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92)

5화

멍한 눈으로 일기장을 넘기자 다른 내용들이 펼쳐졌다.

집에 보내 주세요. 토끼 같은 17억이 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요.

아니, 근데 저 회색 동태눈깔은 풀 네임이 그래 이 새끼야인가? 싹수가 웜톤이네. 나한테 원수졌나. 귀여운 척은 또 왜 해. 얼굴 좀만 덜 생겼어도 싸웠다.

분홍 머리는 왜 또 쎄하게 굴지.

쎄 이즈 사이언스라는 한국 고유의 정서가 아직 내게 남아 있는데. 얼굴값 하는 건가.

지윤이 솔레아의 몸에 들어온 뒤로 했던 생각들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맹세컨대 이런 곳에 와서 글을 쓴 적은 없었다.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이 서재에는 처음 들어와 보는데.

심지어 글을 안다는 사실조차도 방금 디에르고 공작이 내민 명단을 읽고 나서야 알았는데 이런 걸 썼을 리 없었다.

일기장을 읽는 솔레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설마 미래의 일도 적혀 있나?”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지만 뒷장은 백지 상태였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잡아 맨 뒤에서부터 촤르륵 넘겨 봤지만 모두 빈 종이였다. 그때,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검은색의 펜이었다.

“이게 뭐지?”

설마 이 펜으로만 이 종이 위에 글씨를 쓸 수 있는 건가. 그럼 여기다가 미래의 일을 쓰면 돌아갈 수 있나?

솔레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펜을 들고 종이 위에 갖다 댔다. 쓸 문구는 단 하나였다.

‘17억 로또 종이를 들고 무사히 원래 살던 세계로 귀환.’

펜촉이 종이에 닿으려는 찰나, 어떤 힘이 펜촉을 밀어 내는 것처럼 점 하나조차 찍을 수 없었다.

같은 극의 자석끼리 서로를 밀어 내는 것 같은 힘이었다.

솔레아는 일기장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두 손으로 펜을 잡았다. 소중한 로또 종이는 소매 사이에 잠깐 넣어 놓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심기일전하고서 흡, 하는 소리와 함께 펜을 종이에 갖다 댔다.

“……으으, 아……. 좀, 제발……!”

끙끙거리며 온몸의 체중을 펜에 실어 종이 위에 잉크 방울이라도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절대 닿지 않았다.

“썅!”

땀이 흐를 정도로 힘을 줬지만 소용없었다. 화가 나 펜을 집어 던지자 검은 펜은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 아무리 화나도 펜을 던지면 안 되지. 지금 이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저 망할 펜뿐인데.

그거 조금 힘썼다고 손가락이 저릿했다. 게다가 어깨부터 팔까지 근육이 찢기기라도 한 듯 고통스러웠다.

누가 보면 팔 굽혀 펴기 50개는 한 줄 알겠네.

솔레아는 무릎걸음으로 절절 기어가 다시 펜을 주웠다.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펜을 일기장에 끼운 뒤 솔레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가 사이를 빠져나와 책상 쪽으로 다가간 솔레아는 책상 위에 있는 많은 펜들을 일기장에 갖다 대려고 노력했지만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펜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말았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17억 거저는 주기 싫다는 거지. 염병할 세상. 공짜는 없다 이건가.

솔레아는 잔뜩 화난 표정으로 일기장과 검은 펜을 챙겨 서재에서 나갔다.

서재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가 안 보이셔요!”

“앤! 아가씨가 공작님과 대화를 마치신 뒤 방에서 나오셨을 때 곁에 없었어?”

“잠깐, 진짜 잠깐 화장실에 갔다 왔어요!”

앤과 다른 하녀들의 목소리 사이로 썩 반갑지 않은 말소리도 들렸는데, 뛰어왔는지 숨이 썩 고르지 않았다.

“걔 또 어디서 쓰러진 거 아냐? 뒤뜰 정원 찾아봤어?”

“네, 도련님. 제가 꼼꼼히…….”

“내가 다시 가 볼게.”

세찬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른 그레이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솔레아와 부딪쳤다.

“악!”

“와, 깜짝이야!”

여기 있어요, 라고 말하려 했다. 이 들소 같은 놈이 갑자기 들이받지만 않았어도.

달리던 그레이가 뻗은 발에 다리를 걷어차임과 동시에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들이박은 솔레아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이, 동태눈깔 새…….”

욕을 끝까지 하지도 못하고 솔레아는 기절했다.

눈을 뜨기 전, 솔레아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집이어라. 반지하라고 욕 안 할게요. 17억만 고스란히 돌려주시면 진짜 얌전히 착하게 잘 살겠습니다. 이제 진짜 다시는 인생 저주 안 하고 주어진 17억에 감사하며 남은 삶을 겸허히 짜릿하게 살아 보겠습니다. 제발. 진짜 제발이요.

저도 모르게 입 모양으로 제발, 제발이라고 빌었는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깼냐?”

다분히 짜증 섞인 말투에 솔레아는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째려봤다.

“얻다 대고 짜증을 내? 지금 네가 나를, 악!”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통에 솔레아는 그대로 다시 뒤로 쓰러졌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으려던 찰나 창가 쪽에 서 있던 그레이가 재빠르게 다가와 솔레아의 머리를 손으로 받쳤다.

“괜찮아? 너 다리 부러졌어.”

“뭐?”

“……다리가, 부러졌어.”

다리의 고통은 그래서라고 쳐도, 그레이가 받치고 있는 머리도 아팠고, 배, 가슴, 어깨,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마치 누가 두들겨 팬 것 같았다.

솔레아는 싸늘한 목소리로 그레이에게 말했다.

“너 나 때렸어?”

“아냐!”

깜짝 놀란 그레이가 머리를 내던지듯 내려놓는 바람에 솔레아는 다시 침대에 내팽개쳐졌다.

“악! 이 망할 놈아!”

“내가 널 왜 때려!”

“그럼 왜 온몸이 이렇게 아픈 건데!”

이놈이 먼저 막 편하게 굴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그레이에게는 쉽게 막말이 나왔다. 솔레아가 분에 찬 목소리로 따지자 불퉁한 표정으로 솔레아를 보던 그레이가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네가 약해서 그렇지, 뭐.”

“뭐, 인마?”

“인마?”

“그래, 인마!”

보호자는 없고, 가진 것 빚뿐인 젊은이가 대한민국에서 먹고살려면 얼마나 독해져야 하는지 넌 모를 거다. 이 금수저 동태눈깔 새끼.

솔레아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눈을 어따 두고 다니는 거야! 보험사 불러!”

“보, 어?”

“……벼, 병원!”

“의사가 왔다 갔어. 다리를 고정시켜 뒀으니까 그만 움직여. 네가 워낙 약해서 나랑 부딪쳤을 때 보통 사람보다 더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다더라. 다른 곳은 며칠 쉬면 낫겠지만 다리는 마력 없이 나으려면 적어도 두 달은 안정을 취해야 할 거야.”

“두 달?”

로또 당첨금 수령 기간은 1년이다. 하루하루가 귀한 와중에 두 달이나 버려야 한다니.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동안 지나간 시간은 누가 보상해 주는데?

충격받은 솔레아가 입을 크게 벌린 채 가만히 있자 그레이는 잠시 뻘쭘하게 서 있다가 탁자 위에 있던 얇은 책 한 권을 들고 솔레아에게 다가왔다.

“……서재에 갈 거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지. 이 저택 사람들이 다 너만 보는 거 알면서, 왜 그랬냐. ……인마.”

저 쪼잔한 회색 동태눈깔 새끼.

속으로 이를 간 솔레아는 손을 내밀어 일기장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일기장을 솔레아에게 내밀던 그레이가 다시 휙 제 쪽으로 가져갔다.

“이게 그렇게 중요해? 품에 안고 오느라 내 발자국 소리도 못 들을 만큼?”

“중요……하지. 그리고 네 발자국 소리 들었어. 네가 소 떼같이 뛰어와서 거리를 가늠 못 했을 뿐이야.”

일기장의 내용을 봤냐고 물으려던 솔레아의 눈에 새빨개진 그레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표정이 왜 그래?”

그레이는 빨개진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너도 이제, 어, 어른이고, 음, 알겠는데. 그런, 그런 걸 찾아보는 건, 아니. 서재에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게 무슨.”

솔레아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그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녀들 보기 민망할까 봐 일단 내가 숨겨서 들고 오긴 했는데 너무 자주 보진 마라.”

“이, 이게 뭘로 보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반응이 이상했다.

일기장 속 내용을 봤다면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아무리 단세포라도 ‘여기 일기장 속에 있는 회색 동태눈깔이 내 얘기냐?’ 하고 따져야 한다.

솔레아의 질문에 그레이는 얼굴로도 모자라 일기장을 들고 있는 손가락 끝까지 빨개졌다.

“……렘샤 부인의 은밀한 사정, 이잖아.”

“음?”

그레이는 차마 솔레아를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좌우로 왔다 갔다 굴리며 최선을 다해 시선을 피했다.

“이해해. 그럴 수 있지. 하루 종일 저택에 있으니까 이런, 그런…… 책을, 그래. 호기심이 생길 수도 있지. 괜찮아.”

“잠, 잠깐만. 읽어 봐. 그런 내용이야?”

“뭘 모른 척하고 있어! 야!”

“아니, 읽어 보라니까!”

“이, 이걸? 이걸 읽어? 지금? 여기서? 네 앞에서?”

책을 내민 후로 내내 몸을 반쯤 돌리고 있던 그레이가 화들짝 놀라며 솔레아를 향해 똑바로 섰다.

“미안해! 내가 처박아서 미안하다! 야! 그, 그렇다고 이런 것까지 시킬 필요는 없잖아!”

“읽어 보라니까!”

솔레아가 진심으로 소리 지르는 모습을 처음 본 그레이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솔레아의 이마에 난 커다란 보라색 혹과 뒤통수에 대고 있는, 마력으로 온도를 조절 중인 아이스 팩이 죄책감을 더욱 자극했다.

“알, 알았어. 너 어디 가서 내가 이딴 거 읽었다고 말하고 다니지 마라.”

“아, 좀.”

“……진짜 말하지 마.”

“알았다고!”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책장을 넘겨 보던 그레이는 솔레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어디부터 읽어 줄까.”

아오, 답답한 새끼. 솔레아가 꿰뚫을 것처럼 째려보자 그레이가 황급히 이어 말했다.

“아니, 네가 아파서 못 읽으니까 내가 대신 읽어 주는 거잖아. 그, 그러면 어디부터 읽어 줘야 하는지 말을 해 줘야 알지. 뭐, 아, 아무 데나 펼치고 읽을까. 그러지. 뭐.”

그레이는 애써 태연하고 대범한 척하며 책장을 펼쳤다. 이어 ‘윽.’ 하는 짧은 신음을 내뱉은 그는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음란 서적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렘샤 부인의 잇새로 신음이 터, 터져 나왔다. ……계속 읽어?”

솔레아가 대답 없이 째려보자 그레이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다시 고쳐 잡더니 시뻘게진 눈가를 찡그리며 커다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부인. 너무 급하신 게 아닙니까. 낮게 울리는 에라스토의 낮은 신음을 들은 렘샤는 작게 웃었다. 후훗. 그러곤 그의 들뜬 숨을 집어삼키듯 뜨겁게 키스했다.”

“진짜로 그렇게 쓰여 있어?”

“아, 진짜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한 그레이가 책을 침대 옆 탁자에 내던지듯 내려놓고는 도망치듯 멀어졌다.

“이걸 어떻게 읽냐! 안 해! 안 읽어! 다 나으면 네가 읽어! 혼자 읽어! 이제 싫어! 이 미친놈아!”

“미친놈이라니! 내가 동생이라며!”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뭔 동생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그레이가 방문을 향해 다가가려는데,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는 놀란 고라니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더니 광속으로 되돌아와 책을 냉큼 서랍 제일 아래 칸에 쑤셔 넣고는 태연히 말했다.

“들어와.”

“누가 보면 네 방인 줄 알겠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앤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가씨의 친구분들께서 병문안을 오셨습니다. 열병이 가라앉았다는 소식만 듣고 오셨기에 다리를 다치신 건 모르십니다. 어쩔까요, 아가씨? 만나 뵐 수 있으시겠어요?”

이마에 커다란 혹을 단 솔레아는 또 3인칭을 쓰며 경악했다.

“솔레아가 친구도 있어?”

그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앤에게 말했다.

“얼굴에 있는 상처를 대충 가린 후에 불러. 솔레아는 친구가 찾아오면 거절하지 못했으니까. ……뭐,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앤에게 명령한 그레이는 솔레아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레이는 갈게. 솔레아는 친구들 만날 때 그레이가 같이 있으면 안 좋아했거든.”

“솔레아가?”

아직도 이상한 걸 못 알아채고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른 솔레아에게 그레이는 아까보다는 유하게 웃어 보였다. 어쩐지 조금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여전히 장난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친구들이 괴롭히면 오빠 불러.”

“오빠 같은 소리 하네.”

“그러게. 오빠 같은 소리를 한다, 내가.”

그레이가 나가자 앤이 다른 하녀들과 함께 재빠르게 들어와 누워 있는 솔레아의 얼굴을 단장했다.

대체 어떤 친구들이기에 이런 때에도 만나야 되는 거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