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세계관이 묘하게 중세 시대 같다 싶더니. 고루하기가 짝이 없네.
방 앞에 서 있던 앤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나를 보곤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 줬다.
“아가씨. 공작님께선 뭐라고 하시던가요?”
방으로 들어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던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술 있어? 독주로.”
“……술이요?”
“술이라도 있어야지.”
돈도 없는데.
술은 나와 아주 길고 긴 역사를 함께한 친구인데. 그거라도 있어야지.
나를 말리고 싶은지 우물쭈물하던 앤은 천천히 나가더니 술 한 잔을 들고 돌아왔다.
“탈이 나실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위스키예요.”
“고마워, 앤. 이거 한 잔이면 충분해.”
“……아가씨 괜찮으세요? 저라도 곁에 있을까요? 아니면 그레이 도련님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앤. 잠깐 혼자 있을게.”
“예, 아가씨.”
대답은 했지만 앤은 내가 신경 쓰이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방을 나갔다.
나는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위스키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려 그대로 벌컥 목구멍으로 넘겼다.
불같이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목부터 가슴까지 화끈거렸다. 어으으, 염병할 인생에 취한다.
긴 한숨을 푸우― 하고 내쉬었다.
그래, 산책은 끝내고 이제 집에 가자.
얼른 17억과 함께 돌아가야겠다. 팔자에도 없는 결혼을 할 순 없으니까.
페르난도? 이름부터 별로야. 패륜아 같아.
장미 가시에 찔린 손가락 끝에 맺힌 피 때문에 술잔에도 핏자국이 생겼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가 소매로 대충 문질러 닦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일기장이 들어 있는 서랍장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저 일기장에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미래를 적을 수 있나요?
아니.
근육을 충분하게 키울 시간이 있나요?
그건 모르지.
근육을 포기할 건가요?
지금으로선 돌아갈 방법이 그거 하나뿐이니 포기는 안 돼.
강해지는 것 말고 저 일기장에 글씨를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그건 모르지.
다른 사람에게 만년필을 쥐여 줘 본 적이 없으니.
저 일기장이 다른 사람들 눈에 야설로 보인다는 건 일기장 자체에 마력이 있다는 의미인데, 그럼 마력이 있는 사람이 보면 다르게 보이려나.
나는 일기장을 손에 들고 헤이먼의 방으로 향했다.
“헤이먼?”
방문을 두드리자 힘없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들어와.”
어제 내내 방 안에 박혀 있었다는 헤이먼은 퍽 피곤해 보였다.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무슨 일이야.”
“헤이먼. 넌 마력이 있지?”
내 말에 헤이먼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방어적이야. 누가 네 마력 뺏어 간다니.
헤이먼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이번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술 마셨어?”
“냄새나? 딱 한 잔밖에 안 마셨는데.”
아직 책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헤이먼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술을 왜 마셔. 나이도 어린 게.”
“어랍쇼, 누가 보면 여섯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알겠네. 내가 알기론 나 열여덟 살이라 했던 거 같은데. 넌 술 안 마시냐.”
내가 받아칠 줄은 몰랐던 건지 헤이먼은 황당하단 듯 나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안 마셔. 마력이 불안정해지니까.”
“그럼 마력 안정돼 있는 김에 이거 손에 들어 봐.”
만년필을 내밀자 헤이먼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그것을 한참 바라봤다.
왜 가만 보기만 하지? 손에 쥐어 보라고.
시큰둥하게 헤이먼을 기다리다 보니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일기장이 야설로 보이는 것처럼 설마 만년필도 다른 걸로 보이는 건가.
젠장. 앤한테 먼저 실험해 보고 올걸. 앤은 내가 입단속이라도 시킬 수 있을 텐데.
내 속이 타들어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헤이먼은 영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럽게 만년필을 들어 올렸다.
“다 낡아 빠진 만년필은 왜?”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나마 만년필의 범주에는 넣어 주셨군요. 분홍 머리 외국인에게 이상한 물건을 들이대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난 가슴을 쓸어내리며 잔뜩 일그러진 헤이먼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게 내 눈에는 쌔끈하게 잘빠진 검정 만년필로 보이지만 쟤한텐 아닌가 보네. 일단 만년필이라고 인지는 해 주니 다행이다.
“그럼 이건 어때?”
표지가 보이지 않게 드레스의 넓은 소매로 가리며 품에 안고 왔던 일기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머릿속에서 온갖 위험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만년필은 성공했지만 이게 또 야설로 보이면 잘못 들고 왔다고 뻥쳐야 하는데.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마력을 지닌 사람은 헤이먼이 유일했다.
물어볼 사람이 헤이먼뿐이니 얘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다. 만약 실패하면, 그땐 정말 근육 키우는 데 사활을 걸어야지.
“이게 뭐야?”
갑자기 찾아와 이것저것 묻는 나 때문에 두통이 오는지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헤이먼이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힐긋 내려다봤다.
“……일기장?”
그의 입에서 작게 튀어나온 일기장이라는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 정말, 너무 감동적이야.
그동안 일기장을 일기장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만년필을 만년필이라고 부르지 못해 얼마나 힘들었던가.
반가운 마음에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진짜 일기장으로 보여? 세상에. 어, 맞아! 이거 일기장인데! 이거 봐 봐, 안에 전부 내가 쓴…….”
“렘샤 부인의 비밀 일기장? 이게 네 거라고?”
“아닌데요.”
시발.
렘샤 부인. 시리즈 좀 그만 내세요. 인생이 그렇게 바쁘시냐고요. 짧은 인생을 너무 즐기시는 거 아니냐고요. 그 다망하신 와중에 일기까지 쓰시면 어떡해요.
일기장을 펼치려 드는 헤이먼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아!”
“보지 마.”
“네 거라며!”
“아냐. 잘못 들고 왔어.”
손등을 얻어맞은 헤이먼이 분홍색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다 팔짱을 꼈다. 그의 얼굴에서 불쾌감이 드러났다.
“방금 네가 네 입으로 네 일기장이라고 했잖아.”
“아, 그러니까. 내 일기장인 줄 알았는데 이게…… 렘샤 부인의 일기장이었네.”
“그 여자는 누군데.”
그러니까요. 저도 만나고 싶네요.
최대한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자 헤이먼이 지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두 눈가를 짓눌렀다.
“솔레아. 네가 기억을 잃은 이후로 많이 혼란스럽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남한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기초적인 상식까진 까먹진 않았을 텐데?”
말을 해도 꼭 저렇게 재수 없게 해야 되냐.
“그리고 이 만년필은 뭐야? 렘샤 부인이랑 교환 일기라도 쓰는 건지, 아니면 네 상상 친구인진 모르겠지만 너 아니어도 나 충분히 바쁜 사람이야. 그러니까 시답잖게 굴지 말고 이거 갖고 방으로 돌아가.”
더럽게 예민하네. 이불 100장 밑에 콩알 끼워 두면 불편하다고 못 잘 까탈 공주님 같은 새끼.
신경질적으로 일기장을 잡아채다가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게다가 헤이먼의 손도 쳐 버렸는지 만년필까지 바닥으로 떨어졌다.
펼쳐진 종이 위로 낙하하던 만년필은 허공에서 한 번 퉁 튕겨 오른 뒤 일기장 위가 아닌 나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금 뭐야?”
“뭐가?”
똑똑히 봤는지 헤이먼의 잘생긴 얼굴이 쫙쫙 펴졌다. 그는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나와 일기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방어벽이라도 펼쳐져 있는 것처럼 만년필이 공중에서 튕겼잖아.”
“난 잘 모르겠는데. 충분히 바쁘신 까탈 공주 헤이먼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나가려던 참이라.”
“너 방금 날 뭐라고 부른 거야.”
“으이그, 공주님 방해 안 되게 저 나가겠다고요.”
방어벽이 있든 넘사벽이 있든 이상벽 씨가 있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느자구없는 새끼야.
만년필을 주운 후, 일기장을 집으려는 순간 헤이먼이 일기장을 발로 밟았다.
“뭐 하는 짓이야.”
“너 왜 책에 마법을 걸어 놓은 거야.”
“알 바 아니잖아.”
날카로운 내 대답에 헤이먼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발을 치우고 제 손으로 일기장을 들어 올렸다.
몇 페이지 대충 훑어보던 헤이먼은 아니나 다를까 그 고운 얼굴을 찌푸리며 내게 다시 내밀었다.
“……야한 소설을 쓰고는 싶은데, 다른 사람들한텐 들키기 싫어서 마법사를 고용해 마력을 걸었나 보지?”
“내가 그런 걸 왜 써!”
솔레아 씨, 미안해요. 야설을 보는 이미지뿐 아니라 야설을 쓰는 이미지까지 만들었어요.
“그래…….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으니 심심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다지 좋은 취미는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으면 베르고 가문을 뭐라고 보겠어.”
야설을 쓰는 날(물론 안 썼지만) 혼내는 것도 아니고, 놀리는 것도 아니었다. 헤이먼은 가문을 운운해 가며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베르고는 제르노아의 공신 가문이야. 그곳의 유일한 적자인 네가 이런 저급한 취미를 갖고 있다고 하면 우리 가문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어. 생각이 없는 거야?”
“내가 쓴 거 아니라니까. 귀에 석고 때려 박았어?”
헤이먼의 손에 들린 일기장을 뺏어 온 후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 전에도 솔레아한테 이딴 식으로 굴었어?”
“뭐?”
“가문의 위신 어쩌고 하면서 애를 쥐 잡듯이 했냐고.”
싸늘해진 내 말투에 헤이먼은 놀란 것처럼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위신, 체면 그게 너한텐 별거 아닐지 몰라도 나한테는 그게 전부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게 마법을 보여 주며 꽤 다정하게 굴었던 헤이먼의 성질머리가 과하게 날카롭게 바뀌어 있었다.
꼭 무언가에 뒤쫓기는 것처럼 초조한 낯이었다.
“공녀님은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있든, 방탕한 소설을 쓰며 마음껏 놀든 상관없겠지만 난 아니라고.”
문장의 끝으로 갈수록 한 음절, 한 음절 씹어뱉듯이 말하며 헤이먼은 나를 힘껏 노려봤다.
거 너무하네. 설령 진짜 야설을 썼다고 해도 그게 왜 방탕한 놀이야. 렘샤 부인 들으면 운다, 이 자식아.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난 헤이먼이 내 앞에 곧게 섰다. 그는 차갑게 식은 분홍색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덧붙였다.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공녀면 공녀답게 행동해.”
나는 헤이먼의 어깨를 밀치며 그를 지나쳤다.
“비켜. 너한테 도움을 받으려고 한 내가 등신이지. 건방지게 책을 밟는 놈이랑은 할 말 없…….”
……잠깐만, 책을 밟았다고?
그동안 나도 책을 고정시키기 위해 가장자리에 발을 올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장자리였다.
발로 가장자리에 글씨를 쓰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당연히 실패했다.
가운데 부분엔 발을 올릴 수조차 없었고 만년필을 발가락에 끼우면 발을 일기장 가까이 가져다 대는 것조차 아예 불가능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뒤에서 들려오는 헤이먼의 목소리가 천사의 타종처럼 느껴졌다. 저기가 천국으로 가는 문인가.
“헤이먼. 신발 벗어.”
“……뭐라고?”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일기장을 바닥에 내려놓고 헤이먼의 앞에 무릎을 대고 주저앉아 우리 사랑스러운 곤듀님의 발목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