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피구를 몇 판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신이 난 솔레아는 나중엔 두 팔을 걷어붙인 채 공을 들고 상대편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아, 아가씨. 세게 던지지 마세요!”
“칼 허벅지보다 작은 공인데 그거 좀 맞았다고 엄살을 부려요?”
“그래도 맞으면 아프다고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명색이 공녀이니 꽤 봐줄 줄 알았는데 기사들은 정말 봐주지 않았다.
체구가 작아 경기 초반엔 덩치 큰 기사들 틈에 섞여 공을 피했지만 라인 안의 인원이 줄면 솔레아는 금방 탈락했다.
“아! 머리는 반칙! 이건 무효야.”
“와, 머리도 무효라고요? 그럼 어떻게 죽여요?”
“죽여? 와. 오빠. 들었어? 저 기사님 저거 말하는 거 보게.”
“……넌 이럴 때만 오빠라고 하더라.”
머리에 공을 맞아 높게 올려 묶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졌다.
이번에는 무효로 인정해 주지 않아 솔레아는 구시렁대며 수비 라인으로 옮겨 갔다.
머리를 다시 묶은 솔레아는 상체를 조금 숙이고 손뼉을 짝짝 쳤다.
“패스해! 삼각형 전법으로 갑시다!”
“아가씨. 누가 보면 운동 되게 좋아하시는 줄 알겠어요.”
학교 다닐 땐 좋아했지.
고등학교 3년을 끝까지 다 다녔으면 더 좋아했을걸.
식당 뒷방에서 숙식할 때 제일 아쉬웠던 건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땐 친구들이 있었는데. 하지만 식당에 친구들이 놀러 온 날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다음 날 곧장 식당도 그만두고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어 버렸었지.
짧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솔레아는 머리를 얼른 도리도리 저었다.
“우리 이거 하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할래요?”
“그게 뭐예요?”
수비 라인 오른쪽에서 날아온 공을 받아 낸 솔레아는 힘껏 공을 던진 후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런 게 있어요! 책에서 봤는데, 이따 가르쳐 줄게요!”
이마 위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때까지 피구를 하고, 모두에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까지 가르쳤다.
무궁화가 뭐냐고 계속해서 묻는 그레이 때문에 데이지꽃이 피었습니다, 라고 게임 이름을 바꿔야 했지만.
“데쥬꼬치 폈스돠!”
“아!”
“공녀님! 이건 진짜 반칙 아니에요?”
한쪽 발로 서 있던 데론과 어기가 기우뚱하며 넘어졌다.
“이건 술래 재량이지!”
“다시 해 주세요!”
“안 돼, 안 돼. 그런 거 없어요.”
“아! 됐으니까 그냥 빨리 계속 해! 나 다리에 쥐 난다고!”
그레이가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두 다리가 활짝 벌어진 상태라 오래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허벅지 안쪽 근육에 어마어마하게 힘을 준 채 버티고 있을 게 분명했다.
데론과 어기가 장난기가 돋았는지 일부러 솔레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이건 정식으로 회의에 안건을 올려서 토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까.”
“아, 제발! 솔레아!”
기사들이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다급한 건 그레이뿐이었다.
“솔레아악!”
“오빠. 기다려 봐. 이런 건 규칙이 중요하단 말이야. 그럼 글자 수를 어디까지 허용해 줄 거야?”
“뎆꼬 폇스다, 는 너무한 거 같아요.”
“나 그 정도까진 아니었어!”
“아악!”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레이가 버티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걸 신호로 솔레아는 힘차게 뛰어갔다.
한 명 잡으면 나 술래 아니지롱!
달리기도 느리고 균형을 잡는 것도 못해서 벌써 네 판째 술래라 솔레아는 이번엔 꼭 벗어나고 싶었다.
“잡았……! 어, 뭐야.”
누군가의 몸에 힘껏 부딪친 후 솔레아는 고개를 들었다.
헤이먼이었다.
“헤이먼?”
노느라 열이 바짝 올라 얼굴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 솔레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헤이먼을 올려다봤다.
“어쩐 일이야?”
“……어제는 죽을상을 하고 있더니. 그건 그냥 변덕이었나 보지.”
왜 시비를 걸지?
인상을 찌푸린 솔레아가 두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운동하고 있잖아.”
“이제 발은 필요 없는 건가?”
“응. 이제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헤이먼의 맑은 분홍색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며칠 내내 찾았잖아. 완벽하고 완전한, 예쁜…… 발.”
“이젠 필요 없어. 난 그냥 운동이나 열심히 할 거야.”
무엇 때문에 골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헤이먼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기사들과 그레이를 훑어봤다.
“이게 운동인가. 내가 보기엔 그냥 노는 걸로 보이는데.”
“헤이먼. 말을 왜 그렇게 해.”
그레이가 끼어들었지만 헤이먼은 여전히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남매들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기사들이 슬슬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노는 걸 정리하려는지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옷매무새를 살피며 정원 한쪽으로 정렬을 맞춰 모였다.
한숨을 푹 내쉰 솔레아가 헤이먼에게 말했다.
“……야. 헤이먼. 네가 술래야.”
“뭐라고?”
솔레아는 반문하는 헤이먼의 팔뚝을 잡고 끌고 가 술래의 나무 앞에 세웠다.
“너 나한테 잡혔잖아. 나무 보고 서서 ‘데이지, 꽃이, 피었습니다!’ 이 박자로 말하면 돼. 문장이 끝날 때까지 뒤돌아보면 안 되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게임인데. 그리고 난 이런 게임이나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
“그냥 해. 진짜 싫었으면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지도 않았을 거면서.”
솔레아가 잡고 끄는 대로 졸졸 따라와 놓고 튕기는 모습이라니.
헤이먼은 입을 꾹 다물고 나무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 해?”
“아니. 내가 시작하라고 하면 해.”
“이 주문을 외우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
“누가 네 몸을 칠 거야. 그럼 그때 뒤돌아서 도망가는 사람 아무나 잡으면 돼.”
꽤 거리가 벌어졌는지 솔레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날 친다고?”
“시작!”
헤이먼이 되묻자마자 솔레아가 시작이라고 외치는 바람에 그는 이상한 주문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그랬더라.
데이지꽃?
“……데이지, 꽃이, ……피었습, 악!”
너무 느리게 말했다.
솔레아는 인생 최고의 속도로 뛰어와 헤이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뒤돌아보자 날다람쥐처럼(속도는 느렸지만) 냉큼 도망가는 솔레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기사들 역시 동그래진 눈으로 헤이먼을 보고 있었고, 그레이도 솔레아가 머리를 후려칠 줄은 몰랐는지 턱이 벌어져 있었다.
멍하니 쳐다보는 동안 솔레아는 헉헉거리며 반대편에 도착해 버렸다.
“헉, 흐, 허윽, 너, 못 잡았, 으니까, 헉, 다시 술래. 흐업, 헉. 나 물 좀. 으억.”
얻어맞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헤이먼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아. 그래.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알았다.”
비상한 마력이 정원 위를 덮었다.
다시 게임이 시작됐다.
‘데이지꽃이 피었습니다.’ 한 판을 끝내고 난 뒤 모두 녹초가 되어 버렸다.
헤이먼이 마법을 이용해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술래에게 닿을 수 없도록 정원을 넓게 만든 탓이었다.
한참 뛰다 지친 솔레아는 결국 구석에 놓인 공을 던져 헤이먼의 등을 맞췄고, 헤이먼은 마력으로 솔레아의 몸을 잡아당겨 붙잡았다.
“마법은 반칙! 마법은 반칙!”
“처음부터 말했어야지.”
다시 술래가 된 솔레아는 한국에서 쌓은 노하우로 티끌만큼이라도 움직임이 포착되면 모두 잡아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움직여서 걸린 사람들과 솔레아가 새끼손가락을 거는 걸 헤이먼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왜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보다 못한 그레이가 끼어들었다.
“그냥 게임이야. 헤이먼.”
“기사와 주인이 손가락을 걸고 나란히 서 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라는 건가?”
“……아니, 그래도 이건 게임인데…….”
베르고 공작가의 귀한 공녀님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나무 아래 서 있던 기사 올리브는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 했다.
“아, 좀 그냥 해!”
솔레아의 박력에 밀려 실패했지만.
“아니야. 손가락을 잡는 건 좀 그래. 다른 걸 잡아.”
“내가 이 기사님 목덜미를 잡아야 만족하겠어?”
비꼬려고 한 말이었지만 올리브는 대뜸 목을 내밀었다.
“아가씨. 그냥 제 멱살을 잡아 주세요.”
“……무궁화 역사상 멱살을 잡는 경우는 없었어요.”
“전 정말 괜찮습니다. 제 멱살을 잡아 주십시오.”
그 이후로 술래인 솔레아에게 잡힌 기사들은 서로의 멱살을 잡았다.
몇 판을 더 하고 나자 해가 서서히 저물었다.
마력을 과하게 소진한 헤이먼은 제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잠들었고, 솔레아를 방까지 데려다준 그레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본 탓인지 비척비척 걸어 제 방으로 돌아갔다.
솔레아 역시 처음으로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한 뒤,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기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마법으로 넓어진 정원을 연무장 돌듯 뛴 터라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제각기 다른 자세로 지쳐 쓰러졌다.
그날 저녁, 황궁에서 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디에르고는 조용한 저택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들은 다 어디 갔지?”
하녀장 마르실라가 후훗, 소리 내어 웃었다.
“들으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공작님.”
“음?”
마르실라에게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디에르고는 후원으로 향했다.
하루 온종일 뛰어놀았다더니 후원의 잔디는 온통 뭉개지고 땅은 흙이 파여 엉망이었다.
게다가 가지고 논 공도 치우지 않아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해가 져 사방이 어두운 탓에 램프를 들고 공작을 따라온 집사가 반대편 손으로 얼른 공을 집어 들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제가 치워 놓겠습니다.”
디에르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집사가 들고 있는 공을 건네받아 다시 후원 한 가운데로 굴려 보냈다.
“그대로 둬. 아이들이 내일 또 놀지도 모르니.”
공작은 내내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채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서류가 켜켜이 쌓인 책상에 앉아 한참 일을 하던 공작은 고개를 들어 제 보좌관인 라트엘에게 말했다.
“내일 쉬면 안 되겠지?”
“예, 안 됩니다.”
“……오늘 애들이 새로운 놀이를 했다던데.”
“세 분 다요?”
“셋 다.”
“솔레아 아가씨도요? 아니, 그 까칠하신 헤이먼 도련님이 거기 끼셨다고요? ……그레이 도련님도 훈련 시간에는 절대 딴짓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아는데……. 세 분이 다요?”
디에르고는 확인시켜 주듯 단단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래. 셋 다.”
“와.”
저도 모르게 감탄을 자아낸 라트엘을 힐긋 보며 공작은 다시 한번 넌지시 물었다.
“나도 내일 쉬면 안 될까. 하루 정도야, 뭐.”
“안 되죠.”
“그렇군.”
“그렇습니다.”
“자네, 휴가 필요 없나.”
“예.”
“응?”
“필요 없습니다.”
“……그렇군.”
“그렇습니다.”
디에르고의 위엄 있는 이목구비가 조금 구겨졌다.
“미리 의술사를 불러 둬. 다른 애들은 몰라도 솔레아는 또 근육통을 앓을 테니.”
“예, 퇴근 전에 집사장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서류를 살피던 디에르고는 다분히 빡친 말투로 명령했다.
“지금. 지금 해. 당장!”
“예. 알겠습니다.”
보좌관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며칠 뒤 디에르고는 솔레아가 최근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얘기를 듣곤 1층의 손님용 거실을 텅 비워 버렸다.
메인 거실은 아니었지만 명색이 거실이라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디에르고는 출근하기 전인 이른 아침, 솔레아에게 거실을 보여 주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비가 올 땐 여기서 운동하렴.”
솔레아는 눈을 빛내며 답했다.
“네, 걱정 마세요. 꼭 근육을 많이 키울게요.”
두 주먹을 불끈 쥔 솔레아는 몰랐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칠까 봐 디에르고가 바닥에 깔아 놓은 폭신한 융단의 가격이 일반 귀족의 1년 치 생활비에 육박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