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2/156)

* * *

그렇게 한 마리의 악마가 굳건하게 절식(節食)을 다짐한 지 사흘째. 지독한 마음을 먹고 식사량을 반이나 줄인 악마는 눈에 띄게 초췌해진 상태였다. 이브리아가 이상함을 눈치챈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음식을 깨작거리는 해리를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해리. 요새 음식을 너무 못 먹는 거 아니에요?”

평소에는 밥을 10공기씩 비우던 해리가 겨우 5공기만 비우고 수저를 내려놓다니. 어디 아픈 것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디가 아프기에 밥을 이렇게 못 먹어요?”

확신에 찬 이브리아가 유심히 해리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하지만 해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의문을 부정했다.

“나? 아냐. 안 아파.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

거짓말에는 도통 재주가 없는 해리였지만 아픈 곳이 없다는 것만은 진실이었다. 그는 단지 배가 아주 많이 고플 뿐이었다. 덕분에 그의 대답에는 퍽 신뢰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입맛이 없다는 해리의 말은 믿기가 힘들었다. 이브리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입맛이 없다고요? 해리가?”

천지가 개벽할 사건이었다. 고무를 튀겨서 가져다 줘도 맛있게 먹을 위인이 입맛이 없다니. 이브리아는 잠시 고민하다 슬그머니 해리에게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졌다.

“음. 그럼 오늘 치킨 먹을까요?”

“……치킨?”

“네. 엄마 손길 치킨요. 해리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요.”

침울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해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금빛 튀김옷을 입은 바삭한 프라이드치킨은 해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눈을 반짝였던 해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나 입맛 없다니까…….”

아. 오늘은 치킨 먹을 입맛이 아닌가? 치킨이 반갑지 않은 날이라니.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런 날이 하루쯤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른 게 먹고 싶은가?’

이브리아는 곧장 해리가 프라이드치킨 다음으로 좋아하는 음식을 제시했다.

“그럼 짜장면으로 할래요? 탕수육도 같이 먹어요.”

“짜장면? 탕수육?”

축 늘어졌던 해리가 다시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총기는 잠시뿐이었다.

“아, 아냐. 됐어. 나 정말 입맛이 없어서 그래. 그냥……. 자러 갈게…….”

해리가 괴로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힘없이 닫히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브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상한데.’

해리가 홀로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먹을 걸 줄이는 거로는 부족해.’

해리는 출근하는 이브리아를 배웅한 뒤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집을 나섰다.

‘나도 일을 해야겠어.’

이브리아가 매일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자신이 집에서 놀고먹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그는 얼마 전 이브리아와 함께 본 영화를 떠올렸다.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사람이 등장하기에 그 장면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저쪽’ 세계에서는 마담 루이제의 책이 그를 가르쳤다면, ‘이쪽’ 세계에서는 영화나 드라마가 그의 스승이었다.

‘알바 급구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는 곳에 들어가서 일을 시켜달라고 하는 거였지.’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 그리고 돈을 벌어 이브리아를 돕는 거다. 해리는 꿈과 희망에 부풀어 보무당당하게 거리를 누볐다.

하지만 넘치는 의욕과 달리 며칠을 돌아다녀도 직원을 구한다는 종이를 붙여둔 가게가 눈에 띄지 않았다.

‘역시 이론과 실전은 다르군.’

마담 루이제의 책도 실전과 다른 부분이 많았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일이 생각했던 것처럼 풀리지 않자 애써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해리는 집에서 가까운 공원 벤치에 대충 늘어져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이브리아를 도와줄 수가 없잖아.’

그렇게 침울함을 속으로 삼키고 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렇게 공원에 앉아 있으면 늘 일어나는 일이었다. 해리는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날카롭게 고개를 돌렸다가, 그 끝에 어린 여자아이들이 서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눈에 힘을 풀었다.

10대 초반 정도일까? 어쩌면 그보다 어릴지도 모른다.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관찰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딸 샤를로트의 어릴 적이 떠올라 경계심이 풀어졌다.

해리와 눈이 마주치자, 그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들이 새빨개진 얼굴로 비명을 꺅꺅 질러댔다.

“야. 진짜 있어! 중앙공원 꽃거지!”

“미쳤다. 완전 잘생겼어.”

“외국인인가?”

“야, 너 영어 잘하잖아. 네가 말 걸어봐.”

“뭐라고 말을 걸어?”

“그냥 아무 말이나 해봐! 목소리 한 번 들어보게.”

아이들이 해리를 앞에 두고 작게 수군거렸다. 물론 청력이 일반인보다 훨씬 좋은 해리는 속닥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알아들었다.

“내 목소리가 왜 궁금한데?”

“악!”

툭 하고 던진 말에 아이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해리를 바라보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국말 할 줄 아세요?”

“응.”

태양신 솔의 안배였는지 해리는 자연스럽게 이곳의 말과 글을 구사할 수 있었다.

“혼혈이에요?”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한국말을 잘해요?”

“내 주인님이 여기 사람이라.”

“주인님이요?”

“응. 내 부인. 진짜 예뻐. 똑똑하고.”

이브리아를 자랑하느라 해리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이들은 다시 꺅꺅 비명을 지르며 슬금슬금 해리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와. 결혼하셨구나. 하긴 이 얼굴에 임자가 없을 리가 없어.”

“맞아. 없으면 이상하지.”

“그런데 여기서 뭐 하세요?”

한 아이의 질문과 동시에 이브리아를 자랑하느라 정신없던 해리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 혹시 배고프세요?”

해리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의 배에서 조금 전보다 더 요란하게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그를 둘러싼 아이들이 안쓰럽다는 듯 해리를 쳐다보며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누군가가 가방을 뒤적여 빵을 하나 꺼냈다.

“이거 드실래요?”

“나 돈 없는데.”

“파는 거 아니에요! 그냥 드리는 건데.”

“그냥 준다고? 왜?”

‘그거야 네가 너무 잘생겨서죠.’

뭐라도 퍼주고 싶은 잘생김이라고나 할까. 아이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며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가진 먹거리를 해리 앞에 내밀었다.

“어어…….”

얼떨결에 그들이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더니 금세 그의 품이 빵과 과자로 가득 찼다.

“뭘 잘못해서 쫓겨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나 쫓겨난 거 아닌데?’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해리가 큰 잘못을 저질러 부인에게 쫓겨난 게 틀림없다며 확신한 상태였다.

“잘못했을 땐 무조건 솔직하게 말하고 싹싹 빌어요.”

“쓸데없이 변명하면 그게 더 열 받거든요.”

“그래도 용서를 못 받으면 얼굴을 들이대요! 오빠는 그게 먹힐걸요?”

“맞아요. 화가 났다가도 쳐다보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얼굴이야.”

아이들은 해리를 위해 성심성의껏 조언을 쏟아낸 뒤 학원에 갈 시간이라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해리는 폭풍처럼 나타났다가 폭풍처럼 사라진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제 품에 가득 안긴 빵과 과자를 쳐다보았다. 먹음직스러운 빵을 보자 입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해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빵을 들어 포장지를 벗겨내고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고소한 풍미와 적당한 달콤함이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해리는 제 손과 크기가 비슷한 빵을 단 두 입에 해치우고 다음 빵의 포장지를 벗겨냈다.

기분 좋게 빵을 한 입 베어 물려는 순간. 다시 한번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공원을 지나가는 아이들이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던 해리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출근하겠다며 아침 일찍 집을 나섰던 이브리아가 제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이브리아?”

손에 들려있던 빵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브리아는 팔짱을 낀 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빵을 쳐다보았다.

“입맛이 없다더니.”

“어, 그게…….”

해리가 당황해서 허둥대며 아이들이 준 먹거리를 옆으로 밀어냈다.

“왜 여기에 있어? 일하러 간댔잖아.”

“휴가 냈어요. 요새 계속 이상했잖아요. 그래서 일하러 가는 척하고 나온 뒤에 해리 뒤를 밟았죠. 그랬더니…….”

한참이나 동네를 배회하다 공원에 앉아 연신 한숨을 내쉬더니, 아이들이 주는 빵을 허겁지겁 먹는 해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을 좀 해줄래요?”

“그게…….”

“내가 만들어 준 음식은 입맛이 없다며 먹지도 않고, 매일 정처 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다 침울한 얼굴을 하고…….”

이브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혹시 고향이 그리워서 그래요?”

“……어?”

예상하지 못한 말에 해리가 눈을 크게 떴다.

“해리가 살던 곳이랑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잖아요. 적응 못 하고 힘든 것도 당연하죠. 해리의 모든 건 다 그쪽에 있으니까.”

해리는 ‘저쪽’ 세상에서 강한 악마로 군림하며 지배자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쪽’에서 살아가려면 그 모든 걸 포기해야만 한다. 강한 힘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는 악마가 그 힘을 억누르며 살아가야 하다니. 얼마나 상실감이 클까.

입맛이 없다며 음식에 손을 안 대는 것도. 매일 침울하게 거리를 떠도는 것도. 모두 그런 상실감 때문인 게 분명했다.

“그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해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고민도 없이 그냥 소환해버렸어요. 그러지 말 걸 그랬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이브리아의 말에 해리가 펄쩍 뛰었다.

“내 모든 게 왜 다 그쪽에 있어? 내 모든 건 여기 있잖아. 너.”

해리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이브리아의 뺨을 감싸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브리아. 네가 내 전부야. 내 뿌리이자 터전이라고. 네가 내 옆에 있는데 다른 세상을 그리워할 이유가 있겠어?”

이브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해리를 쳐다보자, 그가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힘을 과시하면서 날뛰는 건 어렸을 때나 좋아했지. 이제 나도 늙어서 그럴 기력 없거든?”

이제 해리도 인간의 나이로 치면 30대였다. 늙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이브리아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해리의 눈빛에서 온전한 진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상실감에 우울해져 이상행동을 보였다는 건 아니었단 말인데. 이브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를 추궁했다.

“그럼 말해봐요. 왜 절식 투쟁을 한 거예요?”

“투쟁한 게 아니라 그냥 돈을 좀 아끼려고 그랬어. 내가 딱히 할 건 없고 식비라도 줄이자 싶어서…….”

“돈을 아껴요? 왜요?”

“이브리아는 가난하잖아. 그러니까 돈을 아껴야지.”

“……가난? 내가요?”

이브리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집도 작고, 하인도 없고, 일도 하잖아.”

“아.”

이제야 해리의 오해를 알게 된 이브리아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럼 계속 거리를 배회한 건요?”

“일을 구하려고. 나도 돈을 벌어서 도움이 되고 싶었어.”

“……그것참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요.”

이브리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손가락으로 해리의 가슴을 쿡 찔렀다.

“해리 오베론 씨. 내가 내 남자 하나 못 먹여 살릴 정도로 능력이 없어 보였어요? 나 되게 능력 있는 여자거든요?”

“어?”

“나 가난한 거 아니라고요. 해리가 먹을 걸 줄이고,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 마음먹을 전혀 필요가 없을 정도로.”

태양신에게 선택받고 ‘저쪽’ 세상으로 넘어가기 전부터 이브리아는 부유했다. 국내 최고의 무역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열심히 일한 대가였다.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이브리아를 보며 해리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집이 옛날 우리 집 화장실보다 작았는데?”

“옛날 집 화장실이 지나치게 넓은 거라고요. 지금 집이 30평이 넘는데, 1인 가구가 그렇게 큰 집에 사는 게 흔한 일인 줄 알아요? 여기에선 오히려 넓은 편이에요.”

“……집안일 하는 하인도 없고.”

“원한다면 가정부를 들일 순 있겠죠? 하지만 혼자 사니까 그럴 필요를 못 느꼈을 뿐이에요.”

“……힘들다면서 매일 일도 하러 나갔잖아.”

“그건 이 세상 사람 모두가 그래요. 재벌 회장님 같은 엄청난 부자들도 일하는 세상인걸요.”

하긴. 드라마 속에서 본 부자들도 전부 일을 열심히 했다.

“이브리아 그럼 네 말은, 이게 전부 다…….”

“해리의 삽질이었다는 거죠.”

이브리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지금까지 해리가 했던 일들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그리고 나 이제 일도 그만둘 거예요. 로또에 당첨되면 상사 얼굴에다 사직서를 던져주는 게 꿈이었거든요.”

“로또?”

“뭐, 로또에 당첨된 건 아니지만 비슷한 대박이 굴러들어와서 오랜 꿈을 이뤘어요. 전부 해리 덕분이에요.”

이브리아가 기특하다는 듯 손을 뻗어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 주면 인수인계도 끝나니까 매일 해리랑 놀 수 있다고요.”

칭찬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한 일이 없었다. 해리가 어리둥절하게 눈을 껌뻑이자 이브리아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해리. 내가 이름 불러서 소환됐을 때 기억나요?”

“당연히 기억하지.”

어떻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이브리아를 만날 수 있었는데. 해리는 이브리아가 자신을 향해 웃던 그 순간의 공기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해리가 뭘 입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요?”

“응.”

그때 해리는 이브리아의 마지막에 멋진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서 아주 좋은 옷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제국 제일의 디자이너가 온갖 좋은 것을 써서 지은 옷이었다.

“그 옷에 달린 단추가 전부 다이아몬드더라고요. 그것도 최고의 장인이라는 드워프가 세공한 다이아몬드.”

드워프의 세공 솜씨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감정을 맡겼더니, 역시나 이쪽의 기술로는 도저히 재현해낼 수 없는 섬세한 커팅이 들어가 있다고 했다. 감정을 맡은 보석상은 손까지 덜덜 떨며 이 세공을 누가 했는지 물었다. 물론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 적당히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특히 소매에 장식된 다이아몬드는 색이 독특해서 더 값어치가 높았어요.”

선명한 붉은색의 레드 다이아몬드. 색상은 물론이고 반짝임마저 완벽한 최상품의 보석이었다.

“그걸 전부 경매에 냈어요.”

그랬더니 보석에 일가견 있다는 사람들이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덕분에 이걸 내가 다 쓰고 죽을 수 있나 걱정될 만큼 엄청난 돈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통장에 돈이 들어오자마자 당장 거지 같은 상사한테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줬어요. 저한테 미쳤냐고 묻길래 얼굴에 사직서를 던져주니까 조용해지던데요?”

그때 얼마나 속이 시원했던지. 농담인 줄 알고 비아냥거리던 상사는 정말로 그만둔다는 말에 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며 이브리아를 붙잡았다. 이브리아는 그런 상사의 제안을 시원하게 걷어찬 뒤 동료에게 자신의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다음 주면 끝이었다.

“드디어 돈 많은 백수가 되겠네요. 내가 저쪽 세상에서부터 쭉 원했던 일이죠.”

원하지도 않은 황제 자리를 손에 쥐여주었던 태양신 솔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이게 제대로 된 꽃길이지. 안 그래요?”

이브리아는 씩 웃으며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 해리의 손을 잡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해리. 말만 해요. 내가 다 해줄 수 있으니까.”

“전부 다?”

“네. 전부 다. 무엇이든지요. 뭐부터 하고 싶어요?”

“난…….”

이브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해리가 예전에 살던 것처럼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면 당장 집을 사러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리의 입에서 나온 소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 치킨 먹고 싶어.”

“뭐라고요?”

“입맛 없다고 거짓말했을 때도 엄청 흔들렸어. 치킨 사달라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니까. 아주 위험했어.”

“……소원이 그게 전부예요?”

“응.”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해리가 곧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좀 무능해도 버리지 마. 여기선 내 힘이 별로 필요가 없더라고. 대신 내가 예쁜 짓 많이 할게! 알았지?”

“……그게 무슨 소원이야.”

이브리아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해리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래도 한 번 해봐요. 예쁜 짓. 얼마나 잘하나 보게.”

“잘하면?”

“치킨 10마리 사줄게요.”

“흐음, 그래?”

해리가 씩 웃으며 이브리아를 번쩍 안아 올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마 20마리 사주고 싶어질걸.”

해리 오베론의

슬기로운 현대 생활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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