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샤를로트 오베론의 사연 많은 아홉 살 인생
안녕하세요, 저는 샤를로트 오베론입니다. 올해 나이는 아홉 살이에요.
먼저 우리 가족을 소개해드릴게요. 우리 가족은 총 다섯 명입니다. 멋진 엄마와 성가신 아빠, 귀여운 남동생 두 명과 제가 있어요.
엄마는 제국의 황제 이브리아, 아빠는 오베론 대공 해리, 두 남동생은 제국의 황자 아시어스와 칼릭스라고 해요. 그리고 저는 보통 셜리라는 애칭이나 황녀님 같은 호칭으로 불린답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소개말을 보고 항의할 사람이 두 명이나 있어요. 그건 바로 아빠와 로이 오빠입니다.
아빠는 성가시다는 수식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틀린 말이라고요. 자기는 성가신 게 아니라 아주 늠름하고, 성숙하고, 사려 깊다나요? 사실 이 뒤에도 수식어를 수십 개씩 더 늘어놓곤 합니다. 말할 때마다 매번 수식어가 달라지는데, 하나같이 멋있어 보이는 말이라는 건 똑같아요.
하지만 그건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여기에서까지 언급하진 않을 거예요. 이 글을 읽는 사람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엄마가 말하길 시간은 금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다른 건 돈으로 살 수 있어도 시간은 그럴 수가 없다고요.
저는 그 말이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답니다. 엄마는 언제나 옳은 이야기만 하거든요.
사실 아빠가 철없다는 말도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말이 틀릴 수가 있겠어요?
아빠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매우 야박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빠는 전설 속 대마법사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강력한 불을 다뤘다는 전설 속의 냉혹한 대마법사처럼 아빠도 엄청난 마법을 씁니다. 입을 꾹 다물고 무표정하게 있을 때면 전설 속의 대마법사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무서워 보이기도 해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는 아빠를 보면 저마저도 저 멀쩡하게 멋진 남자가 정말 우리 아빠인가 싶을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황가 공식 기념품으로 파는 초상화 엽서 속의 모습을 보고는 ‘그래, 우리 아빠가 이렇게 생겼었지?’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아빠를 멋진 대마법사님, 늠름한 대공 각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생김새 하나만은 정말로 완벽하니까요.
그런 분들을 위해 몇 가지 일화를 알려드릴게요. 이건 제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의 저는 배가 고프다고,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심심하다고 엉엉 우는 것밖에 못 하던 어린 꼬맹이였지요.
그러니 제가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건 아니랍니다. 제가 아무리 영특한 어린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이 이야기는 리던 아저씨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 리던 아저씨는 엄마의 부하예요. 예전엔 번듯한 왕자님이었다는데, 요즘은 매일 서류에 파묻혀서 눈 밑이 퀭합니다. 그래서 저는 리던 아저씨가 번듯한 왕자님이었다는 말을 상당히 의심하고 있어요.
물론 이 의심은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럽답니다. 리던 아저씨는 쩨쩨한 면이 있거든요. 제가 이런 의심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함께 차를 마실 때 더는 자기 몫의 쿠키를 양보해주지 않을 테지요.
설마 다 큰 어른이 그렇게 쩨쩨하게 굴 것 같으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그렇다고 대답할 거예요. 리던 아저씨는 이미 제게 쿠키를 양보해주지 않은 전적이 있습니다. 이유가 뭐였냐고요?
-이카난은 오빠라고 부르면서 왜 나는 아저씨야? 나이도 이카난이 훨씬 더 많은데?
아니, 이게 말이 되는 항의인가요? 이카난 오빠는 엘프입니다. 엘프의 나이가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건 당연한 일이지요. 엘프는 엘프니까요. 그러니 절대적인 나이는 이카난 오빠가 리던 아저씨보다 더 많습니다. 하지만 엘프의 나이를 인간의 나이로 환산하면 리던 아저씨보다 이카난 오빠의 나이가 더 어리지요.
게다가 리던 아저씨는 저를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 놀릴까 작정한 사람처럼 능글맞게 구는 심술쟁이입니다. 이카난 오빠는 함께 나무에 올라 새를 보여주거나, 신기하고 맛있는 과일을 따주며 놀아주고요.
물론 호칭에 사심이 들어간 건 절대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논리적이며 객관적인 이유로 리던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지요.
저는 최대한 논리적으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저도 이제 논리라는 걸 충분히 아는 나이니까요. 아홉 살이란 그런 나이 아니겠어요?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제 말을 모두 이해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리던 아저씨는 아무리 설명해도 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리곤 제가 오빠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쿠키를 양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뭐예요?
저는 정말 황당했습니다. 아홉 살이 이해하는 내용을 왜 다 큰 어른이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모두 이해하는데 괜히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요? 도대체 아저씨에게 오빠라는 호칭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황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저를 앞에 두고 리던 아저씨는 제 앞에서 보란 듯이 쿠키를 마구 씹어 삼켰습니다. 한 번에 두 개씩이요! 그리고는 정말 얄밉게도 부스러기 한 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라즈베리 치즈 쿠키였고, 그 사실을 리던 아저씨 역시 알고 있었는데도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진실을 수호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양심을 내려놓고 리던 아저씨를 오빠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양심을 판 대가로 저는 라즈베리 치즈 쿠키를 얻을 수 있었지요.
저는 제 안의 양심을 저버린 것을 사죄하기 위해서 리던 아저씨를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태양신께 고해성사를 한답니다. 부디 신께서 라즈베리 치즈 쿠키에 양심을 저버린 가련한 어린이를 용서해주시기를. 하지만 라즈베리 치즈 쿠키는 정말 맛있어서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튼, 이건 자신을 오빠라고 주장하는 쩨쩨한 리던 아저씨가 해 준 옛날이야기입니다.
저를 낳을 때 엄마는 아주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픈 경험은 처음이었대요.
저는 왜 그렇게 엄마를 아프게 했을까요?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가 아프지 않게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나올 거예요. 그럼 엄마가 덜 힘들지 않을까요?
아빠는 힘들어하는 엄마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고 합니다. 뭐든 해 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힘들었대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엉엉 울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정신 사납다며 결국 쫓겨나기까지 했답니다.
쫓겨난 뒤에도 문 앞에서 계속 통곡하는 바람에 리던 아저씨가 로이 오빠를 불러서 아빠를 기절시켜달라고 했지요. 하지만 불려온 로이 오빠도 엉엉 울어대는 통에 사태가 더 악화됐대요.
아빠는 저를 아주 사랑하지만, 딱 한 번, 태어나면서 엄마를 아프게 했을 때 저를 조금 미워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아빠가 저를 잠시라도 미워했다는 소리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나를 미워하는 아빠라니. 세상에, 어떻게 그걸 상상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아시어스와 칼릭스가 태어날 때 저도 아빠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보 같은 동생들이 태어날 때도 저처럼 엄마를 힘들게 했거든요.
아기들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사람의 말을 들을 수가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저는 엄마가 잠들었을 때 몰래 배에다 속삭였어요. 너희는 태어날 때 몸을 잔뜩 웅크리고 나오라고요. 그러면 엄마가 덜 힘들 거라고요. 태어나는 걸 먼저 체험해 본 인생의 선배로서 요령을 알려 준 거지요.
하지만 동생들은 제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엄마를 힘들게 했어요. 그때 저도 아빠처럼 잠시 바보 같은 두 꼬마를 미워했답니다.
그렇게 저를 잠시 미워하던 시기, 아빠는 엄마에게 다소 멍청한 선언을 했어요.
-차라리 내가 애를 낳겠어! 그러면 되잖아?
-…네?
-다음부턴 내가 애 낳을게! 너 아픈 걸 내가 어떻게 봐….
엄마는 그때 아빠가 미친 줄 알았대요. 하지만 오랫동안 아빠를 돌봐온 경험 덕분에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진심이에요?
-진심인데?
-애를 낳으려면 임신부터 해야 하는데, 남자가 어떻게 임신을 해요.
-그렇구나. 그게 문제네.
그렇게 대화가 흘러가자 엄마는 아빠를 잘 설득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아빠의 모자람을 과소평가했던 엄마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그럼 남자가 임신하는 법부터 알아내면 되겠다!
그리고는 아빠는 정말로 ‘남자가 임신하고 아이 낳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지요. 정말 진지한 마음으로요.
아빠의 요청에 따라 제국의 공식 지식 폭력배, 공인받은 물음표 살인마, 메이슨 재상님이 이 연구에 합류했습니다.
메이슨 재상님은 제국 제일의 천재 학자로, 저의 스승님이기도 해요. 정말로 박식한 분이셔서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계시지요.
혹시 스승님께서 이 글을 읽을까 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스승님을 향한 저의 존경심은 언제나 진실로 가득 차 있거든요.
존경하는 메이슨 재상님은 아빠의 연구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셨다고 해요. 그런데도 아빠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임신과 출산에 관한 많은 연구를 이어갔지요. 이게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래요.
그전까지 제국에서는 임신과 출산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이 대부분 남자라 애초에 그걸 연구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나 봐요. 그러니 그 분야에 얼마나 물음표가 많았을까요? 공인된 물음표 살인마 메이슨 재상님은 신이 나서 아빠의 제안을 받아들였지요.
남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아빠의 열정은 3년이나 이어졌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예산이 편성되지 않아서 아빠가 사비를 털어 연구를 진행했대요. 메이슨 재상님은 이처럼 풍족한 지원 속에서 진행한 연구는 처음이었다고 그때를 회상했습니다. 모든 연구가 그때와 같으면 바랄 게 없겠다고요.
하지만 그런 연구 끝에도 남자가 임신하고 출산하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대신 임신과 출산에 대한 학문이 크게 발전해서 아이를 낳다가 죽는 평민들이 크게 줄었대요. 어떤 지방에서는 아빠를 다산의 신, 순산(順産)의 신으로 부르기도 한다나요? 아이를 낳을 때 아이와 엄마의 건강을 기원하며 아빠의 초상화를 붙여두는 사람들도 있대요.
하지만 정작 아빠는 자기가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해서 3일이나 방 안에 틀어박혔대요. 그걸 달래준 건 당연히 우리 엄마입니다. 땅을 파고 들어간 아빠를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엄마 한 명뿐이거든요.
이제 우리 아빠가 얼마나 성가신 사람인지 잘 아시겠죠?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년 전, 엄마의 생일 무렵 있었던 일입니다. 아빠는 엄마의 생일이 다가오기 한 달 전부터 비밀스러운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어요. 엄마의 생일이 되는 0시를 기다렸다가 직접 만든 케이크를 내밀며 제일 먼저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겠다는 아주 단순한 계획이었지요.
사실 이게 비밀스러운 깜짝 파티라는 건 아빠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멋진 케이크 만들기를 연습한다며 황성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그게 어떻게 비밀이 될 수 있겠어요? 엄마는 아빠가 준비를 시작한 첫날부터 모든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즐거움을 위해서 최대한 모르는 척 애써주었어요.
물론 한 번씩 아빠를 떠보는 것까지 포기하진 않았어요. 바보 같은 변명을 하며 당황스러워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지요.
-해리. 요새 바빠 보이던데요?
-어, 음, 내가?
-네.
-아, 아닌데? 나 하나도 안 바쁜데? 정말인데?
-그래요? 라파쉬가 그러던데요. 해리가 주방을 자주 얼쩡거린다고요.
-아, 아닌데? 나 주방에 안 갔는데? 내가 왜 거길 가.
-그렇죠? 해리가 거기 갈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에이, 그럼 라파쉬가 잘못 봤나 보다.
-맞아! 잘못 본 거야! 그렇고말고!
-아, 그런데 왜 해리한테서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죠? 내 코가 이상한가?
-히끅!
얼마나 놀랐는지 아빠의 딸꾹질은 1시간 동안이나 멈추지 않았대요. 엄마는 아빠를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데, 저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저게 어떻게 재미없을 수가 있겠어요!
아빠는 혼자서는 일이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저를 작전에 끌어들였어요. 저는 이 성가신 계획이 이미 들켜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아빠의 작전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빠가 제게 맡긴 역할이 시험 삼아 만든 케이크 먹어보기였거든요. 케이크를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요!
하지만 아빠의 케이크는 제가 생각하던 케이크가 아니었습니다.
-…아빠, 이게 뭐야?
-…케이크.
-…확실해?
-…확실하지.
아빠도 자기 잘못을 아는지 대답하는 게 아주 느렸어요. 그건 누가 봐도 씹다 뱉은 닭고기 같았거든요.
하지만 아빠가 정말 열심히 만든 케이크였어요. 저는 옆에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고요. 다른 사람이 줬다면 욕을 해줬겠지만, 저는 아빠의 노력을 생각해서 꾹 참고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셜리!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식중독으로 3일을 앓았지요.
맹세컨대, 그건 샤를로트 오베론의 9년 인생에서 가장 괴상한 맛이 나는 음식이었습니다. 앞으로 그걸 뛰어넘는 음식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절대 아빠가 만든 음식을 먹지 않을 테니까요.
아빠는 제가 식중독으로 앓는 동안 계속 곁을 지키며 미안하다고 훌쩍거리셨대요. 제게 괴상한 걸 먹여 아프게 했다며 엄마에게 크게 야단까지 맞아서 결국 케이크 만들기는 포기했습니다. 저의 희생으로 엄마의 미각을 지킨 셈이죠.
시무룩해진 아빠는 굴하지 않고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생일 케이크가 안 된다면, 생일 선물을 직접 만들래.
아마도 아빠는 이때까지도 자기가 뭘 만드는 재주가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모두가 잘 아시겠지만, 우리 아빠는 매사에 자신만만하니까요. 물론 그 자신만만함의 결과 역시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네 엄마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어서 선물하면 어떨까?
아마 그 조각은 엄마가 아니라 눌어붙은 오크의 형상을 하고 있겠지요.
-아빠. 그냥 라파쉬 언니에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자.
-그럼 의미가 없잖아?
아빠는 라파쉬 언니의 도움을 받아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아빠의 조각 솜씨가 요리보다는 나았다는 점입니다. 요리‘보다는’요.
아빠가 만드는 조각은 조금씩 사람의 형상을 갖춰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위엄 넘치는 엄마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게 어딘가요.
문제는 그렇게 어떻게든 사람의 모습으로 조각을 깎아내느라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엄마 몰래-사실 엄마는 전부 알고 있지만- 잠을 줄여가며 조각 만들기에 매진했지만, 생일 하루 전까지도 조각을 완성하지 못했어요. 생일 일주일 전부터는 아예 잠도 자지 않고 조각 만들기에 집중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문제였을까요.
아빠가 깜짝 파티를 준비했던 엄마의 생일. 오전 0시. 대망의 그 순간.
-엄마. 아빠 잠들었는데?
-이럴 줄 알았어. 그러게 잠은 자면서 했어야지.
엄마는 겨우 완성된 조각을 손에 꼭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빠를 보며 혀를 끌끌 찼어요.
-셜리, 이걸 머리맡에 두고 자면 악몽 꿀 것 같지 않니? 아무리 봐도 내 모습은 아닌 것 같아.
-응. 그래도 사람처럼은 보이잖아.
-그렇지? 난 눌어붙은 오크 조각을 받게 될 줄 알았거든.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엄마의 입에는 예쁜 미소가 걸려 있었지요. 아빠는 이 순간을 모르겠지만, 아빠의 생일 선물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저는 그렇게 웃는 엄마의 뺨에 뽀뽀하며 올해의 첫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고마워, 셜리. 하지만 괜찮겠어?
-뭐가?
-네가 자기보다 먼저 축하 인사를 했다는 걸 알면 네 아빠가 토라질 텐데.
-겨우 이것 때문에?
-응. 겨우 그것 때문에.
-에이. 설마. 아빠가 그렇게까지 유치하려고.
전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빠는 제 상상 이상으로 유치했습니다. 뒤늦게 일어나 제가 엄마에게 처음으로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는 걸 알고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거든요.
-셜리. 어떻게 네가 내 첫 번째를 뺏을 수 있어? 널 굳게 믿었는데!
아빠가 말하기를, 그게 제가 두 번째로 미워진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토라진 아빠를 달래느라 제가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찾아가서 사랑한다고 말하며 뺨에 뽀뽀를 열 번씩 해줘야 했다니까요.
나중에 듣기로는, 사실 하루 만에 화가 풀렸지만 제 뽀뽀를 계속 받고 싶어서 화난 척 한 거였대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니. 역시 저는 아직 엄마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모양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왜 아빠에 대한 저의 평가가 야박한지를 이해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제가 쓴 가족 소개를 보고 씩씩댈 또 다른 한 사람, 로이 오빠의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로이 오빠가 제 가족 소개에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로이 오빠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로이 오빠는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자기가 제 오빠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해요. 제가 아시어스와 칼릭스의 누나인 것처럼, 자기가 제 오빠라고요. 하지만 저는 로이 오빠를 절대 제 오빠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로이 오빠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게 좋겠지요.
로이 오빠는 이제 10살입니다. 저보다는 1살이 더 많은 거지요. 하지만 겉모습은 벌써 어른이에요. 아빠보다도 키가 더 큽니다. 로이 오빠가 인간이 아니라 자라는 속도가 빨라서 그렇다는데, 도대체 무슨 종족이면 그렇게 자라는 속도가 빠른 걸까요?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로이 오빠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정답을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저는 여러 책을 찾아보며 홀로 추리를 하고 있답니다.
빨리 자라는 것 말고도 단서는 몇 가지 더 있어요. 먼저, 로이 오빠는 엄청나게 힘이 셉니다. 엄청나게 강한 아빠와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대 중 하나가 바로 로이 오빠래요.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기사단장인 엘 아저씨가 한 말이니까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엘 아저씨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요령 없으면서도 가장 진실한 사람이거든요. 제가 보기엔 덩치만 큰 바보인데, 엘 아저씨가 인정할 정도로 강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빠도 그렇고, 로이 오빠도 그렇고……. 태양신께서는 어째서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강한 힘을 주신 걸까요? 아빠는 엄청난 마법을 엄마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데 쓸 뿐이고, 로이 오빠는 엄청난 힘을 저를 번쩍 안아 올릴 때 쓸 뿐인데요.
또 다른 단서는 로이 오빠를 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드워프인 라파쉬 언니도, 엘프인 이카난 오빠도, 와이번 대장 아저씨도. 로이 오빠를 볼 때는 눈빛이 달라져요. 그게 너무 이상해서 와이번 대장 아저씨에게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조심한다. 위대한 존재. 숙인다. 고개를.
-왜 로이 오빠가 위대한 존재인데요?
-침묵한다. 나는. 송구하다. 작은 다람쥐. 못한다. 말. 없었다. 협박! 확실!
-…설마 로이 오빠가 저한테 말하지 말라고 협박했어요?
-아니다. 부정! 부정!
한 번도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는 엄마는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라고 하셨어요.
로이 오빠는 주변 사람들을 협박해서 제게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는 중이었던 겁니다! 제가 로이 오빠의 정체를 정말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요!
저는 엄청난 배신감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저를 동생이라고 부르면서. 매일 저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저를 시도 때도 없이 끌어안으면서. 자기 정체를 이렇게까지 감추다니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아는 사실을 왜 저한테만.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 저는 그때부터 로이 오빠를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로이 오빠가 말을 걸면 못 들은 척했고, 저를 끌어안으려고 하면 오빠를 밀어내고 멀리 도망쳤어요.
처음에는 제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런 생활이 일주일이 넘어가자 로이 오빠도 제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았습니다.
-셜리. 나한테 화났어? 왜?
-…….
-전부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화 풀어.
-…….
-나랑 화해해주면 안 돼? 라즈베리 치즈 쿠키 가져왔는데.
라즈베리 치즈 쿠키! 잠시 흔들릴 뻔했지만 저는 꾹 참았습니다. 로이 오빠에게 정말 많이 화가 났으니까요. 저는 로이 오빠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습니다.
그게 몇 번이나 반복되자 로이 오빠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미워. 나 안 봐주는 셜리. 이유도 말 안 해 주고. 정말 밉다. 나빴어.
상처받은 게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였습니다. 제가 퉁명스럽게 대해도 늘 웃으면서 받아주는 로이 오빠가 이런 목소리를 낼 때가 있다니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로이 오빠를 쳐다보았지만, 그 자리는 이미 텅 비어있었어요.
그날부터 로이 오빠는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도 로이 오빠를 찾아가지 않았어요. 우리는 소리 없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먼저 상대를 찾아가는 쪽이 지는 거였지요.
로이 오빠와 이런 다툼을 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로이 오빠가 먼저 저를 찾아올 거라고 확신했어요. 밤이고 낮이고 매일 저를 졸졸 쫓아다녔던 로이 오빠였으니까요.
하지만 로이 오빠는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저는 무척이나 우울해졌습니다.
시녀들은 저를 달래주려고 맛있는 간식을 계속 가져왔지만,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요. 시녀들이 저를 달랠 때마다 오히려 더 서글퍼져서, 저는 혼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로이 오빠와 함께 갔던 비밀 통로를 통해 몰래 검은 숲으로 향했어요.
하지만 그곳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멋진 검은색 비늘을 가진 커다란 용이었어요!
와아. 저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습니다. 제 목소리에 놀란 용이 잠에서 깨어나 도망가는 걸 원하지 않았거든요.
저는 조심스럽게 검은 용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제 발자국 소리가 너무 컸는지 잠들어 있던 용이 그만 눈을 번쩍 뜨지 뭐예요?
검은 용은 제 예상대로 놀라서 눈을 크게 떴습니다. 당장이라도 날갯짓을 해서 멀리 날아갈 것처럼 보였어요.
-가지 마!
하지만 제가 다급하게 외치자 펼쳤던 날개를 접고 가만히 저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아마 제가 무서워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어요. 정말 우스운 걱정이었지요.
-무섭지 않아. 난 용감하거든. 커다란 와이번도 많이 봤는걸. 물론 와이번은 너보다 훨씬 작지만….
하지만 이렇게 용감한 저에게도 커다란 용을 보고 놀라서 자지러진 경험이 있답니다. 물론 아주 어릴 때의 일이에요.
아빠는 그때 제가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면서,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한다고 고개를 내저어요. 그러면서 ‘멋진 모습 보여주겠다고, 용을 안 좋아하는 어린애는 없다고 난리더니만! 내 딸을 죽일 뻔해?’하고 길길이 날뛰지요.
-가까이 가서 만져봐도 돼?
제 말에 검은 용이 커다란 눈을 끔뻑댔어요. 어딘가 얼빠진 얼굴이었지요.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저는 반갑게 검은 용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검은 비늘을 만져보았습니다. 차갑고 미끈했어요.
-신기하다…
제가 비늘을 쓰다듬을 때마다 검은 용은 몸을 떨었어요. 분명 사람의 손길이 낯설었기 때문이겠죠.
-검은 용아. 내가 지금 누구랑 싸우는 중인데, 내가 먼저 사과해야 할까?
저는 이 검은 용에게 속에 품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기로 했습니다. 아는 사람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이야기였는데, 때마침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외칠 좋은 상대를 만난 거지요.
저는 검은 용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습니다. 로이 오빠가 누군지, 어쩌다 싸우게 됐는지, 왜 내가 화가 났는지, 내가 지금 얼마나 우울한지. 검은 용은 조용히 제 이야기를 들어줬어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로이 오빠를 모르고 있다는 게 너무 서운해. 로이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싶은데… 그것도 모르고….
말을 하다 보니 서러워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검은 용은 어쩔 줄 몰라서 날개를 퍼덕거렸지요.
-게다가 자기가 내 진짜 오빠래. 난 절대로! 절대로 인정 못 해.
서글픔에 소리를 빽빽 지르자 검은 용이 날개를 퍼덕거리는 걸 멈추고 제 얼굴을 빤히 쳐다봤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왜냐고 이유를 묻는 것 같았어요.
-왜냐고?
저는 코웃음을 흘리며 이렇게 대답했지요.
-로이 오빠가 내 진짜 오빠면 결혼을 못 한단 말이야!
-…으엉?
-난 커서 로이 오빠랑 결혼할 거거든. 그런데 가족끼리는 결혼할 수가 없다잖아. 그러니까 로이 오빠가 진짜 오빠라는 건 결사반대야. 응.
-으헝?!
제 말에 검은 용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어요.
-휴. 로이 오빠는 내 속도 모르고 계속 자기가 진짜 오빠래. 정말 눈치도 없어.
자길 진짜 오빠로 인정해달라며 떼를 쓰던 로이 오빠의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한숨이 나왔어요.
눈치 없는 걸로 순위를 매긴다면 로이 오빠가 세계 2등일 겁니다. 1등은 당연히 우리 아빠 차지고요.
하지만 눈치 없는 건 그냥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엄마가 그랬거든요. 남자들은 원래 눈치가 없으니 우리가 관대하게 넘어가 줘야 한다고요.
-이번엔 내가 먼저 사과하러 가야겠어. 나한테만 비밀을 만든 게 괘씸하지만, 이렇게 계속 얼굴을 안 보는 건 내 손해니까.
어쩌겠어요. 좋아하면 원래 그런 거지요. 이건 우리 아빠의 가르침이랍니다.
-대신 다른 사람이 모르는 로이 오빠의 비밀을 내가 알면 되지 않을까? 무슨 비밀을 알아내지? 어? 검은 용아. 그런데 너 지금 온몸이 새빨개. 어디 아파?
샤를로트 오베론의
사연 많은 아홉 살 인생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