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까탈스러운 핑크 곤듀님의 발목은 꽤나 굵었다.
“발 좀 보여 줘!”
“야!”
“이거 좀 벗어 보라니까.”
“뭐, 뭐 하는!”
“가만히 있어 봐! 이거 왜 안 벗겨져!”
나는 필사적이었다.
근육을 키우는 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 방법을 이용해 돌아가고 싶었다.
은행과 나의 17억이 있는 그곳으로.
어제 근육통에 시달린 탓인지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다행히 헤이먼은 나를 힘껏 밀쳐 내진 않았다.
적자, 후계자를 계속해서 언급하더니 솔레아가 다칠까 꽤나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으유, 이 안쓰럽고 싹수도 없고 지 기분 좋을 때만 다정한 자격지심 덩어리 핑크 곤듀.
다짜고짜 신발을 벗기려는 미친 사람에게 한다는 게 고작 소리 지르는 것뿐이라니.
“내 발은 왜! 아, 정말! 솔레아!”
휘청거리던 헤이먼은 결국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나 같았으면 잡히지 않은 다른 쪽 발로 힘껏 차 버렸을 텐데.
헤이먼은 그 와중에도 발을 휘둘러 나를 차 내지는 못하고 그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열심히 밀어 낼 뿐이었다.
“미쳤어?! 정신 차려! 혹시 또 발작이야?”
“벗어! 네 발 좀 보자!”
“발을 왜! 갑자기 왜 이래!”
“에이씨, 왜 이렇게 안 벗겨져!”
“너 정말……!”
“아, 벗겼다!”
겨우 헤이먼의 신발을 벗기고 그의 발가락 사이에 만년필을 끼웠다.
“자, 얼른 여기에 네 이름 써 봐!”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17억 당첨 종이와 함께 무사히 원래의 세계로 귀환.’이라고 쓰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무슨 얘기냐고 달달 볶을 게 분명했다.
일단 이름부터 써 보게 하고, 성공하면 수면제라도 먹여서 발 좀 빌려야지.
상처 많은 발을 보아 하니 역시 듣던 대로 고생을 많이 했단 걸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넌 돈 많잖아. 난 이게 다라고.
“제발! 솔레아!”
“제발이 아니라 네 발 이리 달라니까! 이름! 이름 써 봐!”
곧장 발 아래 일기장을 갖다 대려 했지만 헤이먼은 빨개진 얼굴로 나를 휙 밀쳐 내고 발가락에 끼워진 만년필도 내던졌다.
내가 곧바로 다시 붙잡을 거 같았는지 헤이먼은 바닥에서 벌떡 일어서선 한 걸음 물러났다.
“내 이름을 그 책에 왜 남겨! 솔레아! 정신 차려!”
조용히 하고 발이나 내놔.
일기장을 손에 쥐고 일어서서 그와 마주서자 마치 광인을 마주한 듯 헤이먼의 동공이 약하게 흔들렸다.
그는 날짐승에게 신호를 보내듯 손바닥을 편 채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진정해. 마법 수업을 받고 난 후엔 한동안 마력을 운용할 수 없어서 널 재울 수도 없다고. 그러니까 제발…….”
“나도 제발. 발 줘! 이름 좀 써 달라니까?”
“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 이름으로 책을 출간해서 날 망신시키려는 거야? 그런 생각이라면 접어야 할걸. 난 애초에 떨어뜨릴 평판조차 없는 놈이니까.”
처음엔 흥분해 커졌던 헤이먼의 목소리가 점점 스스로를 비웃는 것처럼 자조적으로 바뀌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후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헤이먼.”
나는 솔레아다.
나는 솔레아다.
나는 솔레아다.
나는 지성과 다정을 모두 겸비한 갓벽한 솔레아다.
조용히 셀프 최면을 건 뒤 헤이먼을 향해 최대한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난 그냥 네 아픔에 공감해 주고 싶을 뿐이야.”
“……무슨 소리야.”
헤이먼이 날카롭게 받아치긴 했지만 대부업 아재들과 빚쟁이들에 비하면 이 정도야 가소로웠다.
흉터도 주름도 없는 고운 얼굴로 목소리를 깔고 위협해 봤자 내겐 그저 길고양이의 하악질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요 깜찍한 핑크 애옹 곤듀님 같으니라고.
“기억을 잃은 후 내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어. 이젠 더 이상 아프다고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 있지도 않을 거고, 죄책감에 오빠들을 피하지도 않을 테야.”
지금 완전 사랑방 손님과 솔레아 같았지.
다시 이성을 찾은 나는 크흠, 흠,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나는 오빠의 힘든 과거도 안아 주고 싶어. 오빠의 위안이 되고 싶어. 그게 우리 가문을 위한 거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가족을 지키는 게 가문을 지키는 거니까.”
우린 가족이라는 뜻이었다.
이 말을 했을 때 그레이는 좋아하던데 헤이먼한테도 먹히려나.
입꼬리를 쭈욱 끌어 올려 햇살이 부서지듯 웃어 보려 노력했다.
노력은 했다.
부족했을 뿐.
“……발을 보는 거야 그렇다 쳐도 이름은 왜 쓰라고 한 거야.”
“예뻐서.”
“뭐?”
여태 개소리를 해도 열심히 들어 주던 헤이먼의 미간이 단박에 확 구겨졌다. 헤이먼이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예뻐? 내 발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헤이먼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대로 된 신발 한번 신어 보지 못하고 살았어. 이 집에 들어온 지 10년이 다 돼 가는데도, 여전히 흉터가 남아 있어. 찢어졌던 새끼발가락은 살이 아물며 이상하게 붙어서 기괴하기만 해. 근데 그게 예쁘다고?”
헤이먼의 냉기 어린 목소리에 방 안의 온도가 낮아진 듯한 착각까지 일 정도였다.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해.”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아까의 대답을 고수했다.
“놀린 적 없어. 진짜 예쁘다고 생각해.”
코앞에서 나를 위협하는 헤이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발은 네가 얼마나 힘들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 알려 주는 지표잖아. 그런 힘든 상황을 모두 견뎌 내고 지금 여기에 있잖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헤이먼이 잠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가 곧장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럼 글씨는 왜 쓰라고 한 거야. 그 책에 뭔가를 쓰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던 거 아냐?”
들켰네, 시발. 하지만 들어 보세요.
“아니야. 그…… 발가락 운동이야. 발가락의 근육들을 훈련시켜 주면 뇌가 발달된대.”
“……내 뇌가 덜 발달돼 보인단 소리야?”
그럴 리가요, 공주님.
“아니. 오빠가 어제 종일 누워 있었다길래 걱정돼서. 발가락 운동은 쉽고……. 그리고 솔직히 오빠 발 예쁘게 생겼잖아. 숨겨 놓는 게 아까워서 그랬어.”
아직 신발을 신지 못한 헤이먼의 발을 슬쩍 내려다봤다.
발 모양은 정말 예쁜데. 흉터도 자잘한 게 많을 뿐, 보기 흉하진 않았다.
흉터 좀 있는 게 뭐, 어때서. 내 진짜 몸엔 이것보다 더 많은 흉터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말들이 궤변이 아닌 건 아니지만.
‘아가씨는 다정하고 똑똑하셨어요!’라고 앤이 종종 말하곤 했는데.
망했네요.
이 자리에 길게 있었다간 더 꼬일 것 같으니 일단은 피해야겠다.
“……난 정말 오빠 발 예쁘다고 생각해. 그 얼굴만큼. 하지만 오빠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지. 급하게 들이대서 미안.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구석에 떨어진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주워 들고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헤이먼의 눈길을 피해 방 밖으로 나왔다.
* * *
그날 저녁 헤이먼은 거울 앞에 선 채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아무리 봐도 흉터투성이인 못난 발이었다.
절대 지울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덕지덕지 묻은 발.
헤이먼은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구겨 신은 뒤 거울을 등지고 돌아섰다.
“기억을 잃으면서 반푼이가 됐나 보군.”
……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헤이먼은 농담이었다.
솔레아가 불러온 화가가 정원에서 그레이의 발을 그리고 있는 풍경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헤이! 헤이먼! 안녕!”
“이게 무슨.”
바지를 종아리 중간까지 걷어 올린 그레이는 다리를 꼰 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화가는 나름의 프로 정신을 발휘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레이의 발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었다.
“그레이. 너 왜 발을…….”
그레이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옆에 서 있는 솔레아에게서 돌아왔다.
“헤이먼 오빠가 싫다고 해서, 내가 그레이한테 발 보여 달라고 했어.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신발을 벗어 재끼더라. 헤이먼 오빠 발이 더 예뻐서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야! 내가 언제 기다렸다는 듯이 벗었어! 네가 먼저 발 보여 달라며!”
“아니, 그러면 너는 지나가는 사람이 ‘가슴 보여 주세요.’ 하면 가슴도 보여 줄 거냐?”
“가, 가슴이…… 미친놈아! 여기서 가슴이 왜 나와! 그리고 너 왜 헤이먼한텐 오빠라고 하고 나는 너라고 부르냐? 난 네 오빠 아니냐!”
두 사람이 싸우기 시작하자 화가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왼손을 들어 한쪽 귀를 막고 다시 세심한 터치를 이어 갔다.
“도련님. 발을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화가가 조용히 읊조린 말에 그레이는 천부적인 신체 능력으로 하체는 가만히 두고 상체만 솔레아 쪽으로 돌려 분노를 표출했다.
자본주의 하체와 분노로 얼룩진 상체의 기괴함에 헤이먼은 제 머릿속까지 엉망진창이 되는 것 같았다.
“네가 발 좀 보자며! 예쁜 발이 보고 싶은데 헤이먼은 안 보여 준다고 내 거 보여 달라며!”
“으이구! 벗으란다고 벗어 놓고 내 탓을 하네!”
솔레아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그레이는 정말 억울했는지 길길이 날뛰다가 이내 헤이먼에게 화살을 돌렸다.
“형이 그냥 발 좀 보여 주지!”
“……뭐?”
“형이 발 보여 주지! 쟤가 화가 불렀는데 그냥 돌아가게 할 거냐고, 일당 받고 일하는 사람 하루 공치면 손해가 얼마나 큰지 아냐면서 당장 벗으래서 벗었는데! 형 대타잖아, 내가! 형이 벗었으면 나는 안 벗어도 됐잖아!”
혼란스러워진 헤이먼이 주춤거리며 말했다.
“왜, 왜 내 발이 필요한 건데.”
그레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치며 말했다.
“형 발이 더 예쁘다잖아. 솔레아가.”
내 발이 진짜 예뻐?
이런 발이 뭐가 예쁜데.
가장 숨기고 싶은 곳을 위로해 주고 싶단 게 진심이었나?
……아니, 잠깐만. 고작 발이 예쁘다는 이유로 화가를 불러?
얘가 제정신이 맞는 건가.
헤이먼의 작은 머리 안에 떠오른 수많은 의문들은 답을 하나도 찾지 못한 채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때, 캔버스 위를 붓으로 터치하던 화가의 입에서 아쉬움이 담긴 탄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그림 모델을 하고 있는 중에 방방 날뛴 게 양심에 찔렸는지 그레이가 냉큼 이유를 물었다.
“내 자세가 틀어져서 그래? 발은 가만히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기사 훈련을 받으신 분이라 그런지 발 모양이 살짝 틀어지셨네요. 솔레아 아가씨께서 찾으시는 완벽한 발은 아닌 듯합니다.”
마치 신데렐라를 찾는 왕자님처럼 솔레아가 실망한 티를 팍팍 냈다.
“하……. 발의 세세한 흉터 하나하나에 담긴 스토리텔링으로 심금을 울리면서도 발가락 소근육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완벽한 균형의 예쁜 발이 보고 싶었는데.”
제 동생이 실망한 모습에 괜히 미안함을 느끼는지 눈치를 살피던 그레이가 헤이먼을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네가 진작 발을 보여 줬어야지.’
화가는 솔레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계속 그릴까요?”
“네. 저는 그레이의 발이 디뎠던 과거도 사랑할 거니까요. 우린 피를 나누진 않았어도 남매니까.”
그레이는 감격한 듯 입을 다물었고 화가 역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낸 뒤 다시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헤이먼은 이 중에서 누가 덜 미쳤고, 더 미쳤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