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92)

13화

솔레아의 또라이 같은 기행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며칠 뒤 다시 화가를 불러 이번에는 디에르고 공작의 발까지 그림에 담아내고 말았다.

“솔레아. 왜 하필 발이니?”

“가장 낮은 곳에서 위를 지탱하니까요. 걸어오신 길을 담아내고 싶어요.”

디에르고 공작은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그런 뜻이 있었구나.”

그로부터 며칠 뒤 멋진 화풍으로 그린 디에르고 공작의 상처 많은 발과 그레이의 발이 저택에 걸렸다.

그레이의 것은 색채감이 화려한 그림이었지만 디에르고의 것은 목탄으로 그려 거친 터치감이 느껴지는 흑백 그림이었다.

디에르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솔레아에게 물었다.

“……왜 나는 흑백이니, 솔레아.”

“긴 세월에 무뎌진 고독과 쓰라린 아픔,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의 영광 같은 것들을 날것의 감성 그대로 그림에 표현해 보았습니다.”

디에르고는 이번에도 깊게 감명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레아의 대답은 마치 어딘가에서 하루 종일 손님을 상대하며 장사만 수십 년 해 온 전문가 같았다.

하지만 솔레아는 공작저 밖을 나간 적이 없으니 이 기묘한 기시감은 착각일 것이다.

고개를 짧게 흔든 헤이먼은 이마를 짚었다.

설마 내게 했던 모든 말이 진심이었던 건가?

어쩐지 골이 흔들려 휘청거리며 제 방으로 올라온 헤이먼은 제 서재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뭔가 연관성이 있는 게 분명했다.

솔레아가 갑자기 발에 집착하는 이유.

눈앞까지 음란 소설을 들이밀며 반색하던 모습.

완전하게 예쁜 형태의 발을 찾는다고……?

헤이먼의 고운 분홍색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몇 분이 지난 후, 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발 페티시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헤이먼은 서재 뒤편 서가에서 여러 권의 서적을 꺼내 왔다.

크게 앓고 난 뒤로 성격이 바뀌었다든지,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든지 하는 사례들이 담긴 책이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책을 살피던 헤이먼이 결론을 내린 듯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었다.

이 책에 의하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상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적혀 있었다.

헤이먼은 천천히 제 신발을 벗고 아래를 바라봤다.

평범해 보이는 발이었다.

“……내가 아니면 멈출 수 없다는 건가.”

내가 아니면 멈출 수 없는 음험한 욕망이라니.

하하, 이것 참.

세계를 구할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동생이 사교계에 나가서도 다른 이들 발을 보겠다고 신발을 벗기면 안 되니까.”

헤이먼은 마법을 이용해 발의 흉터들을 잠깐 동안 보이지 않게 해 봤다.

말끔해 보이긴 했지만 평소와 달리 흉터가 모두 사라지자 제 발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냐, 솔레아는……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싶은 거랬으니까.”

발의 표면에 걸려 있던 착시 마법을 다시 거둬들였다.

이제야 ‘완전한’ 발 같았다.

“가문을 위해선 어쩔 수 없어.”

대단하신 희생이라도 하는 양 헤이먼은 굳은 얼굴로 다시 신발을 신었다.

그러곤 솔레아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솔레아는 보이지 않아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장 마르실라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르실라. 솔레아는 어디 있지?”

“아, 도련님. 아가씨는 지금 기초 체력을 키우시기 위해 그레이 도련님과 같이 훈련장에 가 계세요.”

“……그 약한 몸으로?”

“네, 하지만 어떻게든 건강해지고 싶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동안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던 게 아까우신가 봐요. 너무 잘됐죠!”

마르실라의 환한 웃음을 뒤로하고 헤이먼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 뒤편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크게 아프고 난 이후 앞으로의 인생을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건 좋은 마음가짐이었다.

아픈 채로 골골거리면 바깥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뿐이니까.

‘베르고의 유일한 후계자가 몸이 저리 약해서야 어떡한대요.’

기억을 잃기 전 솔레아는 그런 얘기가 듣기 싫다는 듯 아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귀족들의 말처럼, 솔레아 말고는 모두 가짜니까.

입양한 아이를 키워 주고 보호해 준 은혜를 베푼 것만으로도 베르고 공작가에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당연했다.

헤이먼은 훈련장에서 그레이와 소리 지르며 싸우고 있는 솔레아를 보며 픽 웃었다.

정말로 운동을 하고 있었는지 편한 바지와 긴 셔츠 차림의 저 엉뚱한 동생 역시,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거겠지.

“난 가문을 위해 소공작인 네게 충성하는 것뿐이지만.”

헤이먼은 작게 혼잣말을 한 후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 솔레아. 네가 원하던 ‘완전한’ 발이다.

약간 기대감에 부푼 상태로 걸어갔지만 그들은 헤이먼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박 터지게 싸우는 중이었다.

“아니, 너는 왜 내 말을 들어먹질 않냐! 지금 네 몸 상태론 간단하게 스트레칭하고 하루에 30분 정도 걷는 게 최선이라니까!”

“이 안일한 자식아!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근육을 만들라고!”

“또 근육통 오면 어쩔 건데!”

“공작님이 의술사 불러 주시겠지!”

“의술사는 근육통을 치료하는 거지, 찢어진 근육까지 붙여 주기는 힘들다고, 이 미친놈아!”

“이게 또 동생한테 미친놈이라고 하네! 너는 뭐, 되게 제정신인 줄 아나 보다?”

“뭐, 이 자식아?”

기어코 솔레아를 집어 던질 요량인지 그레이가 솔레아를 잡으러 뛰어가자 솔레아는 잽싸게 뛰어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몇 초도 안 돼 붙잡힌 나약하기 그지없는 솔레아는 그레이에게 강제로 스트레칭을 당했다.

“악! 옆구리 찢지 마!”

“옆구리가 유연해야 된다고 했지!”

“……솔레아, 여기 너의 완전한 발이 왔다.”

약간은 작은 목소리로 불러 봤지만 여전히 귓등에도 안 박히는 것 같았다.

“머리 누르지 말라고!”

“허리를 더 숙이라니까!”

“앤이 오늘 아침에 이 머리 하는 데 30분도 넘게 걸렸다! 너는 남의 수고를 개똥으로 아는 버릇이 있어. 하여간 부잣집 놈들이란.”

“너 진짜 미쳤냐?”

“믣칑 건 늬가 믣칭 거갰죠∼”

일부러 혀를 얄밉게 꼬아 가며 놀린 솔레아가 다시 도망가고, 그레이가 다시 쫓아가길 반복하자 헤이먼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발을 보여 주러 왔는데 이렇게 존재감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다.

“품위 떨어지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예전의 솔레아에겐 이 정도로 소리쳐 본 적도 없었다.

하도 기죽은 채로 다닌 터라 가끔 마법을 보여 주고 미미한 미소를 얼굴에 띠어 주는 게 최선이었으니까.

그조차도 헤이먼의 변덕이 허락하는 날뿐이었지만.

아무튼, 예전의 솔레아였다면 헤이먼이 소리를 질렀을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솔레아가 변했다는 거였다.

“으이그, 우리 곤듀님 화났잖아. 너 때문에.”

“……너 지금 헤이먼한테 공주라고 한 거야? 너 어디까지 돌았어? 약을 먹어야 되는 거야, 아니면 먹어야 되는 약을 빼먹은 거야?”

“너나 잘해.”

헤이먼의 찡그린 미간은 보이지도 않는지 두 사람은 신랄하게 토론을 펼쳤다.

며칠 사이에 얼마나 친해졌는지 누가 보면 아주 태어날 때부터 죽이 척척 맞은 줄 알 정도였다.

“공주는 좀 그래. 우리 제국 황녀님만 해도 얼마나 담대하고 멋지신데.”

“맞아. 내가 잘못했네. 그럼 그냥 완댜님이라고 부를까.”

“왕자님이면 왕자님이지. 완댜님은 뭐야?”

“완댜님이라고 해야 놀리는 게 티 나잖아.”

그레이는 새삼스럽게 놀라운 얼굴을 하고 솔레아를 쳐다봤다.

“너 정말 참신한 또라이구나.”

헤이먼은 여기 더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빨리 기억을 잃고 비정상이 된 솔레아의 발 페티시를 해결해 주고 싶었다.

비장하게 각오를 다진 헤이먼은 솔레아의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내 발, 필요하다면 보여 줄게.”

“진짜?”

놀리는 의도가 다분했던 아까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는 싹 사라지고 솔레아의 음성엔 오직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온 얼굴을 환하게 피우며 솔레아는 맑게 웃었다.

전에 본 적 없는 밝은 미소였다.

“보여 줘.”

솔레아의 뒤에 선 그레이가 약간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야. 내 발도 예쁘다며. 언제는 내 발의 과거도 사랑하겠다며.”

핑쿠 완댜님은 여유롭게 승자의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네 발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아름답진 않았나 보지. 과거와는 별개로 발의 모양은 제각각이니까.”

기세등등한 모양새가 아주 기똥차게 재수 없어서 그레이는 아랫입술을 쭉 늘어뜨리듯 내리고 비아냥거렸다.

“늬예늬예∼ 어련하시겠어요, 완댜님∼”

솔레아에게 배운 기술이었다.

헤이먼은 못생긴 발을 가진 그레이가 아무리 약을 올려도 큰 데미지를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완전한’ 발의 주인은 나니까.

헤이먼은 완연한 미소를 띠며 신발을 벗어 보였다.

자, 솔레아. 이것이 바로 ‘완벽’이다.

은근슬쩍 마법을 이용해 발 뒤에 후광까지 만들었다.

이건 다 가문을 위한 거니까.

솔레아가 빨리 정신을 차려야 가문의 체면이 서니까.

하지만 헤이먼의 기대와는 달리 솔레아는 다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스읍……. 이건, 좀. 곤란한데.”

“뭐, 뭐가?”

“헤이먼. 혹시 발에 살쪘어?”

“뭐?”

“전에 봤을 땐 발에 핏줄이 좀 올라와 있었고, 발 모양도 좀 더 날카로웠고, 아치도 더 봉긋했는데. 하, 이건 좀.”

말끝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헤이먼은 머리에 철퇴라도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솔레아의 두 어깨를 잡았다.

“내 발이 예쁘다며! 내 발이 제일 예쁘다며! 그림으로 담아내지 못해서 아쉽다며!”

솔레아는 일부러 입술을 양옆으로 길게 늘이며 눈썹을 팔자로 만들었다.

21세기에선 흔히 볼 수 있는, (ex. 죄송합니다, 고객님. 재고가 없습니다.) 하나도 안 죄송할 때의 표정이었다.

“안타깝군요. 헤이먼 씨는 저와 함께 가실 수 없습니다.”

그레이는 이미 호위 기사가 된 것처럼, 솔레아의 어깨를 잡고 있던 헤이먼의 두 손을 떼 냈다.

“부농 완댜님. 이만 방으로 돌아가셔서 발이나 씻으시죠. 풀밭을 밟으셨네요.”

“야! 그레이! 놔 봐! 내 발이 왜! 내 발이, ……며칠 전까진 멀쩡했는데 갑자기 발에 살이 쪘다는 게 말이 돼?”

그레이와 함께 투스텝을 밟으며 저택으로 돌아가던 솔레아가 싱긋 웃으며 뒤돌아봤다.

“그럼 발가락에 만년필이라도 끼우고 글씨 연습을 해 봐. 소근육을 키우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

말을 마친 후 솔레아는 다시 그레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원 투 차차차를 밟으며 박진감 있게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 미친 것들. 둘이 친해지더니 아주 쌍으로 미친 거야. 돌았어. 제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일 미친 건 발가락에 끼울 만한 만년필 사이즈를 머릿속으로 찾고 있는 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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