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드디어 샤를로트가 황위에 올랐다. 나와 해리는 미리 계획했던 것처럼 평범한 부부로 위장한 채 조용히 황성을 떠났다. 이제 남은 건 평화로운 은퇴 생활뿐이었다.
“정말 아무도 못 알아보네.”
해리가 거리에 가득한 인파를 쳐다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 수도를 벗어나기 전이라 거리는 황제의 즉위식을 멀리서라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누구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상점 곳곳에서 우리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 엽서가 팔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새삼 놀랄 이유가 있어요? 팔찌가 잘 작동한다는 건 해리가 이미 시험해봤잖아요.”
해리가 기사인 척하고 나를 속이려 했던 사건을 은근슬쩍 언급하자 해리가 다급하게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제일 먼저 어디로 갈까? 역시 남쪽이 좋겠지? 따뜻한 휴양지에서 여유롭게!”
나는 횡설수설하는 해리를 쳐다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그의 뜻대로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것도 좋지만, 먼저 유피테르를 원래 자리에 돌려 둔 뒤에요.”
“성검을?”
“이제 성검의 주인 역할에서도 내려와야죠. 난 은퇴했으니까.”
성검의 주인이라는 타이틀은 내가 짊어진 무거운 왕관 중 하나였다. 평범하지만 돈 많은 백수의 삶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내려놓아야 할 짐이었다.
“성검은 뭐래? 그래도 괜찮대?”
해리가 투박한 검집에 모습을 감춘 채 내 허리에 걸려 있는 성검을 힐끗대며 물었다. 유피테르와 많이도 투덕거렸지만, 그러는 동안 정이 꽤 많이 든 모양이었다.
“네. 다시 영웅을 기다리겠대요. 그게 자신의 숙명이라고.”
나는 지난밤 유피테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유피테르. 당신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 두려고 해요.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유피테르가 받아들이기 힘들 결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선선히 나의 결정을 이해했다.
-[그러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인님께선 언제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전 작지만 아주 무거운 검이지요.]
오히려 유피테르는 나의 결론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성검은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인님께서 평화를 이루셨고, 이 땅에 혼란은 사라졌지요. 성검의 시대는 저물었습니다. 저는 이제 평화로운 땅으로 돌아가 다가올 혼란과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기다리겠지요. 기다림은 성검의 숙명이거든요.]
다가올 혼란과 새로운 영웅의 탄생. 그것은 아마도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먼 미래의 일. 유피테르는 또다시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인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마 긴 기다림이 될 것 같군요. 주인님께서 이루신 평화는 아주 견고해 보이니까요. 위대한 영웅의 곁에 함께한 것은 저의 큰 기쁨이었습니다, 주인님.]
유피테르는 그렇게 인사하며 마지막으로 강한 빛을 뿜어내더니, 스스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가 다시 깨어나기 전까지 성검은 조금 예리한 날을 가진 단검에 불과할 터였다.
“그럼 첫 목적지는 성검의 고향이 되겠네. 당장 이동할까?”
나는 고개를 저어 마법을 쓰려는 해리를 저지했다.
‘여유로운 은퇴 여행에 공간 이동 마법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마차를 타고 가죠.”
“마차? 시간이 엄청 많이 걸릴 것 같은데.”
“괜찮아요. 이제 우리한텐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물론 중간에 내가 지쳐버리면 해리가 날 업어줘야 하겠지만요.”
“걱정하지 마. 온종일 업고 다닐 수도 있으니까.”
해리가 자기만 믿으라는 듯 턱을 치켜들며 주먹으로 가볍게 가슴을 두드렸다. 다른 부분에서는 많이 어설퍼도 해리의 체력이라면 믿을 만했다.
“그럼 먼저 마차를 구하러 갈까요? 인세티아 후작한테 정보를 얻어왔거든요. 수도 남쪽으로 가면 교역소가 있는데, 거기서 말과 마차도 구할 수 있을 거래요.”
대략적인 비용도 알아뒀으니 사기당할 걱정은 없었다.
“그 전에 수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케이크부터 먹고요.”
“케이크? 그 파란 상자에 담긴 거?”
“네. 포장은 안 되고 매장에서만 판다는 그 케이크 좀 먹어보려고요.”
내 말에 해리도 반색했다.
수도에는 아주 유명한 케이크 가게가 있었다. 맛있다며 유명세가 아주 대단하기에 시녀들을 통해 사 먹은 적이 있는데, 맛이 아주 훌륭해서 나와 해리 모두 만족했다. 그런데 오로지 매장에서만 판매하는 포장 불가의 시그니쳐 케이크는 그것보다 훨씬 맛있다고 하지 뭔가.
사실 황제의 명이라고 하면 매장에서만 판매한다는 케이크도 기꺼이 포장해주겠지만, 권력을 그렇게 쓰는 건 치사했다. 직접 먹으러 가는 건 이목을 집중시킬 테니 불가능하고.
그래서 나는 홀로 ‘은퇴하면 제일 먼저 그 케이크를 먹으러 가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게 바로 오늘이고 말이다.
“나도 그 케이크 먹고 싶었어!”
다행히 해리도 나의 계획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우리 둘은 신이 나서 케이크 가게를 찾아 나섰다. 파란 간판이 세워진 케이크 가게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워낙 유명한 가게라 늘 손님들이 늘어서 있다는 케이크 가게 앞이 한산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문을 쳐다보니 입구에 클로즈 표시가 당당하게 걸려 있었다.
‘이럴 수가…….’
오늘 바로 수도를 떠날 예정이라 오늘이 아니면 이 가게를 찾아올 수가 없었다. 나와 해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멍하니 문을 쳐다보다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애써 웃음을 터트렸다.
“실수일 거야. 오픈인데 클로즈 표시를 잘못 걸어둔 거지.”
“맞아요. 그런 게 틀림없어. 연중무휴랬는데, 하필 우리가 찾아온 날이 휴일일 리가 없잖아요.”
나는 당당하게 문 앞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굳게 잠겨있어야 할 문고리가 부드럽게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어? 정말 팻말을 실수로 걸어둔 건가?’
나는 희망을 가지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악!”
동시에 퍽-하고 단단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와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렸다.
놀라서 바닥을 보니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자 하나가 기절해있었다. 열리는 문에 머리를 맞은 건지 이마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마도 남자가 밖으로 나오기 위해 문 앞에 선 타이밍과 내가 강하게 문을 열어젖힌 타이밍이 묘하게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우선 기절한 사람부터 돌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숙이려는 순간.
“에아에! 아아하니다!”
안쪽에서 알아듣기 힘든 여성의 외침이 들려왔다. 대충 해석하자면 ‘세상에! 감사합니다!’ 같았다.
‘감사해? 뭐가? 사람을 문으로 두드려 팬 거?’
나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밧줄에 꽁꽁 묶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리.”
얼떨떨하게 해리를 부르자, 그가 서둘러 사람들에게 다가가 재갈과 밧줄을 풀어주었다. 자유를 찾은 사람들은 나를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강도가 들이닥쳤는데… 저희를 구해주셨어요!”
“……강도?”
나는 바닥에 쓰러진 거친 인상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꼼짝없이 돈을 털리는 줄 알았어요. 재료비를 지불하려고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아무튼 덕분에 살았습니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아주 날렵하게 강도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셨겠죠!”
“아니, 난 그냥…….”
문을 열었을 뿐인데…….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치안대에 용사님의 이야기를 꼭 전하겠어요. 이렇게 용감하고 강한 분은 표창을 받아야 마땅하지요!”
여기저기서 영웅이니, 용사니 하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아니… 난 그냥 케이크 먹고 싶어서 가게 문을 열었을 뿐인데.’
왜 갑자기 영웅이 되는 건데.
어째 이 은퇴 여행, 시작부터 아주 불길했다. 가장 무서운 건 내가 아직 수도를 벗어나기도 전이라는 점이었다. 피곤함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 * *
그리고 이어진 은퇴 여행이 어땠냐고? 말해서 무엇하겠나.
가는 길마다 영웅담, 영웅담, 또 영웅담. 결국 해리와 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신비한 요정 부부’라는 별명까지 얻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겠지. 설마 여기에서까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이번에야말로 시간 많고 돈은 더 많은 환상의 백수 생활을 즐길 테니까!
이브리아 오베론의
이상한 은퇴 생활
-The End
그냥 악역으로 살겠습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