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다음 날 왜인지 그레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서 운동을 해야 하는 솔레아는 다소 불퉁한 얼굴로 후원을 걷고, 뛰고, 다시 걸었다.
스트레칭도 하고 후원과 이어진 뒷문으로 유유히 들어와 작은 거실에서 플랭크도 했다.
굽힌 무릎이 발끝보다 나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스쿼트까지 다 마쳤다.
그러고도 오전이 채 지나가지 않아 여전히 해가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오늘은 저택에 아무도 없나 봐? 조용하네.”
점심으로 나온 샐러드와 수프, 감자와 베이컨을 함께 볶은 요리를 먹으며 솔레아는 앤에게 물었다.
“공작님은 어제저녁부터 집무실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으셨고, 헤이먼 도련님도 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며 방에서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그레이 도련님도 어제부터 바쁘셨는데, 지금은 방에 돌아오셨는지 모르겠어요.”
“바쁘네, 다들.”
공작이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는 짐작이 갔다.
이번엔 정말로 화가 났는지도 모르지.
딸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헤이먼도 삐쳤으려나?
애써 신경 써 데려온 노예를 내가 필요 없다고 했으니?
그런데 그레이는 뭐 때문에 바쁘지? 기사 작위는 받았지만 소속된 곳도 없으면서.
식사를 마친 솔레아는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1층 복도 끝의 식당에서 나왔다.
2층 오른편에 위치한 솔레아의 방은 현관 옆 벽면에 붙은 넓은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방으로 가려면 필히 정문을 지나가야 했다.
활짝 열린 저택의 문을 통해 들어온 늦봄의 따사로운 볕이 널찍한 현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곧 여름이 오려는지 햇볕의 온도가 올라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가슴 안까지 따뜻한 기운이 몽글몽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와, 날씨 좋다.”
하얀 타일에 반사된 빛에 눈이 부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무심코 밖을 본 솔레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제 낮에 잠깐 얼굴을 봤던 노예가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뭐야, 저거.”
“혹시 또 기억이 안 나세요?”
“그런 말이 아니라 저 노예가 왜 아직도 저기 저러고 서 있냐고.”
“네? 그거야 아가씨가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으셨으니까……. 대기 중인 거겠죠.”
“내가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아서 꼬박 하루를 밖에 서 있었다고?”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일 시키면 뉴스에 나오는데.
24시간이 넘도록 잠도 안 재우고, 밥도 안 먹이고, 밖에 세워 두기만 하는 고용주가 나라니.
인권 문제에 양심을 심하게 가격당한 솔레아가 정문 밖으로 나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이봐요. 괜찮아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가자 그제야 고개를 든 돈이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다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괜찮냐고……! 이건 또 뭐야!”
험악한 말에 놀란 돈이 움찔 떨자 그에게서 절그럭하는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그자가 다리에 있던 결박은 풀어줬잖아. 근데 왜 이건 그대로인 건데.”
돈의 손은 여전히 구속되어 있었다.
하루 동안 돈은 팔조차 펴지 못하고 이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한 채 솔레아를 기다렸던 것이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놀란 목소리로 존댓말을 하던 주인이 반말로 다그치자 돈은 두 어깨를 옹송그리며 눈치를 살폈다.
“아. 이건…… 주, 주인님이 해 주셔야 해서…….”
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먹먹하게 잠긴 쇳소리를 낸 후에야 돈은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새 주인이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열쇠는 어딨어. 그 상인이 열쇠를 건네주는 건 내가 못 봤는데.”
돈이 오른손을 펼쳤다.
땀에 젖은 손바닥 위에 녹슨 열쇠가 놓여 있었다.
솔레아가 곧바로 열쇠를 가져가려 하자 돈은 다시 주먹을 쥐었다.
“뭐 하는 거야?”
“제가 땀을, 땀을 흘려서…….”
“땀 안 흘리는 사람이 어딨다고! 내놔요, 열쇠!”
거적때기를 둘러쓴 돈의 어깨를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차지게 때린 솔레아는 돈에게서 열쇠를 뺏어 갔다.
“아야.”
보통 사람들이 으레 하는 ‘아야!’도 아니고, 그레이랑 치고받을 때 상대방 들으란 듯이 엄살을 피우며 내는 ‘아악!’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그저 경탄의 감탄사 정도의 ‘아야.’였다.
잔뜩 기분이 상한 솔레아는 돈의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열쇠 구멍을 찾았다.
“하, 돌아 버리겠네. 진짜. 일단 이거부터 풀고 들어갑시다. 세상에. 아니, 말을 하지. 내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진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고. 나 진짜 대가리를 무게 추용으로 달아 놓은 건가. 왜 생각을 못 했지? 내가 아무리 미친년이라도 사람한테 몹쓸 짓은 안 하고 살았는데. 어? 니기럴. 구멍 어딨냐고.”
구멍이 어디 있는지 돈이 알 턱이 없었지만 첩첩이 쌓여 가는 욕을 듣고 있자니 있는 구멍, 없는 구멍 다 찾아서 갖다 바쳐야 할 것 같았다.
“구멍 어디 있어, 이걸 열어야 할 거 아냐.”
노예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몇 발자국 멀리서 지켜보던 앤이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앗! 지금 막 생각난 책이 있는데 아가씨 방에 갖다 놓을까요?”
앤의 떨리는 목소리에 돈이 흠칫 떨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돈의 손목을 잡은 채 열심히 열쇠 구멍을 찾던 솔레아가 잠시 그대로 굳어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앤 너 이제 활자로 된 거는 간판도 읽지 마라. 아무것도 읽지 마.”
넌 대체 서점에 갈 때마다 무슨 책을 읽는 거니……. 침대 밑도 빨리 정리하라고 시켜야겠어.
앤은 조용히 물러났다.
겨우 열쇠 구멍을 찾은 솔레아는 열쇠를 단박에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열쇠에 녹이 슬어 구멍에 제대로 꽂히지가 않았다.
“반대로 넣었나?”
열쇠의 방향을 바꾸어 다시 꽂아 넣었다.
이번엔 끝까지 들어가긴 했지만 열쇠가 도무지 돌아가지 않았다.
“손 좀 들어 봐요.”
“저, 주인님. 제, 제게 존대를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코앞에서 비지땀을 흘리면서 어떻게든 수갑을 풀어 보겠다고 기를 쓰는 솔레아를 보며 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솔레아는 그런 것보다 지금 이 수갑과 목줄을 어떻게 푸느냐가 더 중요했다.
“아, 예. 그래, 반말, 어. 해야지, 어……. 아, 왜 안 돌아가지.”
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에서 냄새가 날 게 분명했다.
걸치고 있는 담요에서도 이상한 냄새가 날 텐데. 이런 악취를 맡으시게 하다니.
차마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때,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부러졌다.
“……아, 망했다.”
구멍 안에서 부러진 탓에 다시 시도해 볼 수조차 없게 됐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낸 솔레아는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부러진 열쇠를 집어 던졌다.
“어차피 팔려 가니까 녹슨 싸구려로 대충 채워서 보냈나 보네.”
“죄송합니다……. 주인님.”
“죄송할 건 없어요. 당신 잘못도 아닌데. 어쩔 수 없지.”
솔레아가 그대로 몸을 돌리자 돈은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주, 주인님! 돌려보내지 말아 주세요! 제, 제가 어떻게든 이, 이걸 풀어서 쓸모가 있도록…….”
돌아가면 또 어디로 팔려 갈지 몰랐다.
밥은커녕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계속 일을 하게 될 텐데.
“건방지게, 모, 목소리를 높여서 죄송합니다. 제, 제가, 저는.”
돈의 간절한 외침에 솔레아가 다시 뒤돌았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일단 들어와요. 집 안에서 방법을 찾아야지. 그리고 옷 좀 여미고.”
담요 하나만 걸친 돈은 그제야 제 몸을 가리려 애썼지만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담요를 제대로 잡을 수조차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오래된 담요가 끈기도 없이 스르륵 내려갔다.
돈은 벌거숭이가 된 걸 깨닫자마자 얼른 다시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솔레아도, 앤도 다 본 뒤였다.
짧은 찰나에 솔레아의 머릿속에 디에르고 공작이 보여 줬던 ‘보고서’가 떠올랐다.
‘돈/20세∼25세 사이/노예. 몸에 생채기는 많으나 훌륭.’
……뭐가 훌륭한가 했다. ……그렇군요. 그랬네요…….
솔레아는 얼른 잔상을 떨쳐 낸 뒤 제가 입고 있던 얇은 가운을 벗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돈의 등 위에 걸쳐 주었다.
부드러운 가운의 감촉에 움찔한 돈은 황급히 가운의 양쪽을 붙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감, 감사합니다.”
햇볕의 열기에 익은 건지, 민망함 때문인 건지 돈의 뒷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괜찮으니까 그, 가운 안 벌어지게 잘 붙잡고 일어서.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예. 주인님.”
솔레아가 뒤돌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앤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돈을 보고 있었다.
앤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앤.”
솔레아가 엄숙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앤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뭘 준비할까요?”
“도끼.”
“도끼만요?”
“일단 손과 목에 연결된 저 사슬부터 끊어야 돈이 팔을 펼 수 있으니까 그것부터 해야, 아니 그럼 넌 뭘 더 가져오려고……. 하. 됐다. 도끼만 들과 와.”
눈치를 살피며 앤이 얼른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돈. 따라와.”
이름이 돈이 뭐야, 돈이.
그리운 내 17억 자꾸 생각나게.
그나저나 근육은 언제 충분하게 커지는 거지. 힘이 좀 세져야 만년필로 일기장에 글을 써 볼 텐데.
빨리 돌아가고 싶다.
“방 안에서 도끼질을 할 순 없으니까 후원으로 가자.”
마침 현관을 지나가던 집사장 모건에게 앤이 도끼를 들고 오면 후원으로 보내 달라는 부탁을 한 후, 솔레아는 빠르게 뒷문으로 향했다.
“도끼요? 도끼로 뭘 하려고 그러십니까?”
“아, 얘 손.”
솔레아는 빠르게 걸으며 손짓과 함께 대충 답했다.
돈은 혹시라도 이 넓은 저택에서 솔레아를 놓칠까 싶어 별다른 반항 없이 빠르게 솔레아의 뒤를 쫓았다.
고생을 한 탓인지 수려한 외모와는 별개로 돈은 우중충한 관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얼굴은 타인으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모건은 멍하니 현관에 서서 중얼거렸다.
“‘아, 얘 손?’ 노예의 손을…… 도끼로 뭘 어쩌시려고요?”
하지만 이미 사라진 솔레아 아가씨가 대답할 리 없었다.
모건은 이걸 어떻게 말려야 하나 싶어 두 손을 벌벌 떨었다.
많은 귀족들이 제멋대로 노예를 사고팔았다. 그러니 노예의 목숨을 끊어 버리거나 신체 따위를 함부로 훼손하는 것쯤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베르고 공작가 안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벌어진 적이 없었다.
돌아가신 공작 부인은 절대 노예를 사지 않는 분이셨으니.
그런데 솔레아 아가씨가 갑자기 왜?
모건은 디에르고 공작의 방을 향해 황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어제 솔레아 아가씨께서 방에 다녀가신 이후로 공작님 기분이 안 좋으셨는데. 이런 문제는 가정불화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모건은 그간의 기지를 발휘해 형제가 설득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둘째 헤이먼의 방으로 방향을 튼 모건은 다시 우뚝 멈춰 섰다.
‘헤이먼 도련님이 사 온 노예의 손을 자른다는 건…… 헤이먼 도련님에 대한 불만의 표시 아닐까. 그럼 큰 싸움이 될 텐데.’
유능한 집사 모건은 결국 반대편에 있는 셋째 그레이의 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하녀 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가씨 어디 가셨지? 도끼 챙겨 왔는데. ……후원에 계신가?”
쟤는 왜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고 난리람.
모건은 그레이의 방에 노크를 하자마자 황급히 문을 열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대답을 제대로 들을 겨를이 없었다.
“도련님! 솔레아 아가씨가! 으악!”
홀딱 벗은 채 무릎 꿇고 있는 남자들 앞에 그레이가 고고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