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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92)

14화

헤이먼의 고민은 하루가 꼬박 다 가도록 해결되지 않았다.

일단 신발은 벗었다.

만년필도 오른손에 쥐고 있다.

다만, 이 만년필을 발에 끼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귀족가에 입양되고 난 뒤 몸 안에 떠도는 불안정한 마력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 이후로도 출신 모를 입양아라는 이유로 이 저택 밖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른 귀족들이 대놓고 무시하는 말을 할 때면 헤이먼은 저를 입양해 준 공작 부부가 망신스럽다며 내칠까 봐 얼마나 떨었는지를 모른다.

다시 그 거리로 나가, 실험실에 갇힌 채 당장 내일조차 알 수 없는 매일을 견뎌 내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졌다가, 살고 말았다며 또 절망하기를 반복하고.

다시는 그렇게 살기 싫어서 헤이먼은 필사적으로 공작가에 남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성년이 되고 마법사로 인정받은 이날까지, 디에르고 공작과 돌아가신 공작 부인은 한 번도 그에게 모진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껍데기만이라도 완벽한 귀족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았는데 발에 만년필을 끼워?

웃기는 소리.

말도 안 돼.

내가 그럴 수는 없지.

그건 귀족으로서도 당연히 안 될 말이지.

힐긋 창밖을 바라보자 보란 듯이 인부들의 신발을 모두 벗겨 놓은 솔레아가 한 명씩 발을 확인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거리 탓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헤이먼은 슬그머니 창을 열고 마법을 이용해 음파를 확장시켰다.

이젠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솔레아의 음성이 들렸다.

“아니, 이 발이 아니야. 다음. ……흠, 이 발도 아니야.”

“아가씨. 갑자기 발은 왜요.”

“나는 완벽한 발을 찾고 있어. 나의 심미안을 충족시켜 줄 완전하고 완벽한 발.”

마치 일부러 헤이먼 들으란 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헤이먼은 고개를 아래로 숙여 제 발을 봤다.

“……진짜 살이 쪘나.”

조심스럽게 발가락을 안으로 오므라뜨렸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발가락만 잘 움직이는데 뭐가 불만인 거지.

“글씨를 쓸 수 있을 만큼 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한다는 건가. 그 정도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발 페티시를 가졌단 말이야?”

징그러운 취향이었지만 그래도 뭐.

이 세상에 완벽한 발을 가진 사람이 나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헤이먼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발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런 뒤 바닥에 종이를 내려놓고 글씨 연습을 시작했다.

‘헤이먼 폰 베르고.’

“삐뚤빼뚤 엉망이군. 이러니 솔레아가 만족하지 못할 만도 해.”

다시 다리에 힘을 준 헤이먼은 발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해 온갖 글씨를 써 내려갔다.

‘디에르고 폰 베르고.’

존경하는 공작님.

‘에일린 일던 폰 베르고.’

따스하게 안아 주셨던 다정한 공작 부인.

‘티온 폰 베르고.’

과묵한 형님.

‘그레이 폰 베르고.’

철없는 멍청이.

‘솔레아 폰 베르고.’

미친 사람.

가족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을 때마다 글씨가 점차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헤이먼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종이를 바꿔 가며 글씨 연습을 계속했다.

하녀 하나가 품 안에 쓰레기를 가득 들고 솔레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저예요.”

“들어와.”

앤은 솔레아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냉큼 문을 닫더니 재빠르게 테이블 위에 쓰레기들을 내려놓았다.

“헤이먼 도련님 방의 쓰레기들을 왜 모아 오라고 하신 거예요.”

“확인할 게 있거든.”

솔레아는 생긋 웃으며 앤에게 작은 반지를 하나 건넸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아가씨가 시키신 일을 한 것뿐인데요.”

“그래도. 고마워서 그래.”

이 세상에 공짜 아닌 게 어디 있니. 괜찮다, 괜찮다 해도 사람을 부릴 때는 역시 돈이 최고거든.

그리고 이런 걸 줘 놔야 나중에 뭔 일이 있으면 네가 나한테 제일 먼저 달려올 거 아냐. 나도 꽤나 모진 인생을 살아왔단다.

몇 번을 연거푸 거절하던 앤은 결국 반지를 받아 들고 솔레아에게서 뒤돌아섰다. 난처한 낯빛이긴 했지만 내심 기쁜 기색이었다.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봐 조심조심 다루며 반지를 제 속치마 주머니 안의 깊은 곳에 꽁꽁 숨긴 앤이 다시 몸을 돌렸다.

솔레아는 그레이 방에서 가져온 종이들을 살피느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네. 알아볼 수는 있을 정도야.”

솔레아가 내려놓은 종이 다발 속에서 앤은 이상한 문장을 발견했다.

“여기 ‘솔레아 변태.’라고 적혀 있는데요, 아가씨?!”

저도 모르게 하, 하고 웃음이 터진 솔레아는 종이 다발을 대충 뭉친 다음에 벽장 난로 안으로 집어 던졌다.

“앗, 왜 태우세요? 헤이먼 도련님이 변태라고 하셔서 화나셨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헤이먼 도련님에게도 외설스러운 글을 읽으시는 걸 들키신 거예요?”

“……그런 거 아냐. 앤. 그러니까 너도 이제 나한테 그런 책 안 갖다줘도 돼.”

이미 침대 밑엔 앤이 몰래 숨겨 둔 야설이 한가득이었다.

이젠 그만 사 와도 되는데.

앤은 심심하실까 봐 걱정된다며 매주 한 번씩 어디선가 책을 구해 와 침대 밑에 숨겨 두곤 했다.

“어차피 방 청소는 주로 제가 하니까 아가씨는 걱정 마시고 편히 즐기세요.”

“아냐. 안 즐겨도 괜찮으니까 나가 봐.”

“예, 아가씨!”

충성스럽지만 눈치가 조금 없는 순수한 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간 뒤 솔레아는 불타오르는 벽난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종이에 발로 글씨 쓰는 건 이제 익숙해졌을 테니까 실험만 해 보면 돼.”

일기장 위에 글씨를 쓰는 게 정말 가능한지.

다짜고짜 원하는 말을 쓰게 했다가 실패라도 하면 의심만 살 테니까.

솔레아는 왼손으로 제 목에 걸려 있는 작은 은색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앤을 시켜서 몰래 구매한 목걸이는 펜던트 안에 작은 사진을 넣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사진이 아니라 로또 당첨 종이가 들어 있었다.

항상 지니고 다녀야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니까.

솔레아는 일부러 기다렸다.

헤이먼이 애가 타도록.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그 와중에도 그레이와 매일 운동했다.

“허리가 꺾이면 안 된다니까! 배에 힘줘!”

“배에……! 으억, 배에 힘이 없다고! 솔레아는 왜 이렇게 몸에 근육이 한 덩이도 없어!”

똑바로 서서 어깨를 쭉 펴고 팔이 Y 자가 되도록 위로 펼쳤다가 팔꿈치를 구부려 아래로 쭉 잡아 내리는 단순한 동작인데도 아팠다.

광배근, 날개뼈, 허리, 허벅지, 심지어 발바닥까지.

“솔레아가 평소에 계속 누워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지금 그레이가 운동 가르쳐 주잖아.”

“그레이 새끼야. 너무 힘들어.”

“넌 오빠한테 말 좀 곱게 해라.”

“그레이. 이거 몇 개나 해야 돼?”

“딱 다섯 개만 더 하자.”

“흐어어.”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근육을 키워.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근육을 키운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헤이먼이 먼저 솔레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솔레아. 나야.”

“응. 들어와.”

오늘도 운동을 끝내고 녹초가 되어 방으로 돌아온 솔레아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비장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서는 헤이먼이 보였다.

“운동을 한다고 들었어.”

“응. 건강해지려고.”

“……여전히 예쁜 발도 찾고 있다지.”

“응. 그렇지.”

“원하는 발은 찾았니.”

“아니, 아직.”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하며 솔레아는 헤이먼을 바라봤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이건 네가 쓴 건가?”

디에르고 공작은 전에 솔레아에게 일주일간 편지를 보낸 뒤로도 가끔 아침 식사를 함께하지 못하는 날이면 간단한 쪽지를 적어 하녀를 통해 전하곤 했다.

솔레아 역시 가끔 답장을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솔레아의 편지를 바라보며 물어본 헤이먼은 부드럽게 웃으며 묻지도 않은 자랑을 시작했다.

“글씨가 마치 글을 배운 지 며칠 되지 않은 아이 같군. 내가 발로 써도 이것보단 잘 쓰겠는데.”

재수 없네.

하지만 진짜로 더 잘 쓰면 용서해 주지.

뭔들 용서 못 하겠니.

솔레아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발로 글씨를 써도 이것보다 잘 쓸 수 있다고? 힘들 텐데.”

헤이먼은 픽 웃으며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물론, 섬세한 소근육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지.”

발을 깨끗하게 씻고 왔는지 신발을 벗자 향긋한 꽃향기가 풍겼다.

무슨 관리씩이나 하고 왔어.

솔레아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전보다는 발 모양이 예뻐진 것 같아.”

“그럴 줄 알았다. 조금 보기 흉할 수도 있지만, 네 취향이 이렇다니까 뭐, 내가 참아야지.”

헤이먼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중 하나를 바닥에 내리고 오른발에 만년필을 끼운 뒤 글씨를 써 내려갔다.

‘미친놈. 진짜 손으로 쓰는 것보다 잘 쓰잖아?’

연기를 할 필요 없이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헤이먼 폰 베르고.’

유려한 필기체로 휘갈기듯 자신의 이름을 쓴 헤이먼의 글씨는 튀어 나간 획 하나 없이 깔끔해 그대로 어디 계약서의 서명으로 이용해도 될 법했다.

솔레아의 놀란 얼굴에 우쭐해진 건지 헤이먼은 이름 밑으로도 여러 문장을 써 내려갔다.

‘이 정도는 돼야 완벽한 발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

‘흉터는 많지만 그만큼 재주도 많은 발이다.’

‘네가 예쁘다고 칭찬 일색이었던 게 이제야 이해가 가.’

솔레아는 헤이먼의 글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진짜! 내가 본 것 중에 헤이먼 발이 가장 완벽해!”

“어쩜, 글씨까지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지는 부분 하나 없이 예쁜 사람이네!”

“너무 예뻐! 우리 부농 곤듀 완댜님! 오구오구, 예뻐!”

헤이먼의 입꼬리가 피실피실 위로 올라가던 그때 솔레아가 환한 얼굴로 서랍에서 책을 꺼내 왔다.

오래된 가죽 커버로 감싼 두꺼운 책이었다.

“그건 무슨 책이야?”

“아. 오래된 종이라서. 오래된 종이에 오래된 펜으로 쓰는 건 힘 조절이 어렵잖아. 오빠가 잘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말을 마친 솔레아는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해 둔 것처럼 책 사이에서 오래된 만년필을 꺼냈다.

“간단하지. 난 이제 발가락으로 솜털 개수도 셀 수 있다.”

“그럼 보여 줘.”

보여 달라는 말을 하는 솔레아의 눈이 잠깐 번뜩였다.

헤이먼은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 쫄았지만 어차피 동생은 발 페티시가 있는 변태라 그런 걸 테니.

“솔레아. 약속 하나만 해.”

“뭔데.”

“네 발 페티시를 내가 충족시켜 주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벗기고 다니지 않겠다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알았어. 신발 안 벗길게. 우리 완댜님이 여기 글 쓰는 거 성공만 하면 뭔들 못 하겠어. 기인열전에도 내보내 준다, 내가.”

기인열전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헤이먼은 자신이 있었다.

오래된 종이라 힘을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지만 지난 며칠간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던가.

솔레아 말처럼 생각보다 하체의 근육을 골고루 쓰는 모양이라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젠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게 가능했다.

헤이먼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솔레아가 내민 오래된 만년필을 제 발에 끼웠다.

가만, 이거 어디서 본 장면 같은데?

하긴. 오래된 만년필은 다 이렇게 생기긴 했지.

솔레아가 책장을 넘기며 주르륵 훑더니 텅 빈 페이지를 펼쳐 바닥에 내려놓았다.

헤이먼은 솔레아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숨을 들이마셨다가 아주 천천히 내뱉은 뒤 발을 그 위로 올렸다.

“……음?”

“왜 그래?”

“앉아서 하니 힘을 조절하는 게 힘드네. 일어서 볼게.”

헤이먼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균형을 잡은 뒤 다시 종이 위에 발을 갖다 댔다.

솔레아는 어느새 책 앞에 주저앉아 종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발등에 키스라도 하는 줄 알 법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둘 다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헤이먼에겐 자존심이 걸려 있었고, 솔레아에겐 인생이 걸려 있었다.

“할 수 있어! 힘내 봐!”

“이, 이게 왜 이러지.”

하지만 솔레아의 열띤 응원에도 헤이먼은 종이 위에 어떤 글자도 찍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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