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저 노예는 지가 여기에 왜 왔는지도 모를 거 아냐.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그레이 역시 잔뜩 뿔이 난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인상이 더 사납게 구겨졌다.
“내 발이 저 발보다 못났다고?”
“아니, 그 발이 아니라니까.”
“저 발도 아니라고? 그럼 네가 찾는 발을 가진 돈은 대체 누구냐. 내가 다시 찾아보지.”
“헤이먼. 좀 끼어들지 마. 더 복잡해지잖아.”
눈살을 찌푸린 헤이먼이 계단을 쿵쿵 내려가 노예의 앞에 섰다.
그러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노예의 턱을 잡아 올려 내게 얼굴을 보였다.
“이런 얼굴에 이런 사연 많은 발인데도 싫다고?!”
“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사람 울겠네!”
겁에 질려 눈을 동그랗게 뜬 돈이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나를 올려다봤다.
그 와중에 그레이가 다시 말을 얹었다.
“노예 정도 사연은 있어야 만족한다는 거야? 야. 언제는 나한테 앵벌이 오빠라며. 앵벌이로는 부족해?”
“미쳤나, 진짜! 누가 네 과거 그렇게 팔아먹으래!”
“앵벌이로는 부족하냐고!”
“그레이! 솔레아가 널 오빠라고 불렀다고? 언제. 네 발이 불만족스럽다고 한 이후에도?”
……집에 가고 싶다.
진짜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집에 가고 싶다.
화를 내던 그레이가 픽 웃으며 팔짱을 꼈다.
“아. 난 솔레아랑 매일 운동을 하니까 오빠 소리야 간간이 듣지. 형은 그때 이후로 못 들었나 봐?”
“나도 들은 적 있다.”
“언제. 못난 발로 솔레아를 실망시키기 전?”
“……내 발은 안 못났어. 그리고 그깟 오빠 소리 못 들어도 상관없다.”
그러게. 그깟 게 뭐라고.
“둘 다 조용히 해. 어휴.”
가만히 있어도 도움이 안 되는데 왜 일을 만들어서 키우고 지랄이야.
난 그냥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인데.
뒤돌아서 정찬실로 걸어가자 그레이가 쫓아왔다.
“야. 운동해야지.”
“밥부터 먹어야 할 거 아냐.”
발걸음 소리가 하나 더 들린다 싶더니 헤이먼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그래. 네 변덕을 이해해 주지. 그럼 저 노예는 어쩔까. 얼굴도 예쁘고, 발도 저만하면.”
자신만만한 말투였지만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이벤트는 전혀 원한 적이 없었다.
“노예 사 달라고 한 적 없어.”
헤이먼은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 * *
그레이와 함께 넓은 식탁에 앉은 솔레아의 머릿속에 힘없이 처진 어깨로 계단을 올라가던 공작이 떠올랐다.
아, 내가 왜 이러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불쌍해서 그런가.
……그래. 이건 동정이야.
딸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으니까 실망했겠지.
솔레아는 하얀 손으로 포크를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찌꺼기 같은 부유물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결국 솔레아는 음식을 들고 다가온 마르실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르실라. 공작님은 방에서 식사를 하신다던가?”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던 마르실라가 어깨를 짧게 으쓱 올렸다 내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방문을 노크했는데 대답을 안 하셔서요. 아가씨께서 공작님께 가 보시겠어요?”
맞은편에 앉아 물을 마시던 그레이가 잔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
“왜?”
“너 아빠 화내면 무서워하잖아. 그러니까 가지 마. 물론 뭐, 아빠가 좀 삐친 걸로 저번처럼 그러시진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솔레아의 반응에 그레이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똑바로 들고 솔레아를 마주 봤다.
허리를 꼿꼿이 편 솔레아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화나신 거 아니잖아.”
그레이가 잠깐 고민하듯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를 왼쪽으로 한 바퀴 굴렸다.
“약간 서운해하시는 것 같아 보이긴 했는데. 그래, 뭐. 너도 오해를 풀고 싶을 테니까.”
“응. 괜찮아. 가 볼게.”
“……같이 가 줄까?”
솔레아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진짜 괜찮다니까. 공작님 소리도 안 질렀고, 욕도 안 했고, 물건을 집어 던지지도 않았고, 때리지도 않았는데 뭐. 그 정돈 괜찮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솔레아는 식당을 빠져나갔다. 생각도 못 한 대답에 무어라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던 그레이의 회색 눈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저게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 저택에 나 몰래 내 동생한테 손 올리는 새끼가 있어?”
솔레아에게 늘 냉정하게 생긴 주제에 비주얼에 안 어울리게 착하다며 놀림을 받던 그레이가 드디어 관상에 맞는 표정을 지었다.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사리문 그레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 어딘가로 향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디에르고의 방으로 향하는 솔레아는 애써 긴장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레이에게 말한 것처럼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어, 괜찮아.
돌아가기 전까진 이 저택에서 살아야 하고, 공작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내게 불리하니까.
공작의 커다란 방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선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공작님. 저예요.”
차마 양심상 저 솔레아예요,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솔레아라는 걸 알아챘는지 이내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소파에 앉아 있는 공작이 보였다.
“공작님. 식사는 하셔야 할 것 같아서 제가…….”
“그건 괜찮으니 이리 와 앉아 보겠니?”
그레이에겐 괜찮다고 했지만 저절로 몸이 움찔 떨렸다.
괜찮아. 화나신 거 아니니까.
솔레아는 스스로를 달래며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켰다가 느리게 내쉬었다.
작고 마른 몸이 디에르고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제가.”
“일단.”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당황한 솔레아의 눈이 빠르게 깜빡이자 디에르고는 얼른 이어 말했다.
“아빠가 먼저 말해도 되겠니?”
“아. 네.”
“음. 아까 내 태도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네게 실망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란다. 그저 조금 놀랐을 뿐이야. 혹시 아빠에게 화나진 않았니?”
솔레아는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왜 내게 화나지 않았냐고 묻는 거지?
태어나고부터 아빠와 헤어지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
오늘 아빠의 기분이 나쁜가?
어느 정도로 나쁜가?
벌레를 잡을 때 뿌리는 에프킬라 통으로 내 머리를 후려칠 만큼인가?
엄마가 쓰던 스킨을 내가 바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울화가 치민다며 뺨을 후려칠 정도일까?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술을 마셨을까, 아니면 드럽게 재수가 없어서 술을 마셨을까.
조용히 있어야 덜 맞을까, 무슨 일이시냐고 물어야 덜 맞을까.
오늘은 나를 정말 죽이려고 패는 걸까.
저 사람도 나를 버릴까.
사는 건 숨이 붙어 있기만 해도 사는 거라는데 나처럼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건가.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없었다. 화났냐는 말조차도.
아. 있었다.
‘네가 감히 화났다고 눈깔을 부라려?’
그런 말투였다.
그래. 그런 삶이었다.
솔레아는 저도 모르게 떠오른 기억에 오른손을 들어 알레르기라도 올라온 듯 가려운 뺨을 긁었다.
마른침을 삼켜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마주 쥐고 있던 두 손을 푼 디에르고는 흐음, 하고 길고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그조차도 잔뜩 긴장한 솔레아를 배려하는 것처럼 나긋하기만 했다.
디에르고는 제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노예인 건 의외지만, 뭐. 가끔 말동무하는 것 정도야 괜찮다 싶으니까……. 솔레아, 혹시 내가 아까 화난 것 같아서 놀란 거니?”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솔레아를 따라 디에르고 역시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살짝 낮췄다.
눈높이를 맞춘 디에르고는 오히려 솔레아의 눈치를 살피듯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렴. 괜찮으니까.”
“……저는.”
준비한 말은 많았다.
‘저 노예는 헤이먼이 멋대로 데려온 거고,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저택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잖아요.’
‘헤이먼이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공작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잖아요.’
하지만 계속해서 목이 메어 와 솔레아는 겨우 말을 뱉어 냈다.
“저는……. 화나지 않았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디에르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런. 레아. 안색이 창백한데. 방에 가서 쉬어야겠구나.”
무심코 솔레아를 부축하려 손을 뻗던 디에르고가 급히 손을 거뒀다.
제가 손을 뻗자 저도 모르게 눈이 커지는 솔레아를 봤기 때문이다.
덫에 빠진 토끼처럼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가만히 눈의 크기만 키워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디에르고는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부축할 사람을 불러오마.”
“아…….”
“앤이라면 괜찮겠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큰 열병을 앓고 난 이후로 솔레아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디에르고는 솔레아에게 제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않도록 신경 쓰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으로 다가간 디에르고가 사람을 부르려 했지만, 그보다 솔레아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 더 빨랐다.
“혼자 갈게요.”
“솔레아, 사람을 부를 테니까.”
“괜찮아요. 혼자서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를 지나쳐 문고리를 잡은 솔레아는 천천히 뒤돌아서 디에르고와 눈을 맞췄다.
솔레아와 같은 색의 진한 보랏빛 눈이었다.
그의 다정한 눈을 보며 솔레아는 입술을 떼어 말했다.
“제게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게 무슨 소리니.”
“다정하게 대하지 않으셔도 된단 뜻이에요. 전 괜찮으니까요.”
“솔레아.”
디에르고의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지만 솔레아는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간 솔레아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겨 제 방으로 향했다.
그러곤 몸을 동그랗게 말아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느샌가 잠들었는지 눈을 뜨자 이불 밖이 묘하게 고요했다.
잡음 하나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해 솔레아는 이불을 걷었다.
창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마른 몸에 볕을 제대로 보지 못해 희멀겋기만 한 피부. 붉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솔레아였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동자 속에는 왜인지 질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거기는 내 자리야.’
알고 있다.
저건 귀신도 뭣도 아니며 죄책감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란 걸.
하지만 가짜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지윤은 결심을 다지듯 말했다.
“진짜 내 자리가 어딘진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아. 이 모든 게 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
떨려 오는 입술을 꾹 다물며 솔레아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환영을 향해 속삭였다.
“걱정 마. 나는 가족 그런 거 안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