서진 탓에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까지 다 듣고 나서야 그레이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깜짝이야. 난 네가 직접 손목을 자르려는 줄 알았다고. 아니면 됐어.”
그리 말한 그레이는 도끼로 돈의 두 손목을 잇고 있는 짧은 사슬까지 정확히 잘라 주었다.
“아직 남은 수갑이나 쇠목줄은 마법사나 열쇠공을 불러 풀어 줄 테니 무겁겠지만 이대로 잠깐만 지내.”
괜히 돈의 손목을 자를 뻔한 게 미안했는지 그레이는 돈에게 퍽 친절하게 굴었다.
“이제 그만 일어서.”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필 일어서면서 몸에 걸쳐 놓은 가운이 또 떨어졌다.
“괜히 겁줘서 미안, ……미, 미친놈이! 왜 바지를 안 입고 있어!”
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팔려 온 노예에게 옷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걸 빠르게 알아차린 그레이는 도끼로 삿대질을 하며 솔레아를 향해 소리 질렀다.
“야! 너는! 사람을 들였으면! 바지부터 입혀야 할 거 아냐!”
“난 사슬부터 끊어 주려고 했지!”
“멍청아! 바지부터 입힌 다음에 하면 될 거 아냐!”
“눈앞에 사슬이 있으니까 난 그냥! 아, 왜 소리를 질러!”
두 사람이 싸우는 와중에 앤이 친절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럼 앞으로도 바지를 안 입히시면 어떨까요?”
그레이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틀었다.
“그…… 걸 왜?”
솔레아가 얼른 손을 들어 그레이의 시선을 막았다.
“쟤 요새 집에 우환이 있어서 가끔 헛소리해. 얼른 들어가자.”
그레이는 솔레아가 이끄는 대로 일단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솔레아는 고개를 돌려 앤에게 입 모양으로 명령했다.
‘책 그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