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보라색 혹을 가리겠다며 분첩으로 열심히 얼굴을 두드리던 하녀들이 모두 나간 뒤 몇 분 지나지 않아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 셋이 들어왔다.
뒤로 자빠져도 귀족임을 알 수 있는 화려한 옷과 머리였다.
“세상에, 솔레아! 이게 무슨 일이야.”
“다리를 다쳤다고 하녀가 말해 주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몇 주 전부터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기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솔레아가 친구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는 그레이의 말과, 나중에 단장하러 들어온 하녀들이 죽을상을 지으며 ‘더 아프시면 안 되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라고 한 말을 들은 터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멀쩡한 반응이었다.
난 또, 괴롭힘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네.
솔레아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보다시피 몸은 아프지만 열이 나진 않아. 걱정해 줬다니 고마워.”
내가 아무리 돈에 돌아 버린 미친 사람이라도 생판 남의 몸에 들어온 마당에 당사자 인간관계까지 조지고 갈 순 없지.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는데 친구들은 당황한 것처럼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조용조용히 말하는 터라 뭐라고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사람을 면전에 두고 귓속말을 나누는 게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왜 사람을 앞에 두고 귓속말을 하지?”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중 가운데에 서 있는 여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진짜였구나. 말투가 확 달라졌어.”
“원래는 어땠는데?”
금발을 올려 묶은 가운데 여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상냥했지. 늘 우리에게 존대를 했잖니.”
“내가?”
“그래. 우리가 널 찾아올 때마다 거리를 두는 것처럼 말을 편히 하지 않아서 매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몰라. 기억을 잃어 우리를 모를 테니 소개부터 해야겠구나.”
금발이 서 있는 여자들을 흘긋 쳐다보자 한 명씩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호르비안 자작가의 셰릴이야. 넓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으니 언제든 놀러 와도 좋아. 네가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면 말이야.”
“케인 자작가의 줄리아라고 해. 노예 무역을 하고 있으니 언제든 필요하면 말해.”
이년 봐라?
……물론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니 노예 무역이 불법은 아닌 것 같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도덕에 기스가 나고 있었다.
내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보지 못했는지 침대에 앉은 금발 머리가 소개를 이어 갔다.
“나는 르밀리앙 리안드리고. 우리 백작가가 이 근방에서 가장 크게 직물업을 하는 거 알지? 아, 기억을 잃었으니 모르겠구나. 불쌍해서 어떡해.”
말을 마친 르밀리앙이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긴 했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가시가 돋친 말에 기분이 불편해진 솔레아는 잡힌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야.”
잡은 손을 휙 당기며 부르자 르밀리앙은 당황한 듯 잠깐 눈을 빠르게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지만 이내 그림처럼 미소 지었다.
“응, 솔레아.”
“근데 왜 지금이 더 불편해 보이지? 다시 존댓말 써 줘?”
솔레아의 말투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르밀리앙은 옆에 서 있는 다른 두 명의 영애를 보다가 다시 솔레아를 돌아보며 상냥히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지금이 훨씬 좋은걸. 우리는 친구잖아. 네가 매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도 우리는 늘 널 찾아왔는걸.”
이상했다.
앤의 말대로라면 파티도 한 번 나간 적 없고, 몸이 약해서 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는데 언제 이렇게 돈 많아 보이는 여자 셋을 친구로 사귄 걸까.
게다가 쓰러지기 전 그레이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평소에도 자주 쓰러졌던 거 같은데. 어떻게 얘네를 만난 거지. 이렇게 싸가지 없어 보이는 애들을.
솔레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자 르밀리앙의 옆에 서 있는 연한 갈색 머리가 입을 열었다.
“다리는 어쩌다가 그렇게 다친 거야?”
“그레이가 와서 박았어.”
사실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듣는 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놀라움보다는 혐오에 가까웠다. 침대 옆에 서 있는 진한 갈색 머리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레이라면 네 바로 위의 그?”
“응.”
“세상에나! 공작님께는 말씀드렸어?”
“뭐……. 누군가가 말했겠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사고였어.”
저도 모르게 그레이를 감싸는 말을 했다는 것에 묘한 기분을 느낄 때쯤, 르밀리앙이 솔레아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강건하게 말했다.
“그런 안일한 태도를 취하면 안 돼. 넌 이 집안의 소공작이잖아!”
“……위에 셋이나 있는데 왜 내가 소공작이야.”
“어머나.”
짧은 감탄을 뱉어 낸 갈색 머리 두 명은 이내 다시 둘이서 속닥거렸다. 솔레아가 짜증 섞인 얼굴로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니네 자꾸 둘이서 귓속말할 거면…….”
“레아.”
말을 끊어 먹은 금발 머리가 대단한 선의라도 베푸는 것처럼 따스하게 웃으며 솔레아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불쌍하게도. 아무도 네게 말해 주지 않았구나.”
“뭘.”
솔레아가 물었지만 금발 머리는 제 입으로 말하지 않고 또다시 옆에 선 다른 여자를 바라보며 슬쩍 눈치를 줬다.
그러자 진한 갈색 머리가 금발 머리의 표정을 따라 하는 것처럼 솔레아를 동정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집의 적자는 너뿐이야.”
솔레아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그걸 다른 신호로 알아챘는지 갈색 머리 옆에 선 여자가 재빨리 이어 말했다.
“위의 셋은 공작 부인이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하셔서 밖에 굴러다니는 거렁뱅이들을 데려온 거잖아. 출신부터가 다른데 어떻게 공작가를 이어받을 수 있겠어.”
“그래. 거기다 그레이라는 놈은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길바닥 거지 출신이잖아. 공작 부인께서도 참. 아무리 마음씨가 좋으셔도 그렇지. 어떻게 앵벌이나 하던 더러운 뒷골목 아이를 데려올 생각을 하셨는지 몰라. 그런 놈은 내 노예 상단에도 차고 넘치는데 말이야. 팔아 봤자 돈도 얼마 안 된다고.”
잡고 있는 솔레아의 손이 차갑게 식음과 동시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자 금발은 반대쪽 손을 뻗어 솔레아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저런. 솔레아. 많이 놀랐구나. 하지만 셰릴과 줄리아가 입이 험하긴 해도 다 널 아끼고, 네가 이 집에서 똑바로 살아가길 바라니까 저렇게 말하는 거야. 그리고 거짓말은 아니잖니. 그런데 전에 내가 말했던 건 생각해 봤어?”
“뭐?”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금발 머리가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쓸어 넘기고는 천천히 운을 뗐다.
“공작님께서 지금 놀리고 계신 땅이 있으니 우리 가문과 손을 잡자고 했잖아. 우리 리안드리고의 사업 수완이 좋으니 이익을 보는 건 금방일 테고, 네가 적자로서 이 집안에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그런데 너는 내가 이 저택에 올 때마다 그저 생각해 보겠다고만 하니, 나는 네가 너무 마음이 약한 게 아닌지 무척이나 걱정이 돼.”
“……그래?”
“가죽 공장에서 하루 종일 무두질을 하던 놈이라 그런지, 티온은 전쟁터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잖아. 그리고 마법사 밑에서 실험이나 당하던 들쥐 같은 둘째는 그 알량한 재주 덕분에 마법사로 벌어먹으며 네 아버지 옆에 찰싹 붙어 있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 너를 들이박은 그 무식한 거지가 네 호위 기사가 될 거라니. 네가 겁먹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돼.”
침대 옆에 서 있는 셰릴이 냉큼 말을 얹었다.
“공작님도 너무하시지! 네가 베르고의 소공작으로 불리는 걸 알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프도록 내버려 두시다니.”
“그 물 빠진 실험 들쥐가 혹시 마법으로 네 몸에 무슨 짓을 한 건 아니니? 네 방이나 몸에 걸린 저주는 없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잖아. 그것도 안 했지, 너?”
다그치는 것처럼 따지는 줄리아의 말까지 연달아 듣자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왜 이년들이 왔다 가면 솔레아가 풀이 죽어서 며칠을 앓았던 건지.
그 심약한 성격에 한번 제대로 받아치지도 못한 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이들을 돌려보냈겠지.
첫째라는 인간은 아직 만나 보지 못했고, 둘째 헤이먼은 쎄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내가 직접 판단할 일이야. 그레이는. ……그래 이 새끼건, 그래 저 새끼건 일단 나만 욕할 거야.
게다가 솔레아가 이 집의 적자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어차피 이 세계 사람이 아닌데.
르밀리앙을 바라보는 솔레아의 눈이 곱게 가늘어졌다. 바싹 마른 입술이 가로로 길게 늘어지며 입꼬리가 올라가자 핏기 없는 입술이 찢어져 피가 한 방울 새어 나왔다.
하얀 얼굴 위에 어렴풋이 보이는 시퍼런 멍과 진한 보라색 눈동자, 아래로 곱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칼과 그와 똑같은 색으로 맺힌 핏방울은 사람을 바짝 긴장시켰다.
솔레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르밀리앙에게 단조롭게 물었다.
“너 빡대가리야?”
“……뭐, 뭐? 잠깐만. 뭐라고?”
금발이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몸을 뒤로 옮기자마자 솔레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직 온몸이 쑤시지만 엿을 다발로 처먹은 것 같은 기분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는데 뭔 사업이고 개나발이야. 지금 이 상황에서 사업에 대해 생각해 봤냐고 묻는 게 말이 되냐. 나 방금 깼다. 이 똘빡아. 새대가리라서 10초에 한 번씩 말해 줘야 돼? 리안드리고 영애. 저 기억을 잃어서 하나도 몰라요. 그니까 사업이고 뭐고 사기 치려면 느그 집 바퀴벌레한테 가서 치세요.”
셋의 얼굴에 불쾌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줄리아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뭐라 쏘아붙이려는 찰나, 솔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지새끼들을 주웠건, 너희 같은 새대가리를 주웠건 그건 이 공작가에서 결정한 일이야. 그리고 니네 부모님은 너희를 낳은 김에 키우는 거지만 내 위의 셋은 선택받은 거란 생각 안 해 봤니? 하긴. 했겠냐. 그 머리로.”
침대로 한 발짝 다가서는 줄리아를 돌아보며 솔레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노예 무역 한댔나? 그럼 말해 봐. 머리통 돌아가는 게 느린 노예들은 제값에 못 팔 텐데 그럼 너희는 대체 어디서 선택을 받겠니. 팔리긴 할까?”
“이, 건방진……!”
줄리아가 손을 들어 솔레아의 뺨을 거세게 내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얼굴이 돌아감과 동시에 르밀리앙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계집애가 불쌍해서 말 상대 몇 번 해 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천박하게.”
르밀리앙의 말에 솔레아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여유 넘치는 솔레아의 시선에 르밀리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솔레아를 죽일 듯 노려봤다.
“하, 기억뿐 아니라 교양까지 잃었나 보네. 멍청한…….”
“그건 너희 얘기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이 계집애가 누구인지 잊었어?”
셰릴의 두 눈이 커다래지고, 르밀리앙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언제부터인가 빨개진 손바닥을 벌벌 떨고 있었다.
“너희 말대로 나, 베르고의 소공작이잖아.”
아랫입술을 베어 문 르밀리앙이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 댔다.
왼쪽 뺨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는데도 솔레아의 얼굴에 스민 독기는 한층 더해졌다.
“그래서 뻔질나게 드나든 거 아니야? 콩고물 떨어질 거 없나 찾는 거렁뱅이 새끼들처럼?”
르밀리앙이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솔레아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레이!”
여태껏 솔레아에게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쩌렁쩌렁한 발성에 놀란 르밀리앙이 문 쪽을 바라봤다가 다시 솔레아를 바라봤다.
비소를 머금은 솔레아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왜? 얼굴 보긴 부끄러워?”
얼마 지나지 않아 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벌컥 열리고 그레이가 들어왔다. 잔뜩 상기된 그의 얼굴은 빠르게 뛰어왔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솔레아는 영애들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그레이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헤이. 앵벌이 오빠.”
“……뭐?”
“오빠도 교양을 좀 갖춰. 동생이 불렀기로서니 숙녀 방문을 벌컥벌컥 열면 쓰나.”
침대를 둘러싼 셋이 바짝 굳은 상태로 서 있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그레이는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얼굴이 왜 이래. 이거 뭐야. 누가 이랬어.”
“얘네가 오빠가 어릴 때 앵벌이를 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희도 같은 짓 하러 온 거 아니냐고 했더니, 세상에. 교양머리 없이 뺨을 휘갈기네.”
처음 봤을 때부터 늘 생기 넘치던 그레이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레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이들 역시 살기를 느꼈는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저, 그레이 님. 그게 아니라.”
르밀리앙이 그레이에게 말을 걸자마자 그레이는 듣기 싫다는 듯 솔레아를 그대로 안아 올리곤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방 안을 가로질렀다.
문밖으로 나간 그레이는 복도에 서 있는 집사와 하녀들에게 명령했다.
“손님들 가시니 배웅해. 그리고 오늘 일은 내가 직접 공작님께 말씀드리지.”
“잠깐만요! 솔레아! 그런 뜻이 아니었잖아! 우리 얘길 좀 들어 봐! 솔레아!”
뒤에서 외치는 소리에도 솔레아는 태연하게 그레이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오빠 앵벌이를 좀 잘했나 봐? 소문이 여태 짱짱한 걸 보면.”
“오빠, 오빠 잘도 하네. 뺨은 복어처럼 부풀어선.”
“내가 복어보단 좀 낫지.”
그레이는 속상한 마음 어딘가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여태 만나 왔던 이들은 딱 두 부류였다. 잔뜩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거나, 앞에선 비위를 맞추고 뒤에선 조롱하는 이들.
평생 동안 남들이 세워 놓은 살얼음판 위에서 살아가는 기분이었는데.
웬걸, 기억을 잃은 동생이 그 살얼음판 위에서 썰매를 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