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4/156)

외전 3

이브리아 오베론의 이상한 은퇴 생활

내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저쪽’ 세상에서는 이브리아 오베론. ‘이쪽’ 세상에서는 이예리.

그리고 나를 일개미처럼 부려먹었던 회사에서는…….

“이 대리님.”

그래. 이 대리였다. 회사를 때려치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앞에 앉아 울상을 짓고 있는 이 남자는 그 회사의 직속 후배였다.

“나 이제 이 대리 아닌데요. 지난주에 퇴사했잖아요.”

선을 딱 자르는 나의 말투에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남자가 금세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어……. 그럼 예리 누나?”

“미쳤냐, 장윤재?”

어이없는 호칭에 회사에서 후배를 대하던 습관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 그었던 선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윤재가 살랑살랑 살갑게 웃었다.

“아,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아주 여우 같은 놈이었다. 사실 이 업계에서 일하는 놈들은 대부분 이랬다. 나는 윤재의 말을 무시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예 부르지 마. 이제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뭐라고 부를 일이나 있어?”

“너무 매정하신 거 아니에요?”

“매정하긴 뭐가 매정해? 원래 직장에서 얻은 관계는 거기 나가면 다 없어지는 거야.”

“그래도 제 사수셨잖아요. 이 대리님께 충성을 바쳤는데.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취급하면 서운하죠.”

“서운하긴. 너도 흔한 직장 동료 1이니까 은근슬쩍 누나라고 부르지 마.”

“와. 진짜 너무해. 저 상처 받았어요.”

말로는 상처받았다며 가슴을 부여잡지만, 입가에는 습관처럼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짜 여우 같은 놈. 자기가 바라는 걸 얻기 전까진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그래서 뭔데. 할 말 있으니까 불러낸 거 아냐? 내가 하던 일은 완벽하게 정리해서 넘겼으니까 그 문제는 아닐 테고.”

“그럼요. 이 대리님 일 처리야 언제나 완벽하시니까요. 전혀 문제없었어요.”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칭찬에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하게 아부가 과하다? 불길하게. 진짜 뭐야?”

의심을 가득 품은 내 눈빛에 윤재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외쳤다.

“누나. 저도 데려가세요!”

“……데려가? 널? 어딜?”

“어디든요. 저도 누나 따라갈래요. 진짜 못 해 먹겠어요. 박 부장이랑 한 대리 다 미친 것 같다니까요?”

내 상사였던 박 부장과 동기였던 한 대리. 무능하고 사내 정치에만 관심 있는 인사들이었다. 덕분에 회사를 다니는 내내 내가 두 사람의 일을 다 떠맡다시피 했었다. 물론 성과는 두 사람의 몫이었고.

그런데 이제 내가 나갔으니 그 역할이 막내인 윤재에게 돌아간 모양이었다. 무능한 두 사람과 달리 윤재는 싹싹하고 눈치 빠르고 유능한 녀석이었다. 그런 후배라니. 일을 떠넘기기 딱 좋은 대상 아닌가.

“겨우 일주일이잖아. 더 버텨봐. 익숙해지면 나아지겠지.”

“누나. 똥은 그냥 똥이에요. 똥을 일주일 더 먹는다고 그게 된장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윤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저 누나 따라갈래요. 어느 회사로 스카우트 되셨어요? 과장급으로 가시는 거죠? 그럴 때 사람 하나 데려가는 경우 많잖아요.”

말이 상당히 구체적인 게 혼자서 꽤 생각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스카우트 돼서 사표 낸 거 아냐.”

“아. 그럼 사업 시작하시는 거예요? 하긴. 누나 인맥이랑 능력 생각하면 자기 회사 차리는 것도 어려운 건 아니죠.”

“그것도 아닌데.”

“그럼요?”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이는 윤재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나 그냥 평범한 백수인데?”

“……네? 누나가 백수요?”

잠시 굳어 있던 윤재가 별 우스운 농담을 다 들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에이. 누나가 어떻게 백수를 해요?”

“못할 건 또 뭐야?”

“왜요. 일복 있으시잖아요. 가만히 있어도 일이 찾아오는 스타일.”

맞다.

‘저쪽’에서도 ‘이쪽’에서도 난 가만히 있어도 일이 알아서 굴러들어오는 저주받은 인생을 살았지.

“응. 근데 이젠 아냐. 나 정말 백수라니까?”

그것도 시간 많고 돈은 더 많은 축복받은 백수.

“흐음…….”

하지만 윤재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도무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사람 팔자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닐 텐데…….”

“야. 그거 저주지?”

“저주가 아니라 정말 이해가 안 되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

내 호통에 당황해서 손을 내젓던 윤재가 목소리를 낮추며 내 뒤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 뒤에 앉은 엄청나게 잘생긴 형님은 누구예요? 제가 누나 맞은 편에 앉을 때부터 아주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아는 사람이에요?”

윤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해리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닐라 시럽을 3번 더 추가해 극강의 단맛을 자랑하는 아이스 바닐라라테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손가락으로 초조한 듯 탁자를 두드리던 해리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오물거렸다.

‘저 자식 언제 꺼져?’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던 윤재도 당연히 그 입 모양을 봤다.

살벌한 해리의 기세를 이겨낼 인간은 없었다. 아무리 넉살 좋은 윤재라도 마찬가지였다. 금세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픽 웃으며 윤재를 쳐다보았다.

“너 지금 꺼져야겠는데?”

“네. 조용하고 재빠르게 꺼지겠습니다.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윤재가 제 말처럼 조용하게 빠르게 일어섰다.

자리를 완전히 떠나기 전 할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데 제가 보기에 누난 백수 하긴 틀린 팔자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일 시작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저게 끝까지!”

나는 저주를 남기고 떠난 윤재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백수 하긴 틀린 팔자라니.

윤재의 말이 아예 틀린 게 아니어서 문제였다. 사실 내게는 시간 많고 돈은 더 많은 백수 생활의 기회가 한 번 더 있었다.

바로 ‘저쪽’ 세계에서 말이다.

* * *

나는 성인이 된 셜리에게 양위하고 드디어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은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 나의 은퇴를 강력하게 지지한 건 나와 함께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인세티아 후작이었다. 내가 양위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쉴 새 없이 훌쩍이는 그를 본 사람들은 ‘후작께서 황제의 퇴위를 진심으로 슬퍼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이거였다.

-드디어…… 제게도 자유가 찾아오는 것입니까?

얼마나 기뻤는지 후작은 애지중지하던 술 창고를 개방해 사흘 밤낮으로 파티를 벌였을 정도였다.

-후작은 은퇴하면 뭘 하면서 여생을 보낼 거야?

-남부로 갈 겁니다.

-이젠 따뜻한 곳에서 살아 보려고? 하긴. 은퇴한 뒤엔 따뜻한 휴양지에서 느긋하게 보내는 삶이 제격이지.

-아뇨. 전 그냥 에렐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을 뿐입니다.

-응? 왜?

-에렐 가까이 있다간 언제 복귀하라며 끌려올지 모르니까요. 다음 황제가 샤를로트 님이신 이상 방심할 수 없습니다.

-……일리가 있어.

나는 인세티아 후작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어디든 좋으니 폭풍의 핵이나 다름없는 수도를 벗어나는 게 중요했다.

은퇴하자마자 에렐에서 도망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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