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헤이먼은 발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줬지만 만년필 펜촉은 종이 위에 닿지 않았다.
꽃향기가 폴폴 날리는 흉터 많은 하얀 발 위로 핏줄이 곤두섰다.
“헤이먼! 넌 할 수 있어!”
“……왜 안 되는 거지?”
“다리에 쥐 난 거 아냐?”
다급해진 솔레아가 헤이먼의 다리를 붙잡고 한참을 주무르다가 놓아 줬지만 그래도 결과는 똑같았다.
“솔레아! 이럴 리가 없어! 내가 이럴 리가 없다고!”
“내가 할 소리다, 인마! 이럴 리가 없어! 해 봐! 할 수 있어!”
두 손을 모으고 목소리를 높여 가며 헤이먼을 응원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헤이먼은 결국 옆에 있는 다른 종이 위로 발을 옮겨 글을 써 봤다.
잉크가 없는지 글씨가 나오지 않았다.
“솔레아! 이 펜은 글씨도 안 적히잖아.”
“이 펜으로! 이 종이 위에 썼어야지!”
“안 된다고!”
오래된 만년필이라 내구성이 엉망인지 심지어 쩌적 갈라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아악! 안 돼! 제발!”
절규하는 솔레아를 보며 헤이먼은 발에서 슬그머니 만년필을 빼냈다.
“……그래도 나 다른 종이 위에선 글씨 예쁘게 잘 썼어. 살도 좀 빠졌는데.”
하지만 솔레아에겐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솔레아는 두꺼운 책을 손에 쥔 채 아이고, 집에 어떻게 가, 하는 이상한 곡소리를 내고 있었다.
헤이먼은 저도 모르게 솔레아의 등을 토닥였다.
“……여기가 네 집이야.”
말을 뱉고 보니 익숙한 기시감이 머릿속을 안개처럼 뿌옇게 만들었다.
어디서 들은 말이더라.
헤이먼은 기억을 뒤적였다.
분명히 누군가가 제게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 그래. 공작 부인.
에일린 일던 폰 베르고.
그녀의 다정이 변덕 때문일 거라 믿었던 어린 날이었다.
헤이먼은 이 넓은 저택으로 온 뒤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근 한 달 가까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먹으라고 가져다준 식사도 하지 못했다.
약을 타지 않았을까.
저 수프를 먹으면 또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가족’이라는 구성원 안에서는 마력이 어떻게 발동하나 실험 중인 게 아닐까.
의심 가득한 눈으로 디에르고와 에일린을 번갈아 노려보며 헤이먼은 계속해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다 보니 몸에 살이 붙지 않는 건 당연했고, 팔다리가 점점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말라 갔다.
에일린 부인과 디에르고 공작이 교대로 방에 들어와 헤이먼을 살폈지만 헤이먼은 그때마다 부들부들 떨며 구석으로 숨기 바빴다.
커다란 어른이 방에 들어오면, 아픈 실험이 시작되니까.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
그러니 약한 몸이 탈이 나는 건 당연했다.
결국 허기를 참지 못한 헤이먼은 저택으로 들어오는 식료품 마차에 몰래 숨어들었다. 짐칸에 있는 감자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 낸 뒤 곧바로 입에 쑤셔 넣었다.
‘여기 있는 것들이라면 약을 타진 않았겠지. 이상한 마법도 안 걸려 있을 거야. 지켜보는 사람도 없고, 뭔가를 기록하는 사람도 없어. 괜찮아. 이건 먹어도 되는 거야.’
마차 구석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닥치는 대로 양손으로 음식을 집어 입 안에 욱여넣었다.
그러다 보안 마력이 걸려 있는 귀한 향신료 상자에 손이 살짝 닿고 말았다.
헤이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폭발에 튕겨 나가듯 마차 밖으로 떨어졌다.
입 안에 가득 들어 있던 감자와 각종 음식물들이 지저분하게 밖으로 흘러나왔고, 온몸이 게거품을 물 듯 경련했다.
과도한 실험으로 인해 타인의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으로 바뀐 탓이었다.
“으, 으으, 윽…….”
“이 도둑놈은 뭐야!”
짐마차를 끌고 온 마부가 사지를 떨고 있는 어린 헤이먼의 뒷덜미를 짜증스럽게 잡아채려는 순간, 누군가가 헤이먼의 작은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헤이먼! 이게 무슨 일이니. 세상에! 마르실라! 의술사를, 아니 의사를 불러! 마법사든 뭐든 아무나 불러!”
마력에 놀란 어린아이의 몸은 공작 부인의 품속에서 계속해서 경련했다.
급하게 먹은 것들이 모조리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눈물, 콧물, 그리고 실금까지 지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이 자꾸 뒤집히자 에일린 공작 부인은 그대로 헤이먼을 안아 들었다.
“마님, 저희가 옮기겠습니다.”
주변에 있던 인부들이 공작 부인의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걸 보고 끼어들었지만 에일린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 아이니 내가 안겠다!”
하지만 점점 더 굳어 가는 헤이먼의 몸 때문에 에일린은 얼마 가지 못하고 저택 내의 평지에 헤이먼을 내려놓았다.
“헤이먼!”
헤이먼이 울컥거리며 소화되지 않은 음식과 벌건 마력 응어리를 토하자 에일린은 그의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리렴. 헤이먼. 내 목소리 들리니?”
헤이먼은 그 뒤로도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때 지는 해를 등진 채 저를 보고 있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태양을 닮은 빨간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엉망이었고, 눈가 역시 빨갛게 짓물러 있었다.
헤이먼은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 이제 어디로 가나요.”
이렇게 실험이 망하게 되면, 곧바로 다른 실험에 이용당하곤 했으니까.
‘실험체로 팔려 왔으니 제값을 해야지.’
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으니까.
이제 또 다른 곳으로 옮겨질 차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일린은 토끼같이 붉어진 눈을 억지로 고이 접어 웃으며 헤이먼의 거친 뺨을 쓰다듬었다.
“여기가 네 집이야, 헤이먼.”
집이구나.
그제야 헤이먼은 눈을 감고, 처음으로 아주 긴 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침대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디에르고 공작이 눈을 뜬 헤이먼을 보고 활짝 웃었었다.
“몸은 괜찮니, 헤이먼? 아빠를 이렇게 놀라게 할 줄이야. 다음부턴 숨바꼭질이 하고 싶으면 아빠를 부르렴.”
거친 손으로 머리를 부스스 흐트러뜨리는 디에르고를 보며 헤이먼은 커다란 눈을 말똥말똥 깜빡였다.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
왜 모른 척하시는 거예요.
알고 계시잖아요.
당신들을 믿지 않아서 식료품 마차에 쥐새끼처럼 기어 들어가 음식을 훔쳐 먹었어요.
여태 만났던 어른들에게 배운 언어로 제가 한 행동을 나름대로 설명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쥐새끼.’
‘실험체.’
‘제대로 된 마력도 없는 병신 새끼.’
‘쓸모없는 놈.’
그런 것 말고. 나도 그런 이름 말고.
“헤이먼? 괜찮니?”
헤이먼의 분홍색 눈동자가 굴러떨어질 것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맑은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헤이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헤이먼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 흐, 괜찮아요.”
“그렇구나. 괜찮다니 다행이네. 걱정되지만 아들이 한 말이니까 믿어야겠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디에르고는 보던 책을 덮고 헤이먼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었다.
그래, 그때였지.
오물로 얼룩진 내게 에일린 공작 부인은 ‘여기가 네 집이야.’라고 말했었다.
이상하다.
솔레아는 분명히 에일린이 낳은 그녀의 친딸이다.
이 베르고 가문의 유일한 적자이며 명백한 후계자다.
디에르고 공작이 후계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지만 양자가 아닌 친자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싶은 건 누구라도 당연할 테니까.
모든 걸 가진 솔레아인데.
왜.
왜 자꾸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
몇 주 전 솔레아가 소리를 지르는 디에르고 공작에게 겁을 먹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솔레아가 신경 쓰여 얼마 있지도 않은 마력을 끌어모아 솔레아의 방으로 올려 보내 줬다.
두려움에 떠는 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알고 있으니까.
헤이먼은 과거의 자신을 보는 기분을 느끼며 솔레아의 어깨를 천천히 다독였다.
“……괜찮아, 솔레아. 여긴 네 집이야. 나는 네…… 가족이고. 다 괜찮을 거야.”
만년필을 손에 쥔 채 엎드린 솔레아는 ‘돈’을 부르짖으며 울분을 터뜨렸다.
기세가 점점 잦아들긴 했지만 여간 속상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헤이먼은 솔레아가 찾는 돈을 찾아 주고 싶었다.
‘그자가 네가 원하는 완벽한 발을 가진 이라면, 내가 꼭 찾아 줄게. 찾아서 네 앞에 데려올 테니 그만 울어.’
속으로 낯간지러운 다짐을 하며 헤이먼은 한참 동안 솔레아를 달랬다.
다음 날 솔레아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운동복을 꺼내 입었다.
썅, 이젠 정말 근육뿐이야.
옷을 챙겨 입고 저택 밖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내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세상아…….”
기사들이 없는 후원에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친 후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걸을 때였다.
“너 왜 혼자서 운동하고 있어?”
“……그냥. 좀 일찍 일어났어.”
평소 같으면 그레이와 장난이라도 쳤겠지만 들뜬 기대감이 어제 와장창 깨진 탓에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솔레아는 시큰둥하게 대답한 후 다시 후원을 걸었다.
“몸은 다 풀었어?”
“응. 네가 가르쳐 준 거 다 했어.”
“……오늘 기분 안 좋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솔레아의 옆을 따라 걷던 그레이는 대답을 듣고는 잠깐 멈췄다가 다시 빠르게 따라붙었다.
“말을 왜 그렇게 하냐……. 신경 좀 쓰면 어때서. ……네가 내 동생인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완연한 봄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지만 솔레아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레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머리를 기울였다.
무언가 고민할 때면 나타나는 그만의 습관인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레이는 솔레아를 후원에 혼자 남겨 두고 재빠르게 뛰어갔다.
“너 잠깐만 혼자 있어! 이상한 거 주워 먹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택 쪽으로 향하는 그레이를 보며 솔레아는 시들하게 중얼거렸다.
“쟤는 내가 무슨 다섯 살배기 애인 줄 아나.”
두 손으로 나무 기둥을 짚고, 손목의 각도를 맞추어 한참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뭐야?”
그레이가 여러 명의 기사들과 함께 후원으로 돌아왔다.
“야, 솔레아. 꿀꿀할 땐 사람들이랑 부대끼면 좀 낫던데, 나는.”
“기사들 훈련하는 시간 아니야?”
이 저택에서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지만 기사들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머쓱한 기분이 든 솔레아는 대충 고개를 까딱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곳에선 윗사람이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게 예의였기에 기사들은 그제야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솔레아에게 예를 갖췄다.
“반갑습니다,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공놀이 좋아하십니까?”
연한 갈색 머리의 덩치 큰 기사가 환하게 웃으며 공을 내밀었다.
“공놀이……?”
그들이 설명한 공놀이의 룰은 피구와 비슷했다.
구역을 정해 놓고 가운데에 선을 그은 뒤, 공을 상대편 쪽으로 던지는 것.
공에 맞으면 죽어서 구역 밖으로 나가야 하고, 공을 받아 내면 다시 반대편으로 던질 수 있다.
“피구잖아?”
“피구? 그게 뭐야.”
그레이의 반응을 보니 피구라는 말을 사용하진 않는 듯했지만.
솔레아는 체육 시간에 피구를 할 때 적용했던 룰을 추가했다.
공을 맞고 죽으면 반대편 라인 바깥에 서서 안쪽의 사람들을 공격하기.
“그거 재밌겠다. 죽어도 게임에 참여할 수 있으니까.”
설명을 들은 기사들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사뭇 진지하게 땅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공녀님이라고 안 봐드릴 겁니다.”
“나 공 잘못 맞으면 뼈 나가니까 알아서 잘해 줘요.”
“……아. 뼈가 나가지 않을 정도로만 공을 던지라니.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요.”
농담을 하며 기사들과 피구를 시작했다.
“아니, 이건 땅볼이지!”
“땅에 맞은 뒤 몸에 맞았어도 맞은 건 맞은 거죠!”
“너 어느 동네에서 피구 배웠어! 고향 어디야!”
“아, 공녀님! 자꾸 규칙을 새로 만드시면 어떡해요!”
“아냐, 솔레아 말대로 하는 게 재밌을 거 같아. 그렇게 하자.”
“그레이가 그러라잖아!”
이 뒤떨어진 피구 후진국 놈들. 한국에선 걸음마 떼자마자 피구한다고.
“그레이 님! 왜 아가씨 편만 드십니까!”
“얘가 내 동생이니까 그렇지!”
“그럼 저도 동생 하겠습니다. 그레이 오빠. 땅볼 없앱시다.”
“……너 벽 보고 손 들고 서 있어.”
솔레아와 그레이, 기사들의 웃음소리가 후원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