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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192)

10화

그날은 하루 종일 온갖 간호를 받았다. 공작저에서 두 발로 걷는 인간이란 인간은 다 내 걱정을 하는 모양인지 다들 시도 때도 없이 걱정 어린 말을 해 댔다.

그레이는 아예 내 방에 죽치고 앉아 잔소리를 퍼부었다.

“파알구웁혀펴기이? 네 그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몸뚱이로 팔 굽혀 펴기? 돌았냐?”

“아파서 누워 있는 동생 옆에서 돌았냐고 하는 그 돌아 버린 주둥이 누구 거야?”

“그레이 거지. 힝. 솔레아는 그레이가 약 올려도 팔 하나 못 올리네. 그레이는 슬펑.”

“……죽었으면.”

팔 굽혀 펴기를 할 때 목에도 힘이 들어갔는지 뒷목까지 저려 오는 탓에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조차 없었다.

눈만 살짝 돌린 채 그레이에게 악담을 퍼붓자 그레이가 내 이마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였다.

“으이그. 멍청아. 운동하고 싶으면 날 부르지.”

어제 만년필이 때리고 간 그 자리였다.

“아! 미친놈아! 왜 때려!”

“누가 우리 딸 때렸니!”

아직 나랑 화해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새벽에 혼비백산하여 찾아온 베르고 공작은 내가 놀랄까 봐 의사를 불러 준 뒤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그러곤 돌아간 줄 알았는데 여태껏 복도에 계셨냐고요.

문밖에서 베르고 공작의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레이가 목소리를 높여 답했다.

“꿀밤 좀 먹였는데 얘가 엄살부린 거예요!”

“아픈 동생한테 꿀밤을 때리면 어떡하니! 그레이!”

“살짝 그냥, 손가락만 댔다니까요!”

“너 아빠가 너, 어? 동생한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어?”

“아니, 아빠!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가서 싸워.

문을 열지도 않은 채로 사춘기 아들과 아빠처럼 싸우는 모습을 옆에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니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레이도 답답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잠깐만. 나 아빠랑 싸우고 올 테니까 가만히 누워 있어.”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방을 가로지른 그레이는 문을 열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아빠 그럴 거면 그냥 들어오시라니까요. 그리고 솔레아가 지금 몸은 아프지만 입은 망나니라고요.”

“동생한테 망나니가 뭐냐, 망나니가. 내가 머리털 나고 우리 딸처럼 순한 애를 본 적이 없어!”

“순하다니! 쟤 완전 개망나니로 새로 태어났어요. 아빠도 기억 잃으셨어요?”

그레이 선수. 명불허전 그레이 새끼야답게 중간이 없는 드립으로 패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네요.

“이놈의 자식이 아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

기어코 꿀밤을 한 대 맞았는지 그레이가 소리를 질렀고, 환자의 방 앞에서 싸우는 게 영 거시기했는지 두 사람은 점점 내 방 앞에서 멀어졌다.

그래도 시끄럽게 떠들긴 매한가지였지만.

징하게도 싸우네.

저렇게 왁왁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것만 보면 그레이가 입양아인 걸 전혀 모를 수준이었다.

주변에서 함부로 떠드는 새끼들 다 공작저에서 하숙시켜야 돼. 저렇게 서로 격의도 없고, 그레이는 예절도 없는 걸 보면 입양아니, 뭐니 아무도 못 떠들 텐데.

난리 법석 속에서 앤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앤?”

“……아가씨께서 갑자기 또 아프신 원인이 뭘까 계속 생각했어요.”

불안하다.

저 흔들리는 눈동자.

앤은 조심스럽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무릎 위까지 올리자 하얀 속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원하시는 걸 제가 갖고 있어요.”

아니야, 없어.

나 고개도 못 돌리는데 이러지 마, 제발.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게 앞서 나가는 내 망상을 멈춘 건 앤의 치마 안 주머니에서 나온 책 한 권이었다.

“몸도 약하신 분이 밤새워서 책을 읽으시다가 몸살이 나신 거죠?”

“뭐?”

앤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3탄은 찾지 못해서…… 서점 주인에게 다른 걸 추천해 달라고 했어요. 앞으로는 아가씨 아프실 일 없게 제가 읽어 드릴게요.”

왜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리려고 하세요. 돌아가세요.

눈물이 앞을 가리는 충성심이었지만 사실 안 가려도 되는 충성심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고개도 도리도리 젓고 두 손도 흔들고, 온 사지 육신을 동원해서 싫다고 표현하고 싶었지만 지금 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내 혓바닥뿐이었다.

“아냐, 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괜찮아요, 아가씨.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제 동생도 이런 거 본대요!”

“아니야. 진짜 아니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방금 동생도 이런 거 본다고 했잖아.”

“같이 일하는 동료가 본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동생이 관련 책들을 파는 서점도 추천해 준 거고요. 오늘 아침에 외출해서 집에 잠깐 들렀거든요. 아무튼 아가씨, 서점 주인의 안목을 믿어 보세요!”

오른손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굳이 안 해도 될 각오를 다지는 앤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눈동자로 나름 최대한의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앤은 정말로 내가 부끄러워서 거절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불을 다시 가슴 위까지 덮어 주고는 다정히 말했다.

“괜찮아요, 아가씨. 편하게 들으세요. 이게 스토리도 은근히 재밌대요. 자, 제목. 공작 부인은 왜 마구간지기에게 소고기를 주었나.”

아, 제목 누가 붙였어.

“앤. 나 정말 듣고 싶지 않아. 괜찮다니까.”

“밤새워서 책을 읽으시니까 탈이 나시죠. 어제 늦도록 안 주무시는 소리가 들렸는걸요. 저만 믿으세요! 그레이 도련님 오시면 얼른 숨길게요!”

앤은 막무가내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공작 부인이 마구간지기에게 소고기를 준 이유가 장황하고 상세하게 쭉쭉 이어졌다.

그랬군요……. 상당히 핫한 마구간지기군요.

앤, 얘는 공작가에서 일하면서 공작 부인이 마구간지기랑 외도하는 책을 골라 오다니. 이 순수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거야.

공작 부인이 남들 몰래 마구간 뒤편 마른풀 사이에서 마구간지기와 뜨거운 만남을 가지는 구간을 빨개진 얼굴로 태연히 읽으려 노력하는 앤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다.

“앗, 재밌으세요? 취향에 맞으세요?”

“하……. 아냐, 계속해.”

앤은 빨개진 얼굴로 열심히 마구간지기의 대사를 읽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웃음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고작 나 따위가 뭐라고.

내가 뭔데 이 하녀는 내가 아픈 이유에 대해 계속 고민하다 저런 책을 서점에 가서 구해 오고, 그레이는 곁을 지키는 걸로도 모자라서 운동할 땐 자기를 부르라고 하고, 베르고 공작은 차마 방에도 들어오지 못한 채 저렇게 애지중지할까.

“……부럽다.”

“……부럽다고요?”

얼굴은 빨개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던 앤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사방팔방 날뛰었다.

“하지만 아가씨…….”

“아니야. 진짜 오해야. 이건 진짜 짚고 넘어가자. 아닙니다. 내가 기억을 잃었잖아? 어? 그치. 근데 솔레아가 지금 너무 사랑받고 있잖아. 온 가족들이 다 걱정을 하고? 그렇잖아. 그래서 지금 내가 어제 팔 굽혀 펴기를 과하게 해서 바보같이 근육통 때문에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다들 걱정하고 달래 주고 하니까 솔레아의 인생이. 어? 그 책 속의 공작 부인 말고 이 솔레아의 인생이 부럽다는 거지.”

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고작 팔 굽혀 펴기 좀 했다고 근육통이 오진 않겠지만, 아무튼 솔레아 아가씨가 사랑받는 건 당연하니까요. 늘 저희에게 웃어 주셨잖아요. 다정하셨고, 친절하셨고, 제가 다쳤을 때 누구보다 걱정해 주신 분이 아가씨였는걸요.”

고작 팔 굽혀 펴기 몇 번 해서 근육통이 온 사람. 그게 바로 저예요.

원래의 솔레아에게 너무 미안해진다.

죄송해요. 솔레아 씨가 쌓아 놓은 이미지를 제가 지금 때려 부수고 있어요. 야설 좋아하는 음습한 음지의 아가씨로 만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한참 책을 읽어 주던 앤은 그레이가 다시 돌아오자 얼른 책을 다시 치마폭 안으로 숨겼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수프를 들고 들어온 그레이는 앤에게 직접 먹일 테니 가서 쉬라고 말한 후 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으켜 앉혔다.

내 손으로 먹고 싶었지만 도저히 팔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레이가 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표정은 험악한 주제에 한없이 다정한 손길로 수프를 떠 후후 불어 준 그레이는 기어코 내게 수프 한 그릇을 다 먹인 후 말했다.

“너는 좀 아프지 마라.”

“너나 잘해.”

그레이와 아웅다웅 싸우다 보니 헤이먼이 머리털 하나 비치지 않은 게 생각났다.

“헤이먼은?”

내 물음에 그레이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법 어쩌구 수업만 받고 나면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서 자잖아. 굳이 그렇게 하면서까지 마법 수업을 받아야 하나 싶지만 굳이 받는다고 하니까 말리지도 못하겠고. 어휴, 둘 다 왜 그러냐.”

다 비운 수프 그릇을 치운 뒤에도 그레이는 방에서 나가지 않고 내게 이것저것 웃긴 이야기를 해 주며 시간을 보냈다.

“웃기지 마! 배 땡긴다고!”

“너한테는 딱 그 정도 운동이 알맞네. 운동도 순차적으로 해야지.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서 팔 굽혀 펴기를 해. 아오, 이걸 쥐어박지도 못하고.”

베르고 공작에게 혼나고 난 이후라서인지 그레이는 다시 꿀밤을 먹이거나 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나를 약 올렸다.

진짜 친오빠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나는 다음 날 수도에서 급하게 달려왔다는 의술사에게 치료를 받고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수 있었다.

“앤, 공작님이랑 같이 식사하고 싶어.”

“정말요? 공작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잠시만요!”

아침 단장을 돕던 앤은 머리 손질을 마무리하자마자 활짝 웃으며 공작에게 소식을 전하려 뛰어갔다.

방 밖에서 마르실라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앤!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몇 번이나.”

“아가씨께서 공작님이랑 같이 아침을 드신대요!”

“어머, 정말! 뛰어, 앤!”

“네!”

앤의 힘찬 발걸음 소리에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진짜 많이 사랑받는구나.

잠시 후, 정찬실로 가니 베르고 공작이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어제 새벽에 잠깐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진 거의 일주일이 넘게 그를 피했는데도 노여워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멀쩡히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이상한 사람.

“이제 몸은 괜찮니? 더 아픈 곳은 없고?”

“의술사까지 불러서 치료해 주셨잖아요. 죄송해요, 자꾸 아파서 헛돈이 나가네요.”

“헛돈……. 솔레아.”

공작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알아챘다.

아, 또 나도 모르게 솔레아를 깎아내렸구나.

공작은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거 아니?”

“네?”

“아빠는 돈이 아주 많단다.”

무슨 소리야. 긴장해 굳어 있다가 영문 모를 소리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베르고 공작을 바라보자 그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의술사 정도야 짐마차 가득 실어 나를 수도 있지. 그러니 돈 걱정은 하지 마라. 너는 네 걱정만 하렴. 착한 내 딸.”

“아……. 네.”

자꾸 목덜미가 뜨끈하다.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수프를 입 안으로 떠 넣었다.

식사를 마친 후 일이 많아 곧장 집무실로 가야 한다고 말한 공작은 내게 꽃을 한 송이 건넸다.

“이번에는 이 꽃이 핀 곳으로 가서 차를 마시는 게 어떻겠니. 의사가 아직까지는 정원을 걷는 정도의 운동만 하는 게 좋다고 하더구나.”

“……감사해요.”

공작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덮었다. 따듯한 온기를 머금은 그의 손바닥이 내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마음이 자꾸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내 가족도 아닌데 자꾸 이곳에 안주하고 싶어진다. 가만히 있어도 자꾸 웃음이 피어 나왔다.

차를 마시러 가기 위해 공작이 준 꽃을 들고 정원을 거닐다가 다른 꽃보다 이르게 피어난 장미 한 송이를 발견했다.

이거 가져다드리면 좋아하실까.

가시를 피해 장미 한 송이를 꺾은 뒤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살짝 열린 집무실 문틈 사이로 솔레아의 이름이 들려왔다.

“공작님. 페르난도 후작가 영윤과 솔레아 아가씨가 결혼만 하면 남부 곡창 지대의 소유권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제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들었던 결혼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애지중지 아낀다 싶더니. 그랬구나.

……어쩐지. 내 주제에 이런 행운이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손바닥에 가시가 파고드는 줄도 모른 채 장미를 움켜쥐었다가 그대로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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