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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192)

4화

밍밍한 수프를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솔레아를 그레이가 유심히 관찰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내가 너한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띠껍게 말을 뱉어 낸 솔레아가 뒤돌아 정찬실을 나가자 그레이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진짜 남매 같네.”

* * *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정찬실을 나가자마자 하녀장 마르실라가 다가와 솔레아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옛날부터 이 말이 이해가 안 됐어.

공작님이 나를 찾으면 그쪽이 나를 찾아와야 하는 거 아닌가. 상식적으로?

공작님이 나를 찾는데 내가 그쪽을 찾아가야 한다고? 이 무슨 귀족적 사고방식이야.

목마른 놈이 우물 파야지. 딱 보니까 내가 지금 병약 공녀 같은데 왜 딸을 오라 가라야. 정정하신 아버지가 저를 찾아오세요. 당신 머리가 셌지, 관절이 셌냐고요.

내가 원래 상도덕은 지키는 사람인데 낯선 곳에 와서인지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가 않네.

“왔구나, 솔레아. 몸은 어떠니. 식사가 끝난 뒤 천천히 불러도 된다고 했는데 아이들이 요란을 떨었나 보구나.”

디에르고 공작은 부드러운 미소로 솔레아를 맞이했다.

“아……. 아니요, 요란이랄 것도 없는데요. 뭐.”

몸이 여간 약한 게 아닌지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에도 괜히 지쳐 짜증이 돋았는데 신수 훤한 중년이 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 걸 보니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솔레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얌전히 의자에 앉았지만 공작은 솔레아를 불러 놓고도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 중늙은이가 조금만 덜 친절하고, 조금만 덜 생겼어도 일어나서 나갔을 텐데.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던 터라 지윤은 남들보다 조금, 아주 약간 거친 면이 있었다.

“저, 왜 부르셨는지…….”

결국 참지 못하고 솔레아가 먼저 운을 떼자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공작령 안에 있는 이들의 명단이다. 혹시 네가 찾는 사람이 이 중에 있니?”

디에르고 공작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든 솔레아는 낯선 문자들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분명히 처음 보는 글자들인데도 자연스럽게 읽혀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십수 장의 종이 다발에는 모두 낯선 이들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쉬르치앙 돈/27세/아내와 사별 후 혼자 살고 있음. 농민.’

‘시칠리온 엠바 던/18세/여자 친구는 있다고 하나 난봉꾼이라는 소문이 돔.’

‘내르난 내 돈/31세/결혼하여 가정을 이뤘음. 1남 1녀. 성실하다는 이웃들의 평가.’

‘돈/20세∼25세 사이/노예. 몸에 생채기는 많으나 훌륭.’

‘노아 던/16세/사창가 일꾼/굉장한 미남. 장사 수완이 특출남.’

‘돈 내르주앙/22세/몰락 귀족의 사생아. 현재 자택에서 혼자 지냄.’

·

·

·

이게 다 뭐야.

솔레아의 머릿속에 첫날 들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그레이가 말했었지.

‘아프다고 누워 있을 땐 언제고 네 결혼 얘기를 나눈다니 튀어나와서 한다는 말이, 뭐? 그만두겠습니다? 이 결혼이 네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인 거 같아?’

설마 이 사람들 전부와 선이라도 보라는 건가?

하지만 그런 목적으로 이 명단을 가져왔다고 보긴 어려웠다. 일단 후보가 너무 많았다. 이 미중년이 말하는 걸 봐서는 딸을 꽤나 아끼는 듯한데 이렇게 닥치는 대로 선을 보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이랬다가는 딸 집 나가요. 아저씨.

그리고 결정적으로 명단 속 남자들이 천차만별이었다.

유부남에 난봉꾼에, 사생아, 노예는 또 뭐야?

‘굉장한 미남’은 왜 써 놨어? 그게 중요해? 몸에 생채기는 많으나 훌륭? 뭐가 훌륭하다는 건데.

대체 목적이 뭐길래 이걸 준 거지.

솔레아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자 공작은 안절부절못하며 얼른 말을 이었다.

“네가 찾는 사람이 없니? 어쩌면 ‘돈’이라는 이름이 가명일 수도 있겠구나. 내가 그것까진 생각을 못 했다. 네가 계속 돈을 찾으며 부르짖길래…….”

“아.”

그제야 이해가 갔다.

이 병약한 공녀가 몰래 불같은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기억을 상실한 거라고 생각하시는구나. 워낙 돈, 돈 외치며 발버둥을 쳤으니.

쉬르치앙, 시칠리온. 그 와중에 17억과 비슷한 발음까지 잘도 찾아오셨다.

심각한 낯으로 눈치를 살피는 디에르고 공작을 힐긋 본 솔레아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로또 종이를 쥐고 있는 왼손을 들어 입가를 가린 뒤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돈’ 명단을 내려놓자 공작은 눈썹을 팔자로 휘며 실망했다.

“……역시 이름만으론 정보가 부족했지? 그림이라도 그려 오라 할까? 그러면 알아볼 수 있겠니?”

침통한 표정으로 얕게 한숨을 내쉰 공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사랑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니까. 네가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데려오마.”

“너무 누구라도 상관없으신 거 아닌가요. 여기 노예도 있잖아요. 아니, 그리고 이게 뭐야. 사창가 일꾼도 있다고요. 유부남이면 또 어쩔 건데.”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에 과장되게 말하자 디에르고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커다란 주먹에 불끈 힘줄이 솟았다. 젊은 시절 전장에서 이름깨나 날렸다는 건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디에르고 공작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젊을 때니까, 뭐. 그래. 그럴 수도……. 너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작저에서 보냈으니…… 뭘 몰랐을 테니까. 그래도 순진한 네가……. 아니, 저택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 줄 알았더니 언제, ……그래. 나도 젊었을 때는. 아니, 그래도…….”

문장 하나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이 말 저 말 주절거리던 공작은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내 뭐라고 했니! 아비와 오라비들이 잘나서 네가 얼굴 보는 눈만 높아졌을 테니, 사람을 만날 때는 인성을 최우선으로 보라 하지 않았어!”

“아니, 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태어난 순간부터 나와 네 오라비들이랑 지냈으니까 어지간히 안목이 높겠니, 네가! 적어도 멀쩡한 놈을 골랐어야지! 어떻게 죄다 난봉꾼에 노예에 사생아에, 유부남은 또 왜 있어!”

“누군 줄 알고 목소리를 높이세요!”

“누군데! 노예면, ……노예면 인사만 시키고 도로 팔아 버릴 게다!”

“유부남이면!”

“유부남이면 네가 포기해야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질색을 하며 자리에서 튀어 오르는 공작을 보고 있자니 시트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장난기 가득한 분위기에 솔레아는 웃음이 터져 그만 깔깔 웃고 말았다.

신비로운 자색 눈동자를 곱게 휘며 붉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질 정도로 웃는 솔레아의 모습은 전에 없이 밝아 보였다.

공작은 죽은 제 아내를 쏙 빼닮은 솔레아를 멍하니 보다가 이내 재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내 딸이 어디에서 웃음을 터뜨렸더라. 설마.

“……유부, 유부남이냐?”

“아니요.”

단번에 아니라고 대답한 솔레아 덕분에 디에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젓는 솔레아를 본 공작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명단을 집어 들고 진지한 눈으로 한 장씩 읽어 보다가 다시 내려놓곤 그 어느 때보다도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사창가는 안 된다.”

“명단엔 이름이 있던데요.”

“인사를 시켰다간 또 어떻게 널 꼬여 낼지 모른다. 그걸로 먹고사는 놈이 아니니. 이 저택 밖은 네 생각보다 험하단다.”

“그렇겠죠.”

“그놈은 너를 돈으로 보는 거야.”

“나도 돈을 찾고 있는데.”

솔레아의 말에 공작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명단을 흘깃 내려다봤다.

진짜 돈이라면 부족함 없이 키웠으니 필시 사람 ‘돈’일 텐데.

기억을 상실한 솔레아가 ‘돈’을 그렇게 찾는 걸 보면서 모든 기억을 잃어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만은 생생한 거라 판단했다.

기억을 되찾는 데에 도움이 될까 싶어 딸이 애타게 찾는 ‘돈’이란 돈들은 모조리 찾아 갖다줬더니 사랑의 불씨를 지핀 건가.

자신 역시 젊은 시절엔 부인 없는 인생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제 딸인 이 아이도 당연히 그렇겠지. 솔레아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러니 용납할 수 없는 놈이라 하더라도 한 번 정도 인사를 받아 줄 의향은 있었다.

……그래도 어지간한 놈이었으면 좋으련만.

공작의 보랏빛 눈이 미미하게 아래로 처졌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한동안 고민하던 공작은 잠시 후에 긴 숨을 천천히 뱉어 내더니 결심한 듯 단단하게 말했다.

“각오가 됐다. 이제 말해 다오. 너를 슬프게 한 정인이 누구니.”

솔레아는 웃음기를 거두고 담백하게 말했다.

“없어요.”

“응?”

“없어요. 기억도 없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진짜 솔레아가 누군가를 좋아했다면 몰라도.

하지만 하녀들의 태도나 평소에 미안해 죽겠단 눈으로 쥐 죽은 듯 다녔다는 그레이의 말로 봐선 솔레아는 심약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런 성격에 간 크게 저택을 몰래 빠져나가서 불같은 사랑을 했을 리가 없지.

솔레아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디에르고 공작은 그제야 안심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며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구나. 멀쩡한 놈이 하나는 있을 줄 알았는데 죄다 하자가 있는 것들뿐이라 걱정을 많이 했단다.”

“저도 하자가 있는걸요.”

“너한테 무슨 하자가 있니. 몸 아픈 거야 차차 좋아질 텐데.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너는 내 딸이야. 아빠 앞에서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다오. 마음이 아프구나.”

솔레아는 빙긋이 웃었다.

진짜 아빠는 저런 말을 하는구나. 딸 입에서 모자란다는 말을 듣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게 아빠구나.

“……솔레아를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다.

스스로를 남처럼 칭하는 말에 공작은 놀란 눈으로 앞에 앉은 제 딸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파리하게 질린 흰 낯으로 순하게 미소 짓던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기억을 잃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게 더 어울릴 법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그 말을 뱉는 솔레아의 표정이 유난히도 쓸쓸해 보였다. 꼭 버려진 아이처럼.

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졌다.

디에르고는 그런 솔레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유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널 항상 사랑한단다.”

솔레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만 가 볼게요. 아직 몸이 안 좋아서.”

“그래, 그러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디에르고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이 중에 없는 게 아니라 진짜로 없는 거지? 레아. 나중에 아빠 뒷목 잡게 하면 안 된다.”

문 앞에 선 솔레아는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려 대답한 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명단엔 남자밖에 없었잖아요.”

가볍게 장난을 치려던 디에르고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잠깐만. 뭐, 뭐라고? 솔레아! 레아, 다시 와 보렴! 레아! 남자가 아니면? 남자가 아니면!”

뒤에서 울리는 공작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솔레아는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아직 저택의 구조를 잘 모르지만 공작과 더 같이 있었다간 전부 다 실토하게 될 것 같았다.

당신의 솔레아는 없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고.

……내게 당신 같은 아버지는 없다고.

앤의 말에 의하면 솔레아는 며칠 전부터 열이 펄펄 끓어올라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도 간간이 앓긴 했으나 그렇게 상태가 심각한 건 어릴 때 이후 처음이라 온 저택이 비상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잠이 든 것처럼 숨소리가 고요히 잦아들어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 보았지만 숨을 쉬는 건지 안 쉬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콧바람이 약했다고 했다.

‘숨을 쉬고 있었어?’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의사를 부르러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아가씨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정찬실로 뛰어가셨잖아요.’

‘아.’

그때는 이미 지윤이 솔레아의 몸으로 들어온 이후였다.

……원래의 솔레아는 어떻게 된 거지?

지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공작의 방이 있는 쪽으로 뒤돌아섰다.

불쌍한 사람.

“솔레아! 깬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돌아다녀, 몸도 안 좋은 게!”

그레이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자 솔레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앞의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갔다.

오래된 책 냄새가 풍겨 오는 서재였다. 책의 양만 보면 도서관에 가까웠지만.

솔레아는 뭔가에 홀린 듯 서가 근처를 걷다가 무심코 진한 붉은색의 책을 뽑아 펼쳐 들었다. 책 속에는 방금 쓰인 듯한 유려한 글씨체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회사로 들어가는 문을 연 줄 알았더니, 차원의 문이었나 보다. 왜 이런 판타지 세상으로 온 거지. 내 17억은 어떡하냐고.

……뭐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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