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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192)

3화

저절로 밥맛이 뚝 떨어지네. 

내가 회사 가기 싫다고 좀 투덜거렸기로서니 사람을 이런 곳에 떨구다니.

아니, 다른 때면 몰라. 17억을 눈앞에 두고 은행 하나 없는 곳으로 온다는 게 말이 되냐고.

집에 보내 주세요.

토끼 같은 17억이 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요.

솔레아는 침대에 모로 누운 채 창밖을 보며 한숨만 푹 내쉬었다. 앤은 솔레아가 한숨을 쉴 때마다 눈치를 살피며 뭔가를 내밀었다.

“아가씨. 뭐라도 좀 드세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잖아요. 몸도 약하신데.”

“대체 몸이 얼마나 약하길래.”

조용히 혼자 읊조리는 솔레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건지 앤이 ‘예?’ 하고 되물었지만 솔레아는 못 들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약하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머리가 핑 돌더니 눈앞이 금세 깜깜해졌다.

“……이런 쿠키 말고. 밥은 없어?”

소리 몇 번 질렀다고 벌써 목이 쉬어 버려 칼칼하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울상이 된 앤이 쟁반에 받친 찻잔을 좀 더 솔레아 쪽으로 밀어 주며 정중히 말했다.

“식사를 가져올까요?”

“쌀밥……. 아니, 됐어. 직접 가서 볼게. 부엌이 어디지?”

침대 기둥을 짚고 침대에서 내려온 솔레아는 손에 쥐고 있는 종이를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선 쓸모도 없다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17억을 몸에서 떼어 놓을 순 없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자그마치 17억이다.

여기 오기 전에도 손에 쥐고 있었으니 들고 온 게 아닌가.

솔레아는 속으로 17억, 17억을 되뇌며 종이를 두 번 접어 왼손에 꼭 말아 쥐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뒤따라온 앤이 솔레아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부엌까지 직접 가시게요?”

“예. 아니, 응.”

“부엌은 너무 정신이 없으니까 정찬실로 모실게요. 그리고 말씀 편히 하세요.”

“그러기엔 제 정신이 온전치 못하네요. 일단 알았어.”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데 나는 원래 알거지라 이건가. 17억으로 사람을 들뜨게 해 놓고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이런 이상한 판타지 세상에 날 처박아?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간다.

솔레아가 빌어먹을 운명에 대해 속으로 쌍욕을 퍼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충실한 하녀 앤은 눈물을 삼켰다.

‘아가씨가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니까 내가 더 열심히 보필해 드려야지!’

정찬실로 가는 동안 마주친 시종과 하인들은 솔레아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식의 꾸밈없이 맑은 웃음에 면역이 없는 솔레아는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대충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그러자 옆에서 부축하던 앤이 조용히 속삭였다.

“아가씨. 고개를 숙이실 필요는 없으세요. 평소처럼 미소만 지으셔도 돼요.”

“그게 더 어려워.”

미소 짓는 게 얼마나 힘든데.

취업 시장에서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처럼 올라갔다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갔다 미끄러지길 반복할 때 면접관 앞에서 웃는 게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때마다 지윤은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곤 했다.

‘앞에 앉은 놈들 저거 다 가발. 비바람 불면 다 날아감.’

‘쟤네 발톱 깎을 때 머리에 피 쏠려서 오른발 깎고 난 뒤 10분 쉬어야 됨.’

온갖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때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이 몰려오는 순간이면, 가운데에 앉은 늙은이의 가발이 비바람에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제목은 ‘가발 타고 날아온 메리 가발피스.’

그딴 상상을 하고 있으면 굉장히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

딱 한 번, 참지 못하고 쿠흡풉! 하고 웃는 바람에 면접장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 쫓겨나다시피 나온 적도 있었지만 긴장해서 호달달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직한 이후로는 더 이상 면접을 보지 않게 되어 그 방법을 안 쓴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렇게 옛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차에 셋째 놈과 마주쳤다.

그래 이 새끼야를 줄인 그레이.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이름을 외운 놈이었다.

솔레아를 발견한 그레이가 반갑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걸어 다닐 힘은 있나 보네?”

“앤. 이 사람은 원래 말을 이렇게 하니?”

그레이의 말을 무시하고 앤에게 묻자 잔뜩 당황한 눈으로 그레이와 솔레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앤이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가씨…….”

딱히 앤의 대답을 들으려 한 건 아니었기에 솔레아는 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뒤로하고 앞서 걸었다. 그레이를 지나치려는 찰나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걸며 팔뚝을 잡아 멈춰 세웠다.

“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솔레아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뿌리치고 노려봤지만 그레이는 그런 눈빛 따윈 아랑곳 않고 뿌리쳐진 제 손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야, 왜 더 말랐어.”

솔레아가 평소에 이놈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지만 지윤은 솔레아가 아니었다. 지윤은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함부로 손대지 마.”

그레이의 회색 눈동자를 담은 커다란 눈이 잠깐 동그랗게 뜨이더니 이내 곱게 휘어졌다.

“진작 그렇게 반응하지. 평소엔 미안해 죽겠단 눈을 하고 쥐 죽은 듯 지나다니더니. 진짜로 기억이 안 나긴 안 나나 봐?”

그레이가 웃음을 머금은 채 이죽거렸다.

“아가씨. 아무리 아프셔도 끼니는 챙겨 드셔야죠. 귀하신 몸인데.”

“네가 알 바 아니잖아.”

“제가 왜 상관이 없습니까. 아가씨의 호위 기사가 될 몸인데.”

호위 기사라니. 이 쓰레기가 내 호위 기사가 된다고?

기 싸움을 하던 중이었음에도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라 솔레아는 눈살을 찌푸린 채 앤을 돌아봤다.

“솔레아 주변에 인물이 그렇게 없어? 이딴 놈을 붙이게?”

지윤에게 ‘솔레아’는 완전한 타인이었지만 남들 눈에는 아니었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했다는 걸 모른 채 여전히 멘붕에 빠져 있는 솔레아는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레이가 입을 틀어막고 웃는 걸 보지 못한 솔레아는 완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저딴 한량 양아치 새끼가 내 호위 기사가 된다니. 말도 안 돼. 호위를 받긴 뭘 받아. 저놈 칼에 찔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때 상념을 깨뜨리듯 그레이가 장난을 걸어왔다. 아까의 딱딱한 얼굴은 어디로 치웠는지 능청스러운 표정이었다.

“듣는 이딴 놈 섭섭하네. 솔레아는 그레이 싫어?”

“뭐?”

질색하는 솔레아의 반응을 보고 이거다 싶었는지 그레이는 더욱 징그럽게 솔레아를 따라 했다.

“그레이는 들었는데. 아까 네가 그랬잖아. ‘솔레아 주변에 인물이 그렇게 없어? 이딴 놈을 붙이게?’라고. 다 찢어져 갈라진 그 목소리로.”

그제야 제 실수를 알아차린 솔레아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그레이를 지나쳐 걸었다.

“솔레아는 이딴 놈 싫겠지만 그레이는 솔레아 호위 기사 해야 하거든.”

“따라오지 마.”

“솔레아 배고프겠네. 그레이가 챙겨 줘?”

“시끄러워.”

“솔레아는 기름진 거 못 먹으니까, 솔레아는 부드러운 거 먹어!”

“닥쳐!”

“솔레아는 화났어!”

“닥치라고 했지!”

“그레이는 솔레아가 소리 지르는 거 처음 들어 보네!”

결국 그레이의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는데도, 뒤에서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레이는 솔레아가 욕하는 것도 처음 들어!”

“그레이는 솔레아가 그만 누워 있었으면 좋겠네!”

“그레이는 솔레아가 너무 웃기네!”

“그레이는 솔레아가 기운 펄펄 나는 것도 처음 봐!”

시뻘게진 얼굴로 걷던 솔레아는 정찬실에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밥이든 뭐든 좋으니까 아무거나 빨리 가져와 줘요. 아니, 가져와 줘.”

그 말에 앤이 결연한 표정으로 부엌을 향해 뛰어가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우유로 만든 따뜻하고 걸쭉한 티를 가져왔다.

“이게 뭐예요?”

“아, 바로 식사를 하시면 속에 부담이 될 거라며, 우유차를 가져다드리라고…….”

“누가? 주방장이?”

“……그레이 도련님이요.”

“뭐?”

난처한 듯 말하는 앤을 보며 솔레아는 왼손에 쥐고 있는 로또 종이를 더 강하게 쥐었다. 그러다 땀에 젖어서 찢어지기라도 할까 봐 금방 손의 힘을 풀었다.

“안 먹어요.”

찻잔을 밀어 내기 무섭게 정찬실 입구 쪽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힝, 그레이 슬퍼.”

귀엽지도 않은 주제에 문 뒤로 몸을 숨긴 채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꼬라지를 보니 분이 치밀었다. 단 하루, 얼굴을 마주한 건 채 5분도 안 되는데 이렇게 화가 나는 걸 보면 사람을 빡치게 하는 데에는 아주 도가 튼 놈이었다.

아까처럼 소리 지를 기력이 없는 솔레아는 그를 무시하고 앤에게 명령했다.

“이거 말고, 다른 걸로 부탁해요. 주방장에게 앤이 직접 말해서.”

“예, 아가씨.”

살벌해진 솔레아의 목소리에 앤은 다시 눈치를 보며 정찬실을 빠져나갔다. 앤이 편히 나가도록 문을 잡아 준 그레이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솔레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 하는 거야.”

“나도 뭐 좀 먹으려고.”

“다른 데서 먹으면 되잖아.”

“아가씨가 건강하셔야 제 마음이 놓이죠.”

놀리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자꾸 아가씨, 아가씨 하고 부르는 게 여간 신경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솔레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레이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레이는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대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었다.

“진짜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구나. 보기 좋다, 야.”

“뭐?”

숱 많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고갯짓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텅 빈 것처럼 보이던 회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솔레아를 향했다.

또렷한 그의 이목구비는 묘하게 시선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너무 방어적이네. 계속 날이 서 있잖아. 누가 보면 평생을 위협받으면서 살아온 줄 알겠어.”

“하.”

“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쳐 버린 솔레아는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지워 버렸다.

그런 건 몸이 바뀌어도 티가 나나 보네.

아버지는 없느니만 못한 사람이었다. 한번 집을 나가면 최소 3일은 지나야 들어왔고, 일주일, 혹은 한 달 만에 마주칠 때도 있었다. 어찌 됐든 늘 집으로 돌아왔던 그는, 집에 사람이 없으면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발로 차고 던지며 때려 부수곤 했다. 뭐, 사람이 있다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었지만.

무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서 그저 무력한 인간으로 자랐다.

그렇게 평생을 두려움에 떨다가 딱 한 번, 소주병을 들고 달려드는 아버지를 있는 힘껏 밀쳤다.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아버지는 그대로 쿵 소리와 함께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않았다.

지윤은 용수철처럼 튕기듯 벌떡 일어섰다. 머릿속에는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한데 두 다리는 무겁기만 했다. 겨우 운동화를 구겨 신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날 새벽 달리는 내내 귓속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온몸으로 쿵쿵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빠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고, 내리막길에선 바보처럼 데굴데굴 굴러 옷이 찢어지기도 했다.

아빠가 죽었을지도 몰라. 아니, ……아빠가 살았을지도 몰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매 순간 바뀌었고, 그건 지윤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녀가 머물던 식당 뒤편의 쪽방으로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아버지가 네 이름으로 빚을 졌으니 갚으라고 했다. 네 앞으로 된 빚이니 상속 포기 그딴 건 씨알도 안 먹힐 줄 알라는 위협과 함께.

살아 있었구나.

웃음밖에 나오지 않아 그저 웃기만 했다. 지윤은 그들에게 간절히 물었다.

‘그거면 끝인가요?’

그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의 ‘끝’과 지윤의 ‘끝’은 달랐겠지만 어쨌든 살다 보면 끝날 줄 알았다.

그날부터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공장에서 열두 시간씩 교대로 일을 하다 보면 다른 생각을 안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 사정을 들은 공장장이 돕겠다며 다가와 지윤의 명의로 보증을 세워 놓고 도망간 후로는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뒤로 여기저기 면접을 봤지만 어디 한 군데 뽑아 주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 공장에서 알게 된 사람이 가족 같은 회사를 소개해 준다기에 들어갔더니 진짜 가족이 운영하는 그냥 좆같은 회사였다.

난 또 가족 같다기에 가족이 어떤 건지 알 수 있겠구나 했는데.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무슨 가족이야.

그렇게 살던 중에, ……아. 잠깐만. 내 17억. 하, 샹.

“야!”

잠시 잠잠해졌다가 갑자기 인상을 구기는 솔레아를 본 그레이는 스푼으로 유리잔을 두드렸다.

챙, 챙. 기분 나쁜 소리가 울리자 솔레아는 짜증 섞인 눈으로 그레이를 바라봤다.

“야! 수프 먹으라니까! 왜 멍하니 있냐! 뜨거우면 뜨겁다고 말을 하든가!”

뭐라는 거야. 동태눈깔 젓갈 그래이 새끼야가.

그레이의 말처럼 솔레아의 앞에는 어느새 수프가 놓여 있었다. 옛날 생각을 하다 보니 앤이 다가온 줄도 몰랐다.

그레이는 여전히 신경질적인 말투로 나불거렸다.

“째려볼 기력 있으면 수프부터 먹어! 기억 잃었다고 아주 막 나가지, 너? 어? 기억 돌아오고 나서도 지금처럼 하나 보자. 아니, 앤! 수프가 뜨겁잖아! 그니까 얘가 못 먹는 거 아냐!”

“죄송해요, 식혀서 다시 가져올게요!”

앤이 접시로 손을 뻗으려는 걸 솔레아가 막자 그레이가 때를 놓치지 않고 또 깝죽거렸다.

“너 입으로 뭐 넣는 꼴을 못 봤다, 내가. 오늘 그거 다 먹고 일어나라.”

픽 웃은 솔레아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 후후 분 뒤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 뜨겁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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