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92)

17화

* * *

여기 온 지 한 달이 넘었다.

당첨금 수령 기한은 1년.

그 전에 돌아가야 한다.

아니, 그것보다 이곳의 솔레아를 결혼시키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나는 플랭크를 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 이게 분명…… 전신 운동이라고……. 유튜브에서 지나가다가 봤었는데…….”

몇 초나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5초도 안 돼 팔다리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덜덜 떨려 왔다.

“흐업!”

결국 쓰러졌다.

그레이가 모든 운동은 복근에 힘을 주냐 안 주냐에서부터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해서 배에 잔뜩 힘을 줬는데.

배 속에 불이 붙은 것 같다.

하체 운동을 할 때면 허벅지가 안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복근 운동을 하면 배 속을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솔레아가 어지간한 약골이긴 했는지 한 달 내내 운동을 했는데도 매일 다른 부위에 근육통이 생길 뿐, 건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은 그다지 받지 못했다.

“너무 힘들어.”

조바심이 나서 그레이가 없을 때엔 이렇게 플랭크 같은 거라도 하려고 했지만, 초시계가 없으니 얼마나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친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욕실로 들어가 몸을 다시 씻고 나왔다.

하루에 샤워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근육은 늘지도 않고, 젠장.

다른 운동복으로 갈아입자 앤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앤의 얼굴이 푹 시들어 있었다.

평소의 맑고 활기찬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작고 오밀조밀한 입술을 조심스레 연 앤은 내가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말을 꺼냈다.

“……아가씨.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노예를 왜 사셨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내가 노예를 샀다고?”

이 저택 밖으론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데 무슨 수로 노예를 사.

그럴 돈이 있으면 모아서 보석 산 다음에 한국으로 돌아갈 때 들고 가지.

내가 왜 노예를 사.

머릿속에서 온갖 말이 휘몰아쳤지만 너무 엉뚱한 소리를 들은 탓인지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나 아닌데.”

하지만 솔레아라는 이름으로 노예를 산 게 확실한 건지 앤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제가 사고도 많이 치고, 그릇도 많이 깨서……. 주방에서 잘릴 뻔했을 때, 아니 잘렸을 때. 그때 아가씨가 저를 다시 고용해 주셨잖아요.”

“……그랬구나.”

나야 모르지.

“후문에서 울고 있는 저를 딱하게 여기신 아가씨가, 흑, 저를 다시, 다들 반대했는데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설득도 해 주시고……. 그래서 저 진짜 아가씨께서 부족함을 느끼시지 않도록 잘 모시려고 노력했는데.”

“그래. 너 노력 많이 했어. 충분히.”

누가 제 주인을 위해 서점까지 가서 직접 야설을 사 오겠니.

그것도 읽어 주기까지.

난 이미 거기에서 네 충성심을 봤단다.

눈물방울을 그렁그렁 매단 채 중얼거리던 앤은 이내 자포자기하듯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노예라 아가씨를 제대로 보필하지도 못할 거고. 아가씨의 곁을 지키는 하녀는 저뿐이니까.”

“아. 내가 샀다는 노예가 여자야?”

“아니요. 남자요.”

“음? 남잔데 왜 그렇게 훌쩍거려. 하녀로 곁에 두지도 않을 텐데.”

이해가 안 가네.

“하지만 엄청 예쁘게 생겼단 말이에요!”

이해가 확 가네.

“일단 가 보자. 노예가 왔어?”

“예, 노예상과 함께 제 발로 찾아왔어요.”

“……돈도 내가 내야 된대?”

나 돈 없는데.

가진 거라곤 운동복 몇 벌밖에 없는 사람인데.

“아니요. 이미 값을 지불하셨다고 했어요.”

“나 정말 아닌데. 난 노예를 사지 않아.”

방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내려가니 정말 앤의 말대로 활짝 열린 정문 밖 계단 아래에 남자가 서 있었다.

두 손목과 발목이 결박되어 있어 걷는 게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노예의 옆에서 저택 안쪽을 힐긋거리는 남자는 비교적 깔끔한 옷차림인 걸 보니 아마 저 남자가 앤이 말한 노예상 놈인 듯했다.

햇볕에 그을린 진한 갈색 얼굴과 술에 쩐 듯 누리끼리한 눈동자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 썅.

후. 진정하자. 여긴 그 집이 아니야. 나는 솔레아다.

저 사람은 나한테 손도 대지 못할 거야.

“……왜 밖에 세워 뒀어. 들어오라고 해.”

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노예를 저택 안으로 들이시게요?”

“……그럼 내가 여기서 저 사람들이랑 소리치면서 대화할 순 없잖아.”

앤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노예상이나 노예와 직접 대화를 나누지 않으셔도 돼요. 아가씨! 시키실 일만 제게 말씀해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는 바깥에 서 있는 노예를 힐긋 바라봤다.

지난번 저택에 찾아왔던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세 친구들 중 하나가 노예 무역을 크게 하고 있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노예 제도가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둘째 치고 노예를 취급하는 수준이 알 만했다.

멀찍이 서서 차마 안을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있는 저 노예의 행색은 그야말로 거지꼴이었다.

노예의 곁에 서 있던 비교적 깔끔한 옷차림의 사내가 계단 위로 한 걸음 올라섰다.

“노예 계약서에 서명을 해 주셔야 제가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값은 치르셨지만, 이놈을 받으신 날짜에 서명을 해 주셔야 하거든요. 베르고 공녀님.”

“누가 감히 내 딸을 함부로 부르지.”

뒤쪽에서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택 벽면에 붙어 있는 넓은 계단의 정가운데로 은발의 디에르고 폰 베르고 공작이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형형한 눈빛으로 노예상을 노려보고 있는 헤이먼과 그레이도 함께였다.

공작님 출근 안 했나 보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내 무덤덤한 인사에 디에르고 공작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잘 잤니, 솔레아. 오늘은 너와 같이 아침을 먹으려고 기다렸단다.”

“……아.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일찍 일어났을 텐데요. 전 나가신 줄 알고.”

“됐다, 나 혼자 그리 정했으니 내가 기다리는 게 맞지.”

그럼 혼자 정하신 약속인데 뒤에 두 명은 왜 같이 기다리고 있는 건데요.

헤이먼은 늘 그랬듯 무심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고, 그레이는 입 모양으로 이죽거렸다.

‘배고파 죽겠다.’

나는 디에르고 공작을 향해 웃으며 그 몰래 그레이 쪽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펼쳤다.

‘엿 드세용.’

며칠 전 처음으로 빠큐를 본 그레이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뉘앙스로 욕이란 걸 알아챈, 쌍욕계의 영재였다.

내 장난에 픽 웃은 그레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곱을 떼는 척하며 내게 엿을 날렸다.

저놈이.

입양한 아들과 가짜 딸이 소리 없이 맹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디에르고는 생글거렸다.

“운동복을 입은 걸 보니 식사를 끝낸 뒤 또 운동을 할 모양이구나.”

“예, 그래야죠.”

“식후에 바로 움직이면 힘드니까 차라도 한잔 마시고 하렴.”

디에르고는 상냥하게 싱긋 웃어 보인 뒤 노예상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건 그렇고……. 내 딸이 노예를 샀을 리가 없는데.”

“……안,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저는 볼튼이라고 합니다.”

볼튼이라는 자의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그레이가 위협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공작님께선 네 이름을 물어보신 적 없다.”

망한 초코칩쿠키에 대바늘로 눈알 구멍을 콕콕 찍어 놓은 것같이 생긴 노예상 볼튼이 당황한 듯 작은 눈을 나름대로 크게 뜨고 말했다.

“아니, 분명히! 이 집안의 종자가! 솔레아 아가씨께서 노예를 사셨다고 했습니다! 그날 바로 대금도 치렀습니다!”

볼튼의 괴상한 초코칩쿠키 얼굴이 한여름 아스팔트 위에 있는 것처럼 구겨졌다.

“혹시 노예의 이름이 뭔가.”

헤이먼이 끼어들자 노예상이 냉큼 대답했다.

“돈입니다!”

뭐야?

“그렇군. 아버지. 제가 샀습니다.”

넌 또 뭐야?

“……헤이먼. 왜 저 노예를 솔레아의 이름으로 샀지?”

“솔레아가 찾는 인물이니까요.”

디에르고와 헤이먼, 그레이가 동시에 뒤로 돌아 나를 바라봤다.

“뭘 생각하든 그거 아니에요!”

내 필사적인 목소리가 닿지 않았는지 디에르고 공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정문 밖으로 몇 걸음 걸어가 노예 돈에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얼굴로 내가 찾는 돈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간을 해요.

제가 찾는 돈은 17억 돈이지, 노예 돈이 아니란 말이에요.

진실을 말할 수가 없어서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넝마를 몸에 걸치고 있는 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흠.”

근심 어린 한숨이 디에르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공작님! 착오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찾는 돈은 그런 게 아니고, 그, 그냥 돈! 용돈 같은…….”

내가 설명하려 했지만 공작 곁으로 다가간 헤이먼이 내 말을 끊고 그의 귀 가까이에서 무어라 속닥거렸다.

그러자 공작이 다시 노예상에게 말했다.

“저 족갑을 풀어 봐. 발을 봐야겠다.”

발.

……시발.

망한 초코칩쿠키 노예상 볼튼이 결박되어 있던 노예의 발목을 풀어 주었다.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나도 앞으로 다가갔다.

목덜미를 덮은 긴 남색 머리카락은 엉키고 떡 져서 엉망진창이었지만 이목구비는 또렷했다.

겁먹은 두 눈과 앙다문 입술은 원초적인 뭔가를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헤이먼 오라버니.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그동안 디에르고는 판단을 모두 끝냈는지 볼튼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명은 내가 할 테니 소란 피우지 말고 돌아가게.”

“아이고, 서명만 해 주시면 저야 당장 돌아갑죠. 감사합니다!”

볼튼이 내민 노예 계약서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명을 마친 디에르고는 그림처럼 뒤돌아서 내게 다가왔다.

“……공작님. 오해하지 마시고요.”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공작의 두 눈에 침울한 빛이 서렸다.

“그날 내겐 아니라고 했잖니.”

“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디에르고가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갔다.

“공작님! 진짜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저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헤이먼이 끼어들었다.

“다른 노예들과 달리 저자는 빠진 발톱도 하나 없고 발의 모양도 틀어지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숨길 필요 없다, 솔레아.”

발, 발, 그놈의 발.

망할 발.

헤이발 새끼야. 끼어들지 마!

계단 중간까지 내려온 공작의 보좌관이 곁에 서서 공작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작은 푹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늘은 자네도 퇴근하게.”

잠시 공작의 축 처진 뒷모습을 바라보던 보좌관은 이내 고개를 짧게 끄덕인 뒤 빠르게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선생님. 이렇게 퇴근하신다고요?”

괜히 마음이 급해져 그를 붙잡았지만 보좌관은 단호했다.

“공작님 곁에서만 16년입니다. 이런 날은 일 못 하십니다. 그럼 이만.”

당신 내가 이 저택에 있는 한 달 내내 일 못 해서 죽은 귀신 붙은 것처럼 굴더니.

사실은 그냥 정시에 퇴근하고 싶어서 공작님께 일을 열심히 시킨 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를 중요시하는 인간이었군요.

공작이 방으로 들어갔는지 문이 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레이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너 사람 볼 때 얼굴 보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솔레아는 발을 본다.”

“넌 조용히 해라.”

불쌍한 노예는 영문도 모른 채 거적때기만 걸치고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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