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92)

20화

대체 우리 공작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모건의 머릿속이 휘황찬란하게 엉망으로 뒤섞였다.

1번. 잘생긴 노예를 사서 꼬박 하루 동안 밖에 세워 둔 후 갑자기 손을 자르겠다는 아가씨.

2번. 노예라면 질색을 하시면서도 직접 잘생긴 노예를 골라 사 오신 둘째 도련님.

3번. 남자들을 데려다가 전라로 만들어 놓고 감상 중이신 셋째 도련님.

Q. 이 중 누가 정상일까요.

A. ……모르겠습니다.

모건은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고 빳빳이 든 채 허리만 엉거주춤 숙였다.

마치 줄이 엉켜 버린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주, 중요한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헛소리야!”

얼떨결에 문을 닫고 나가려던 모건이 그레이의 윽박에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아이고, 도련님! 이제 이 늙은이 나이도 있는데 그리 소리를 지르시면 어쩝니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 모건.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하지 말고 들어와.”

이상한 오해를 할 만한 상황이었다는 건 자각하고 계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모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헐벗은 남자들과 도련님이라니.

더군다나 몇 명은 낯이 익은 사람들이었다.

정원사 엘드먼.

주방 말단 하인 실리.

종종 잔심부름을 시켰던 심부름꾼 폴.

게다가 폴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앳된 청년이었다.

나머지는 모르는 인물들이었지만.

“도련님, 이들은 왜 여기에 이러고 있는 겁니까?”

“내 생각엔 이놈들 중 하나가 솔레아한테 험한 짓을 한 것 같아.”

“험한 짓이라면……?”

“때렸거나, 소리를 질렀거나, 물건을 집어 던졌거나…… 혹은 그걸 다 했거나.”

“세상에!”

모건의 인자한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았다.

감히 누가 우리 솔레아 아가씨를!

무릎을 꿇고 있는 자들 중 한 명이 억울함을 가득 담아 외쳤다.

“억울합니다! 공자님!”

정원사인 엘드먼이었다.

“하? 아직 네게 말해도 된다 한 적 없는데.”

엘드먼은 잠깐 움찔했지만 정말로 답답했는지 조금은 사그라든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저는 공작저에 출근했다가 일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갑니다. 산책 중이신 솔레아 아가씨와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제가 뭣 때문에 아가씨께 그런 흉악한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네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밤만 되면 아이들의 살려 달라, 용서해 달라는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하던데. 네 집에서 하던 짓을 이 공작저에서는 안 했다는 걸 어찌 믿지?”

엘드먼은 공작저에서 10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하루도 빠진 적이 없는 굉장히 성실한 정원사였다.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심약한 쪽에 가까웠다.

다른 사람들이 이것저것 부탁할 때면 거절하지 못하고 다 들어주곤 했으니.

난처한 얼굴을 할 때도 있었지만 마지막엔 그저 웃기만 했다.

모건이 보다 보다 답답해서 ‘자네는 왜 그리 거절을 못 하나.’라고 물었을 때조차 ‘급하니 제게 부탁을 했겠지요.’ 하며 웃어넘기던 자였다.

그런 엘드먼이 자기 집에서는 폭력적이라고?

모건은 믿을 수가 없어 그레이와 엘드먼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그레이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엘드먼이 눈을 홉뜨고 물었다.

“이웃 중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레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뜨거운 분노로 가득 찬 눈동자와는 다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그레이는 허리춤에 찬 검집을 손뼈에서 아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움켜쥐었다.

모건은 저도 모르게 엘드먼을 두둔할 뻔했다.

최근 솔레아와 사이가 좋아진 그레이가 생글생글 웃고 다녀 잠깐 까먹고 있었다.

그는 기사 작위를 받은 후 베르고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다른 기사들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레이는 금방이라도 엘드먼의 혀를 자를 것 같았다.

“공작령 내에서 가정 폭력을 저지른 자는 손목을 자른다는 걸 알 텐데?”

그제야 뒤늦게 엘드먼이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을 시작했다.

“그, 그저 아이들을 교육하던 것뿐이었습니다.”

모건은 봤다.

그레이의 관자놀이에 솟아오른 핏줄을.

“교육? 웃기지도 않는군. ……그래서, 솔레아도 때렸다는 거야?”

“아닙니다! 그건 진짜 아닙니다! 일과 가정을 완벽히 분리하는 것이 제 신조고, 솔레아 아가씨는 제가 모시는 분인데 제가 어떻게 그런 분을.”

“그럼 집에서 폭력을 휘두른 건 맞다는 거네. 다음.”

그레이의 눈이 엘드먼 옆에 앉은 실리에게 향했다.

“네가 주방에서 몰래 남은 술을 훔쳐 마신단 건 알고 있다. 그거야 뭐. 눈감아 줄 수 있지. 술에 취하면 개가 된다는 것도 유명하고.”

그건 모건도 아는 사실이었다.

“4년 전, 술에 취한 네가 하녀장 마르실라에게 명령하지 말라고 소리 질렀던 건 기억하나?”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저택에서 일하는 엘드먼도 몰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져 실리를 바라봤다.

실리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그, 그때는 술에 너무 취해서…….”

“마르실라가 널 용서했지. 딱하고 갈 데 없는 청년이니 한 번은 봐주겠다고. 나만 못 본 척 용서해 주면 자기도 넘어갈 수 있다며.”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레이는 긴 다리를 천천히 꼬았다.

“그런데 최근에 또 사고를 쳤더군. 이번엔 심부름을 갔다가 다른 집 하녀의 뺨을 때렸다던데.”

“아니, 그건! 도련님! 그건 그년이 새치기를 해서! 분명히 제가 먼저 식료품점에 줄을 서 있었고!”

“이상하네. 그 하녀가 키가 작아 안 보였을 뿐이지 먼저 온 건 그 하녀가 맞다고 하던데. 네가 말한 그 식료품점의 사장 말대로라면. 심지어 때린 직후에 사장이 설명도 했다며. 그런데 사과 한마디 없이 욕을 하고 나갔다고 들었어.”

실리의 입이 꾹 닫혔다.

그레이가 목을 꺾자 우드득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리 집에 이런…….”

낮은 목소리가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리하게 공간을 메웠다.

“개쓰레기 새끼들이 있는 줄 몰랐네.”

그레이가 천천히 손을 들어 눈썹 끝을 느리게 긁었다.

입가엔 자조적인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래, 솔레아한테도 그 더러운 손을 올렸나?”

시체라도 된 양 얼굴이 하얘진 실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 적은 정말,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마르실라에겐 사과하지 않고 그 광경을 목격한 내게만 용서해 달라 빌었을 때 죽였어야 했을까? 마르실라 얼굴을 봐서 살려 두었는데, 내가 괜한 짓을 한 걸까?”

“무, 무슨 그런……. 그, 그레이 도련님. 저는 정말로, 아가씨께는 한 번도……. 진짜 아니, 아닙니다.”

험악해진 분위기를 틈타 폴이 냉큼 끼어들었다.

“도련님! 저는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 저는…… 아가씨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고.”

“접점이 없다는 놈이 솔레아에 대해 떠들고 다녀?”

나불거리던 폴이 아래턱을 덜덜 떨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레이의 말이 사실인지 폴의 검은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레이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제 무릎 위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움직임은 점차 느려졌다.

툭, 툭, 툭.

그것이 정박으로 맞춰질 때쯤, 그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레아 아가씨는 쑥스러움이 많으셔서 우린 꼭 둘이서만 만난다.’”

숙여져 있던 폴의 고개가 다시 번쩍 들렸다.

하지만 그레이는 제 무릎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둘이 있을 땐 레아라고 부른다. 그러면 얼굴이 빨개지는데 붉은 사과보다 탐.스.럽.다.’”

이를 악물고 발음하는 그레이의 모습에 모건은 제 정신까지 아뜩해지는 것 같았다.

그간 저딴 놈에게 심부름을 맡겨 왔다니.

아직 끝이 나지 않았는지 그레이는 픽 웃으며 무릎 위의 손을 들어 턱을 천천히 매만졌다.

“‘막상 만나 보니 귀족 영애도 별다를 건 없더라.’ 맞나?”

폴의 벗은 등에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도, 도련님. 죄송합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예전에 심부름을 왔다가 먼발치에서 아가씨를 뵙고, 그저, 그, 그저…….”

“그저?”

“좋아서, 아니, 그, 궁금해서…….”

“좋아서 그랬다, 호기심에 그랬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 통할 거라 믿는 건가?”

이번에는 모건이 참지 못하고 분을 터뜨렸다.

“그딴 저급한 입으로 아가씨께 폭언을 퍼부은 건가!”

폴은 얼른 두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가씨와는 대화 한 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심부름을 시키시는 건 늘 하인 분들이시잖습니까! 제가 무슨 수로 아가씨와 말을 하겠습니까.”

폴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젠 아니었다.

아니, 저 셋 중 그냥 넘어가도 될 만한 놈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 저 나머지는 뭐 하는 사람들이지? 저택에선 본 적이 없는 이들인데.

모건의 얼굴에 스친 궁금증을 읽어 냈는지 그레이가 덤덤하게 말했다.

“저들은 ‘돈’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서 저급하고 추잡한 놈들만 골라 데려온 것이다.”

돈?

아. 오늘 아가씨가 데려가신 놈도 돈이었지.

모건의 머릿속에 후원에서 벌어질 참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남자들이 헐벗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충격적인 광경과 그들의 비윤리적인 행실에 잠깐 잊고 있었다.

“도련님, 잠깐 귀 좀…….”

모건은 얼른 그레이의 옆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솔레아 아가씨가 어제 그 노예의 손목을 직접 자르시겠다며 도끼를 들고 후원으로 가셨습니다. 제발 말려 주십시오. 심약하신 아가씨가…….”

가만히 듣고 있던 그레이는 모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새끼인가?! 직접 처단하려고?”

그레이는 급하게 방문을 향해 걸어가다 말고 돌아섰다.

그러곤 모건에게 명령했다.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저지른 엘드먼은 영내 법에 따라 처분해. 아이를 때린 두 손을 자르고, 발로도 가구를 차서 부쉈다고 하니 발도 자르고. 아, 폭언도 폭력이니 혀도 잘라라. 아이들은 갈 곳이 없을 테니 공작저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줘. 간단한 것만 시키고. 그리고 실리는 우리 공작가의 명예를 실추시키며 돌아다녔으니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힌 거나 마찬가지다. 묻어. 마지막으로 폴은…….”

빠르게 명령을 내리던 그레이의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폴에게 향했다.

“감히 내 동생을…….”

그레이는 곧장 허리춤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

폴의 두 눈꺼풀 위에서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아아악!”

“쉿. 목소리를 높이면 ‘쑥스러움이 많은’ 내 동생이 듣고 놀라지 않겠니.”

모건은 제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저놈의 혀를 지져라.”

“제가 뭘 그리 잘못했습니까! 그저 말 몇 마디……!”

그레이의 기다란 검의 끝부분이 순식간에 폴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입을 움직였다간 그 즉시 혀가 베일 것 같아 폴은 공포에 떠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검어진 시야 너머에서 가라앉은 안개 같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얼마든지 공격하고, 피 말려 죽일 수 있어.”

그레이는 폴의 입 안에서 검을 빠르게 빼냈다.

그러자 제 얼굴을 감싼 폴이 그대로 기절했다.

“남은 자들은 지하의 감옥에 넣어 두어라. 혹시 모르니 내가 다녀와서 직접 물어보겠다.”

모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검을 대충 손수건으로 닦은 후 검집에 집어넣으며 남은 세 명의 남자들에게 말했다.

“지은 죄가 없다면 금방 돌려보내 줄 테니 걱정 말고.”

무릎을 꿇은 자들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레이는 방문을 열곤 빠르게 후원으로 뛰어갔다.

솔레아는 안 그래 보여도 은근 마음이 약해서 직접 손목을 자르긴 힘들 터였다.

그러니 내가 해 줘야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