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5/156)

* * *

나는 샤를로트가 즉위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곧장 해리와 함께 에렐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목적지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발 닿는 대로 여행할 생각이라 애초에 정확한 목적지가 없기도 했다.

‘어차피 로이가 셜리 옆에 남을 거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할 수 있어.’

그러니 큰 걱정은 없었다. 전직 황제라 돈도 많고. 은퇴해서 시간도 많고. 옆에는 강하고 잘생긴 남편도 같이 있고.

걱정할 것 없어 보이는 이 여행계획의 유일한 문제는 나와 해리의 외모였다.

황실에서는 수익을 목적으로 황가의 초상화 엽서를 판매했기 때문에, 우리의 얼굴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초상화를 본 적이 없어 정확한 생김새를 모르는 사람도 머리색이나 눈동자 색 같은 정보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해리의 얼굴은 지나치게 잘 생겨서 어딜 가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조용하게 여행하려면 어떻게든 얼굴을 가려야 했다.

‘가면이라도 쓰고 다녀야 하나?’

그랬다간 더 이목을 끌 것 같은데. 매일 후드를 푹 눌러 쓰고 다니면 범죄자로 오해받을 것 같고.

하지만 고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라파쉬와 마법사들 덕분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폐하! 조금 이르지만 이건 은퇴 선물이에요. 곧 대공 각하와 함께 여행을 떠날 거라고 들어서……. 이게 꼭 필요할 것 같았어요!

라파쉬의 선물은 그녀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팔찌였다.

-마법사들이 정신계 마법을 연구해서 새겨줬어요. 이걸 끼면 사람들이 얼굴과 목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대요. 흐릿한 인상으로 각인돼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나요?

설명을 들었지만 이런 종류의 마법 물품은 처음이라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제대로 작동하려나?’

출발하기 전에 제대로 시험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리저리 팔찌를 살피며 복도를 걷는데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근위대 기사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호위가 별로 필요 없는 입장이지만, 나는 ‘황제의 체면과 위엄이!’로 시작하는 인세티아 후작의 긴 연설을 견디다 못해 호위기사를 두고 있었다. 근위대 소속의 기사들이 두 사람씩 번갈아 가며 나의 호위를 맡고 있었는데, 지금 내 등 뒤를 따르는 기사는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팔다리가 약간 짧은 제복에다, 허리에 찬 검은 어딘가 엉성했다. 이 사람은 근위대 기사가 아니었다.

‘암살자라면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사의 모습을 훑었다. 내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그가 움찔거렸다. 머릿속에서 퍼즐이 하나둘 맞춰졌다. 마지막 조각은 손목에 찬 팔찌였다. 내 것보다는 디자인이 조금 더 투박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기사인 척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하는 것이 누가 봐도…….

‘해리네.’

그렇게 확신하는데도 해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게 팔찌의 효과구나.’

해리가 어설프게 굴지 않았다면, 나조차도 못 알아볼 정도로 팔찌의 효과는 확실했다.

‘여행은 걱정 없겠어.’

나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입을 열었다.

“경. 무슨 일이지? 할 말이라도 있나?”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으니 모르는 척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었다. 내가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했는지 초조해하던 기사의 얼굴이 의기양양하게 변했다.

‘다 티 난다고, 바보야…….’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해리가 당당하게 손을 뻗어 내 손을 붙잡았다.

“아름다우십니다, 폐하.”

해리가 기사들의 말투를 흉내 내며 허리를 굽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말투만 그럴듯했지 행동은 꽝이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주군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기사라니. 진짜 기사였다면 그대로 쫓겨날 무례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이미 들킨 줄도 모른 채 기사놀이를 하고 있는 내 남편이니 상관없지.

“기사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군. 다들 날 존경한다고 말할 뿐이거든.”

입에 발린 말이라면 누구든 하겠지만, 무시무시한 이브리아 오베론의 악역 얼굴을 보며 아름답다고 진심으로 웃어주는 건 해리뿐이었다. 내 말에 해리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눈이 삐었나 봅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데요.”

“그렇게 생각해주는 자가 있어 기쁘군. 좀 더 가까이 와 보겠나?”

“……예?”

“이런 칭찬을 해주는 기사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군.”

싱긋 웃으며 말하자 여유롭게 생글거리던 해리의 얼굴이 굳었다. 이미 손을 붙잡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이보다 더 가까워진다면 서로를 코앞에서 보는 거리였다.

“이런, 이런. 근위기사가 황제의 명령에 반문하다니. 단장이 어떻게 기사들을 교육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붙잡힌 손을 빼 해리의 턱을 붙잡았다.

“보자. 예쁜 말을 하는 자라 그런 걸까? 얼굴도 참으로 곱구나.”

“…….”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만족스럽게 웃는 내 모습에 해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느새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였다.

“좋아. 경, 오늘 밤 은밀히 내 방으로 와라.”

“……뭐?”

해리가 이를 바드득 갈며 반문했다. 자기가 기사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도 잊었는지 말투도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왜? 싫은가? 아름다운 여인과 최고의 밤을 보낼 기회인데. 내 뜨거운 밤을 보내게 해주지.”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해리를 살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그의 두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제 놀리는 건 슬슬 그만둬야 할 타이밍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해리!

하지만 뒷말은 입을 막아오는 거친 키스에 삼켜졌다.

‘어어어?’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나를 두고 해리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가 팔을 들어 입술에 번들거리는 타액을 슥 닦아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밤까지 기다릴 이유가 있습니까?”

“……응?”

“지금 당장 총애를 내려주시죠, 폐하.”

“……으응?”

어느새 말투는 기사 행세를 하는 것처럼 돌아와 있었다.

‘내가 눈치챘다는 걸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날이 밝을 때 해야 곱다는 이 얼굴도 제대로 보실 수 있잖습니까?”

“으악!”

해리가 어리둥절해서 눈을 껌뻑이는 나를 번쩍 들어 그대로 어깨에 들쳐멨다.

해리가 무서운 기세로 복도를 가로질러 익숙하게 침실의 문을 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불한당에 내부를 청소하고 있던 시녀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마 그녀들의 눈에는 내가 낯선 기사에게 강제로 끌려온 것처럼 보이겠지.

허둥대고 있는 시녀들을 방해꾼이라고 생각했는지 해리가 엄청난 악마의 기운을 뿜어내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방을 가득 채운 매서운 기운이 몸을 압박하자 시녀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벌벌 떨었다. 해리가 나눠준 그의 조각 덕분에 이런 기운에는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나조차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나는 가여운 시녀들에게 괜찮으니 그만 나가보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태연한 모습에 내가 안전하다고 판단했는지 시녀들이 떨리는 몸으로 겨우 인사를 올리고 침실을 떠났다.

드디어 문이 굳게 닫히고 해리와 나만이 침실에 남았다. 해리는 나를 침대에 내려놓고 상의를 벗어 던졌다. 사실 상의를 벗었다기보단 찢어버렸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이런. 해리에게 제복을 빌려준 기사에게 새 제복을 지급해야겠네.’

그러나 넝마가 된 불쌍한 기사의 제복을 걱정할 새가 없었다. 해리가 침대에 누워있는 내 위에 올라타 두 팔로 내 어깨를 눌렀다. 움직임을 구속당했으면서도 내가 아무런 위기감도 없이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자 해리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진짜 이 인상 흐릿한 자식이랑 같이 자기라도 할 생각이야? 원래 이렇게 인상 흐릿한 게 취향이었냐고!”

“아니, 그 인상 흐릿한 자식이…….”

해리 너잖아요.

하지만 해리가 다급하게 입을 맞춰온 탓에 내가 해명할 기회는 없었다. 내가 다른 기사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착각을 하는 탓인지 평소보다 입맞춤이 거칠었다. 나는 해리의 움직임에 휩쓸려 겨우 숨을 헐떡이며 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자 해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는 크게 충격받은 얼굴로 울먹이며 몸을 일으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안 그러는데. 나한텐 너밖에 없는데.”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해리가 금세 버럭 했다.

“넌 이딴 인상 흐릿한 자식이랑!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만 예뻐해 준다고 했으면서!”

어느새 해리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낯선 기사인 척하는 건 이제 잊은 모양이었다.

“해리.”

“왜!”

한숨 섞인 내 부름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해리가 곧 이상한 걸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어? 방금 내 이름 불렀어?”

“네. 해리라고 불렀어요.”

그가 영문을 몰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나는 손으로 해리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처음부터 알아봤어요. 얼굴이 달라졌다고 내가 해리를 몰라볼까 봐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난 뒷모습만 봐도 해리인 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로 나 알아보고 키스한 거야?”

“못 알아봤으면 처음 보는 기사한테 총애니 뭐니 하는 말을 왜 하겠어요? 이런 건 해리랑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든요?”

해리 하나 감당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걸 또 누구랑 한단 말인가. 내가 진심으로 질린 얼굴을 하자 의심에 가득 차 있던 해리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황제들은 원래 애첩을 많이 둔대. 멋진 황제일수록 애첩 수가 많댔어.”

해리가 울어서 코끝이 빨개진 얼굴로 우물거렸다.

“생각해보면 내 첫 계약자도 부인이 많았거든. 그런데 이브리아 넌 걔보다 몇 배는 더 멋진 황제니까…….”

“그래서 얼굴을 못 알아보게 하는 팔찌가 생긴 참에 날 시험하셨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해리가 펄쩍 뛰었다.

“시험이라니! 그냥 난…… 네가 다른 남자들한테는 어떻게 하나 그게 궁금해서…….”

뒤에서 열심히 작전을 짰을 해리가 상당히 귀여웠지만, 나는 일부러 화난 척 싸늘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시험했네. 나 못 믿어서 시험한 거 맞네.”

“이브리아. 화났어?”

“네. 화났어요. 감히 황제를 의심하고 기만한 죄를 물어 벌을 내려야겠는데요.”

“벌?”

벌이라는 말에 해리가 다급하게 물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는 하지 마! 응?”

“내가 겨우 그 정도 벌에 만족할 것 같아요?”

“아…… 그것보다 더 심한 벌이야?”

눈을 굴리며 더 심한 벌을 고민하던 해리가 곧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소리쳤다.

“설마 나 쫓아내려고?!”

“해리.”

나는 영 맥을 못 짚고 있는 해리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저 벗어요.”

“……응?”

“지금 입고 있는 옷, 마저 벗고 하려던 거 계속해요.”

“하, 하려던 거?”

“네. 나 여기 데려와서 뭐 하려고 했어요?”

내 질문에 해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 해리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들이 지나가고 있을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웃으며 해리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빼냈다. 그러자 마법이 풀리며 늘 내 곁을 지키는 잘생긴 악마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는 그 얼굴을 두 눈에 담으며 명령했다.

“그게 황제인 내가 그대에게 내리는 벌입니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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