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은발 미중년이 솔레아에게 다가오려 하는 순간 의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공작님!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는 상태가 매우 안 좋으십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내 딸이 갑자기 발작을 해!”
“내 돈!”
공작이 의사를 붙잡고 말하는 도중에도 솔레아는 돈을 외치며 발로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어지간한 고통이 아닌 것 같아 바라보는 이들의 가슴도 아플 지경이었다.
“일단 저 발작이라도 멈춰 주게!”
공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분홍색 머리칼의 사내가 솔레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발을 동동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나려 날뛰는 솔레아의 머리 위로 손바닥을 가져가 펼치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솔레아가 잠잠해지며 괴성이 잦아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을 뒤틀며 날뛰던 솔레아가 피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을 침대 위에 넓게 퍼뜨린 채 미동도 없이 엎드려 누워 있자 그레이가 분홍이에게 달려들었다.
“헤이먼! 몸도 안 좋은 애를 갑자기 기절시키면 어떡해!”
“그냥 재운 거야. 아버지께서 발작을 멈춰 달라고 하셨으니까.”
헤이먼은 조용히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공작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잠든 솔레아의 뒤통수를 한참 동안 보다가 의사와 아이들을 데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 * *
자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넓은 방 안이었다.
비좁은 원룸이 아니라 세 명은 너끈히 누워 잘 수 있는 넓은 침대와 큰 창,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하녀들이 있는 그곳.
솔레아는 허공을 보며 시름시름 앓았다.
“17억……. 개새끼들아……. 내 17억 어디로 갔냐고……. 아니, 내가 대체 어디로 온 거냐고요.”
복권 당첨금의 세금 33%를 빼도 대략 17억 정도가 되는 큰돈이었다. 그 돈이면 빚도 충분히 갚을 수 있을 테고, 남은 돈으로 꽤 괜찮은 집을 한 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옆으로 돌아누운 솔레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걸 본 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가씨. 따뜻한 차라도 한잔 가져다드릴까요?”
“저기요.”
“아가씨.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는 아가씨의 하녀인 앤이에요. 지금 당장은 기억이 안 나시겠지만 차차 기억이 돌아올 수 있도록 저랑 다른 분들도 다 아가씨 곁에서 도울게요!”
그냥 제 17억을 찾아 주실래요?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두 손을 모아 쥐며 묻지도 않은 각오를 말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하……. 그래요, 앤. 차는 괜찮으니까 시원한 물 한잔 가져다줘요.”
“제게는 편히 말씀하셔도 돼요.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물이면 돼요.”
그리고 17억.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앤이 나간 후, 침대에서 내려온 솔레아는 부드러운 슬리퍼에 두 발을 끼워 넣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밖엔 절대 서울은 아닌 것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넓은 초록 들판이며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정복을 차려입은 채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기사들, 그리고 어제 봤던 싹수없는 적갈색 대가리와 분홍 머리 꽃미남.
창가에 서 있는 솔레아를 본 건지 이맛살을 찌푸린 적갈색 머리가 몸을 완전히 돌려세우곤 뭐라 뭐라 큰 소리로 말했지만 창을 닫고 있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갈색이면 갈색이고, 적색이면 적색이지. 적갈색 머리가 뭐냐. 짬뽕도 아니고. 넌 이제부터 젓갈이다. 얄밉고 시끄러운 새끼.
솔레아는 안 들린다는 의미를 전달하려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미안한데 안 들려. 그리고 사실 하나도 안 미안하네.
솔레아의 행동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보던 젓갈 놈이 이내 소리치며 이쪽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핑크 미남이 잽싸게 따라붙어 그를 말렸다.
자신을 잡은 핑크 꽃미남의 팔을 뿌리치고 다시 이쪽을 향해 뛰어오던 젓갈은 잠시 후,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막힌 것처럼 몸을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핑크 미남의 손에서 흘러나온 금색의 안개 같은 것이 젓갈 놈의 몸을 휘감았다.
“뭐야, 저게!”
솔레아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창문을 벌컥 열었다.
“아, 형! 하지 마! 헤이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발성 좋은 그레이가 허공에서 팔다리를 마구 뒤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솔레아 몸도 안 좋은데 찾아가지 마, 그레이.”
그래, 이 새끼야.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입에 잘 붙네. 그레이 새끼.
금빛 안개는 그레이의 몸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풀밭 위에 내려놓고는 헤이먼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솔레아에겐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그레이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헤이먼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솔레아 저게 사람을 약 올리잖아! 기억을 잃었다더니 진짜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러자 헤이먼은 이쪽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조용한 목소리로 나긋나긋 그레이를 타일렀다.
잠시 후,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헤이먼을 밀친 그레이가 몸을 휙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말을 했길래 저러지.”
그때 창밖으로 몸을 살짝 내밀고 있는 솔레아를 본 헤이먼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곤 손바닥 위에서 뭔가를 만들어 내더니 솔레아를 향해 날려 보냈다.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날아온 금빛의 작은 새는 솔레아의 창가에 앉아 고운 목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했다.
“우와…….”
어제부터 이리저리 짤짤 털리기만 하던 멘탈이 잠시나마 안정되는 느낌에 솔레아는 조심스럽게 작은 새의 부리 끝을 검지로 툭 건드렸다.
그 순간 뜨거운 건지, 차가운 건지 알 수 없는 따끔한 통증이 손끝에 스치더니 작은 새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손가락을 부여잡은 솔레아가 놀란 눈으로 창밖을 봤을 땐, 새를 날린 헤이먼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뭐야, 저 새끼는.”
예쁘게 잘생긴 얼굴로 나한테 왜 이래. 가짜 새는 원래 만지면 안 되는 거였나.
아니, 안 되면 안 된다고 말을 했어야지. 꼬시는 것처럼 상큼하게 웃으면서 새를 날려 놓고는 만지니까 톡 쏘는 건 뭐야.
부드럽게 생겼지만 사실은 앙큼한 놈이니 기억해 달라는 자기 어필인데 내가 눈치를 못 챈 건가.
이게 무슨 남돌 뽑는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아니고 왜 저래, 진짜.
씩씩거리며 창문을 쿵 소리 나게 닫는 순간,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물을 가져왔어요.”
“네. 들어오세요.”
곧 문이 열리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온 앤은 창문 앞에 서 있는 솔레아를 보며 기함했다.
“아가씨! 몸도 안 좋으신데 겉옷도 걸치지 않으시고! 어휴!”
들고 온 쟁반을 냉큼 탁자에 내려놓은 앤이 넓은 카우치 위에 돌돌 말려 있던, 두툼한 털로 된 숄을 낚아채듯 집어 들고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와 솔레아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기껏해야 봄 날씨 같은데 이렇게 두꺼운 숄을 걸칠 필요가 있나요.”
“아가씨는 몸이 약하셔서 한여름에도 감기에 자주 걸리곤 하셨잖아요. 얼른 이리 앉으세요.”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앤은 시원한 물뿐만 아니라 따뜻한 차와 딸기잼과 버터를 곁들인 스콘까지 가져왔다.
“앓고 일어나신 뒤에는 늘 차와 스콘을 드셨으니까요. 기억을 잃으셨어도 입맛은 그대로이실 테니 준비해 봤어요. 괜찮……으실까요?”
앤은 솔레아의 눈치를 살피며 스콘이 담긴 접시를 조심스럽게 솔레아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솔레아라는 이 여자가 평소에 몸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는 지금 이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앤이 그녀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도.
이게 귀한 집 딸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지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다정함이었다.
불현듯 아주 오래전 마주했던 어머니의 다정한 눈빛이 떠올랐다.
몸에 맞지도 않는 두툼한 외투를 겹쳐 입은 어머니는 비둘기가 많은 서울역 구석 언저리에서 지윤의 손을 잡은 채 물었다.
‘지윤아. 엄마랑 같이 갈래?’
‘어디?’
‘멀리.’
‘왜?’
‘그냥.’
짧게 대답하던 어머니의 얼굴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지독히 슬퍼 보였다는 감각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내 주변을 살피며 떨고 있었다는 것도.
지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이제껏 단 한 번도 사 준 적 없던 과자를 사 온 어머니는 봉지까지 직접 뜯어 어린 지윤의 손에 쥐여 준 후,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라 하고선 가 버렸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회색 비둘기들 사이로 멀어지는 감색 외투의 엄마.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그 장면이 선명했다. 손가락이 아리듯 시려 와서 바닥에 과자 봉지를 내려놓은 지윤은 그곳에서 멍청히 몇 시간 내내 엄마를 기다렸었다. 그다음엔…….
경찰서에서 꼬박 하루를 보낸 뒤에야 술이 덜 깬 아빠가 찾아왔다.
‘이년아, 네 엄마 어디 갔어! 그년 어디 갔냐고!’
‘선생님, 진정하세요.’
말리는 경찰들과 아빠의 술 냄새. 그 속에서 지윤은 울지 못했다. 그저 엄마를 다신 보지 못한다는 것만 어렴풋이 깨달았다.
상념을 떨쳐 내듯 고개를 저은 솔레아는 앤이 차려 놓은 간식들을 내려다보다 그냥 제일 앞에 있는 물잔을 들어 마셨다.
앤의 눈꼬리가 내려가는 게 실망한 것 같아 보였지만 어차피 이 친절과 애정은 ‘진짜’ 솔레아가 누려야 할 것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 말해 줘요, 앤.”
앤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참을 조곤조곤 솔레아에게 설명했다.
솔레아 폰 베르고.
베르고 공작가의 막내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늘 남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으며 파티에도 한 번 나가 보지 못하고 성년을 맞이한 열여덟 살.
가족은 위로 오빠가 셋 있고, 어제 본 그 은발 미중년이 아버지인 디에르고 폰 베르고.
젊은 시절 디에르고 공작은 전쟁만 터졌다 하면 참전하여 적군을 휩쓸었다고 한다. 그러다 아내의 몸이 약해진 뒤론 저택에서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하지만 그리 사랑해 마지않던 아내는 죽어 버려 지금은 혼자.
그럼 전쟁에 참전 중이라 집에 없다던 첫째 오라비는 그 애비를 닮았나 보네. 젊은 나이에 기사 단장이라니, 능력도 좋다.
솔레아는 시큰둥하게 첫째의 이름을 입 안에서 되뇌었다.
티온 폰 베르고.
그에 대해선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전쟁을 통해 공을 쌓느라 공작저엔 거의 오지 않고 있다는 것만 들었을 뿐.
둘째는 괴상한 마법을 쓰는, 분홍 머리에 분홍 눈의 꽃미남 헤이먼.
이 나라에는 마법을 쓰는 자가 소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가지고 있는 마력 자체가 그리 큰 편은 아니라 일상에서 작은 도움을 받는 정도라고.
헤이먼처럼 사람을 공중에 띄우고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어 유지하는 건 꽤 큰 마력을 필요로 하나, 그 역시 일상에선 그저 유용하게 쓰이는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마법사 놈 밑에 있는 셋째가 적갈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그레이였다.
그는 첫째 못지않은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져 기사 작위까지 땄지만 어느 기사단에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왜 이 저택에 남은 거지? 능력도 출중한 놈이? 싹수가 없어서 아무도 안 데려간 건가.
타당하다. 너무 그럴듯하다. 그 정도 싸가지면 어딜 들어갔어도 단체 생활에 적응 못 하고 왕따당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굴러 들어온 돌 다시 굴려 나갈 관상이지.
솔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빠라는 셋과의 관계는 어땠냐 물으니 앤은 웃으며 얌전히 답했다.
“세 분 모두 아가씨를 아끼셨어요.”
미묘한 표정으로 솔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앤은 박수를 짝 치며 덧붙였다.
“그레이 도련님이 아가씨 방에 가장 자주 오셨었어요! 걱정도 많이 하셨고요!”
“말도 안 돼.”
“예?”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몰랐을 때에도 말을 아주 제멋대로 하던데.”
앗. 그래도 오빠라는 사람인데 내가 너무 막말해 버렸나.
슬쩍 앤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가씨 방금 저한테 반말하셨어요!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시나 봐요!”
“아, 하하……. 무심코 그래 버렸네!”
흔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주인공이 어떤 일을 겪고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야기. 어쩌면 나도 내 전생을 기억해 낸 게 아닐까. ‘솔레아’가 진짜 나의 인생이라면?
다른 생을 살 수 있는 걸까.
그때, 앤이 주머니에서 하얀 종이를 꺼냈다.
“아, 참. 이거 복도에서 주웠는데 혹시 아가씨의 종이인가요?”
얇은 종이 위에 나열된 검은색 숫자들.
로또 종이였다.
“꺄악!”
솔레아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앤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내 돈이 진짜였어! 돈! 내 17억! 끄아아악!”
또다시 머리를 쥐어뜯는 아가씨를 본 앤은 겁에 질린 채 방에서 튀어 나갔다.
“누, 누가 좀 도와주세요! 아가씨가 어제와 같은 발작을 일으키셨어요! 의사 선생님!”
17억을 날린 고통은 고작 하루 만에 사그라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