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92)

1화

로또에 당첨되기 이틀 전이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찐만두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지윤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습니다.

차라리 찐만두가 되는 게 낫기 때문입니다. 회사에 가는 것보다는요. 제기랄.

월요일이 되어 (가)족같은 회사에 출근하는 지윤은 찜통 같은 지하철 안에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니, 잠깐만. 이 정도 날씨면 사람 죽여도 정당방위로 인정해 줘야 되는 거 아닌가. 찐만두가 나인지 내가 찐만두인지 모를 정도로 익어 가고 있잖아, 지금.

아니면 우리나라 날씨가 혹시 나를 담금질하는 중인가. 여름에는 불 속에, 겨울에는 찬물에 번갈아 넣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명검으로 만들려고 담금질하고 있는 거냐고. 그렇다면 검이 되어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더위에 지쳐 헛소리가 머릿속에서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그래도 회사엔 에어컨 틀어져 있겠지.

열차에서 내려 빠르게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던 중 지윤은 주말에 샀던 로또의 당첨 번호를 확인하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이거 되면 바로 회사 짼다. 진짜로 찢어 버릴 거야.”

험악한 말을 뱉어 냈지만 지윤은 내심 알고 있었다. 어차피 로또에 당첨되지 않았을 거고, 오늘도 출근해야 한다는 걸.

야근 수당도 제대로 챙겨 주지 않는 사장과, 자기가 하는 말이 성희롱인 줄도 모르고 계속 짖어 대는 대리와, 식비 영수증을 제출하면 ‘뭘 이렇게 많이 드셨어요?’라고 면박을 주는 사장 딸인 경리가 있는 그곳으로.

회사에 들어가기 직전 지윤은 휴대폰으로 로또 당첨 번호를 확인했다.

와, 몇 개 맞는 거 같아.

……어, 좀 많이 맞힌 거 같은데.

……아니, 다 맞는데?

어라?

아니, 잠깐만.

회사 앞에 우뚝 멈춰 서 있던 지윤은 종종걸음으로 구석으로 걸어가 다시 확인했다.

금세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들었다. 더워서 흐르는 뜨겁고 찝찝한 땀이 아닌 차갑게 식어 버린 식은땀이 온몸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래턱이 부들거리다 곧 몸 전체가 떨려 와 지윤은 입술을 앙다문 채 숨을 몇 번이나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번호를 하나씩 대조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큐알 코드로도 다시 확인했다.

분명한 1등이었다. 여섯 개의 숫자가 색색깔로 반짝였다.

누가 볼세라 지윤은 휴대폰과 당첨 용지를 급히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가 혹시 떨어뜨릴까 싶어 당첨 용지를 다시 꺼내 손에 꼭 쥐고 회사 문 앞으로 향했다.

퇴사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지만 지윤은 문을 벌컥 열자마자 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뜨렸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회사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솔레아.”

“네?”

‘걔가 누군데요.’라고 되물으려 했지만 남자들의 눈은 정확히 이쪽을 향해 있었다.

긴 탁자의 상석에는 은발이지만 얼굴엔 주름이 거의 없는 미중년이 근엄한 자태로 앉아 있었고, 그의 양옆에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젊은 남자 두 명이 고개만 살짝 문 쪽으로 돌린 채 앉아 있었다.

젊은 남자 둘 중 비교적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적갈색 머리칼의 회색 눈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프다고 누워 있을 땐 언제고 네 결혼 얘기를 나눈다니 튀어나와서 한다는 말이, 뭐? 그만두겠습니다? 이 결혼이 네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인 거 같아?”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차분한 인상의 분홍 머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레이. 동생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그래, 이 새끼야.

머릿속에서 욕설이 튀어 나간 건 둘째 치고,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히 회사의 문을 열었는데.

문에 붙어 있는 조악한 회사 이름도 분명히 봤다고.

“아니, 길을…… 길을 잘못 들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멍한 표정이 되어선 더듬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깨달았다. 운동화가 아니라 구두를 신고 있다는 걸.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그제야 입고 있는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떨어지는 고개를 따라 흘러내린 붉은색의 머리카락도.

이게 뭐지. 꿈인가. 방금 저 아저씨가 나를 뭐라고 불렀더라.

지윤, 아니, 솔레아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정찬실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엔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반짝거리고 둥근 아치 모양의 창문으론 환한 햇빛이 들어왔다. 길게 뻗어 있는 하얀 대리석 식탁은 회사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회식을 해도 될 만큼 넓었다. 바닥 역시 누가 닦았는지는 몰라도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이 번쩍번쩍 났다.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정찬실을 이곳저곳 살피는 솔레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은발의 남자가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솔레아, 아직 몸이 좋지 않으면 돌아가도 좋다. 앤, 밖에 있으면 레아를 방으로 데려가라.”

“예, 공작님.”

문을 열고 들어온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한 하녀가 솔레아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 부축했다.

“가세요, 아가씨.”

“아니, 그게, 어, 아, 저…….”

혹시 내가 연 게 회사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차원의 문이었나.

하필 로또 1등에 당첨된 이 시점에, 차원의 문을? 사춘기 시절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다고 그렇게 빌 때는 안 되더니 다 포기한 지금?

솔레아는 멍청한 얼굴로 사람 두 명은 너끈히 굴러다닐 수 있을 법한 넓은 복도를 하녀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저기요.”

“아가씨. 말씀 편히 하세요.”

“한국말 어디서 배우셨어요?”

어딘지 모를 곳을 바라보며 읊조린 솔레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앤이 울상을 지으며 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저 앤이잖아요.”

앤이라니. 내가 아는 앤은 빨간 머린데 당신은 검은 머리잖아요.

한국인이면 성씨와 본관을 말해 주세요. 김해 김씨야, 밀양 박씨야. 박앤. 김앤. 이것도 이상한데 아무튼 앤이라뇨, 나야말로 묻고 싶다.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촬영 중인데 제가 잘못 들어왔나요?”

“네?”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은 앤은 솔레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그녀를 부축한 채 앞으로 걷기만 했다.

한참 걷자 방에 거의 도착한 듯 몇 명의 하녀들이 더 나타났다.

“아가씨, 아까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정찬실로 뛰어가셔서요!”

“몸은 괜찮으세요? 계속 누워 계시다 오랜만에 일어나셨는데.”

“의사를 부를까요?”

“깨어나신 김에 식사를 준비할까요? 간을 약하게 한 수프를 만들게요. 아가씨가 다시 잠들지 않으시면 30분 안에 갖다드릴 수 있어요.”

“일단 물 한잔 드세요. 아가씨.”

누군가 내민 물잔을 얼떨결에 받아 든 솔레아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 어디예요? 솔레아는 또 뭐고요? 혹시 몰래카메라 중이면 말해 줘요. 재미없으니까.”

솔레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금 전 물잔을 건네준 하녀가 눈을 까뒤집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흩어지는 숨 사이로 튀어나온 말은 ‘아이고, 아가씨. 기억을 잃으시다니.’였다.

“세상에! 마르실라 님!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마르실라 님이 쓰러지셨어요!”

“마르실라라니……. 어디 마씬데요? 작명소가 사대주의인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하지만 일단 사람이 쓰러졌으니 옮기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아픈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으니.

솔레아는 바닥에 쓰러진 본관 모를 마씨 여성을 들쳐 업었다. 그러자 뒤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꺅! 아가씨!”

“몸 상하시는데!”

깡마른 사람 하나 업은 걸로 왜 이렇게 유난이야. 그런데 평소보다 좀 힘든 것 같네.

“빈방이 어딘지 말해 줘야 사람을 눕히죠!”

팔에 힘이 빠져 하녀의 몸이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마씨 여성을 고쳐 업은 솔레아는 일단 앤이 가리킨 옆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그녀를 고이 눕혔다.

“이거 몰카면 말해 줘요. 근데 왜 다들 머리색이 총천연색이에요? 가발인가요? 눈은 또 왜 그래. 컬러 렌즈 꼈어요? 다들 이목구비가 너무 서양인 같은데. 아니, 근데 한국말이 너무 유창하잖아요. 혹시 내가 영어를 쓰고 있나. 헬로우, 두유 노 미.”

영화 세트장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한국어가 전 세계 공용어가 된 건가.

솔레아가 하는 영문 모를 소리를 듣고 있던 하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가씨. 대체 왜 이러세요.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안 되겠어요. 안젤라. 당장 의사를 불러와요.”

하녀 몇 명이 의사를 부르기 위해 황급히 방을 빠져나가는 걸 본 솔레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제 머리카락을 잡았다. 시뻘건 붉은색이었다.

“최면이라도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장난 재미없다니끄, 아악!”

가발을 벗기 위해 뒷머리 채를 한 움큼 잡아서 위로 휙 잡아당긴 순간 솔레아는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뭐야, 이거!”

공작가의 귀한 막내 아가씨가 제 머리채를 잡아 위로 쑥 들어 올리는 걸 목격한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아가씨의 오른손에 악령이 들렸어!”

“꺄아아아악!”

아, 잠깐만요. 흑염룡도 아니고 악령이라니.

누가 제발 이해 좀 시켜 줘요. 이거 뭔데. 뭐냐고. 차라리 내가 악령이면 그렇다고 말을 해 줘요.

그리고 자는 사람 머리를 탈색시킨 미용사 누구야, 나와.

의사가 검진을 하는 동안 하녀들은 솔레아의 옆에 서서 쓰러진 마르실라를 대신해 열심히 떠들었다.

“아가씨께서 전혀 기억을 못 하세요. 본인이 누구신지, 여기가 어딘지도요.”

“그리고 악령이 들리신 것 같아요. 아까 악령 들린 저 오른손이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잡아서 휙 위로 올렸다고요.”

그래서 손을 침대 헤드에 묶었니. 이 다정한 못된 것들.

의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솔레아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성함을 말씀해 보십시오.”

“……윤지윤이요. 앞으로 해도 윤지윤. 거꾸로 해도 윤지윤.”

자기소개를 할 때면 ‘문지윤이요?’, ‘윤지운이요?’ 하고 되묻는 경우가 많아 ‘앞으로 해도 윤지윤. 거꾸로 해도 윤지윤입니다.’라고 답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평소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솔레아의 대답에 의사는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이곳이 어딘지는 기억하십니까?”

“……어디 세트장이길 바랐는데 분위기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네요.”

의사는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 누가 죽을 날 받아 놨냐고. 이보세요. 의사 선생님.

뭐라 한마디 하려던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의 그 은발 미중년이었다.

“레아!”

뭐지, 저 걱정 가득한 눈빛과 화려한 이목구비는. 난 저런 은발 미중년을 꼬신 적이 없는데.

솔레아의 당황한 눈을 보자 더욱 하얗게 질린 남자는 떨리는 턱을 한 번 꾹 다문 뒤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니.”

“아니요.”

그의 뒤로 정찬실에 같이 있었던 남자 둘도 따라 들어왔다.

“아버지, 평소처럼 그냥 쓰러진 걸 거라니까요.”

회색 눈깔이 은발 미중년에게 투덜거리자 그 옆의 분홍이가 핀잔을 주듯 말을 가로챘다.

“넌 아픈 동생한테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자기한테 관심이라도 달라는 듯이 큰일 있을 때마다 픽픽 쓰러지니까 그렇지.”

분홍 머리는 그나마 얼굴만큼 싹수가 있어 보이는데 그레이인지, 그래, 이 새끼야인지 뭔지 하는 저놈은 예절 교육을 에어 드랍으로 받았나.

그사이 의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공작이라는 자에게 아가씨가 기억 상실이라고 전했다. 그 순간 뭔가 굉장히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듯한 불길한 기분이 솔레아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뭐였지. 정말 소중한 걸 잊은 것 같아.

“악! 로또!”

오른손이 묶인 것도 잊은 채 솔레아는 방금 바다에서 건져 올린 참치처럼 펄떡였다.

“내 돈! 내 돈! 로또 어디 갔어! 그거 누가 주워 가면 어떡, 아, 썅! 돈! 돈! 로또!”

갑자기 미쳐 날뛰기 시작한 솔레아를 본 의사는 진정하라며 소리쳤고, 하녀는 금방이라도 침대에서 튀어 오를 것처럼 구는 솔레아의 몸을 직접 내리누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돈! 아, 잠깐만! 타임! 내 돈! 17억! 집에 간다고! 가야 된다고! 악!”

집에 갈 거라고∼

솔레아 아가씨의 괴성이 공작저를 뒤흔들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