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해리 오베론의 슬기로운 현대 생활
과거의 영광은 모두 벗어던진 채 이젠 햇병아리 현대인으로 다시 태어난 악마. 해리 오베론. 그는 지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브리아는…….’
해리가 땅이 꺼질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브리아가 출근하고 해리 홀로 남은 집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아늑한 거실. 깔끔한 주방. 포근한 침실과 깨끗한 화장실. 이브리아가 ‘저쪽’ 세상에 넘어가기 전부터 쭉 살고 있었다는 ‘이쪽’ 세상의 집이었다.
그녀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몸만 덜렁 소환되어 온 해리를 이곳으로 데려와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자신이 어째서 ‘저쪽’ 세상에 불려가게 됐는지, ‘이쪽’ 세상에서의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꽤 황당한 이야기죠? 이제 와서 내가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니.
이브리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해리는 생각보다 그녀의 사연이 놀랍지 않았다. 처음부터 평범한 인간들과 달랐던 이브리아가 아닌가. 그 특별함이 그녀가 살아왔던 세상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이해됐다.
이 세상은 ‘저쪽’ 세상과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마법도, 마수도, 계급도, 전투도 없는 평화로운 세계.
‘그러니 이브리아가 누군갈 죽이는 걸 싫어했지.’
해리는 이브리아가 ‘저쪽’ 세상에 조금씩 적응해나갔던 것처럼 ‘이쪽’ 세상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문물들을 접하느라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 마차보다 훨씬 빠른 자동차. 언제 어디서든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휴대전화. 진짜 사람이 움직이고 말하는 것 같은 텔레비전. 마법만 없을 뿐이지, 이 세상에도 온갖 신기한 문물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웠던 순간은 역시 그때였다. 이브리아의 가르침에 따라 샤워하고 나온-버튼만 누르면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는 꽤 신기했다. 이게 어떻게 마법이 아닐 수 있지?- 해리를 의자에 앉힌 그녀가 당당하게 드라이어를 꺼냈을 때!
-……이게 드라이어라고?
-네. 이게 그 드라이어예요. 머리를 말려주는 기계죠.
이브리아가 버튼을 조작하자 따뜻한 바람이 쏟아져 해리의 은발을 가볍게 흩날렸다. 투박하게 생긴 작은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약한 온풍을 느끼며 해리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게 드라이어라니!
-이브리아. 날…… 고작 이런 고철 덩어리와 비교한 거였어……? 이런 하찮은…… 고철 덩어리랑……?
해리는 부들부들 떨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브리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브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드라이어로 해리의 젖은 머리를 말려줄 뿐이었다.
-해리.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죠. ‘날 세계 최고의 드라이어라고 불러라!’하고 외친 건 내가 아니라 해리였잖아요.
-어, 으음, 그건…….
-마구 흥분해서는 그렇게 부르라고 난리여서 원하는 대로 해준 것뿐이라고요.
해리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렵지 않게 ‘세계 최고의 드라이어’를 자처했던 지난날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해리는 언제나처럼 이브리아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채 뾰로통해졌다.
-그럼 이제 나 드라이어라고 부르지 마. 나 드라이어 아냐.
-그래요? 해리는 드라이어가 아니니까, 이제부턴 이게 세계 최고의 드라이어네.
퉁명스러운 해리의 말에 이브리아가 그의 머리를 말려주던 드라이어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세계 최고의 드라이어야. 네 덕분에 내가 얼마나 편한지 몰라.
이브리아가 드라이어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칭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기분이 나빠졌다.
‘난 분명 드라이어가 아닌데.’
그런데.
‘왜 다른 드라이어를 세계 최고라고 칭찬하는 이브리아의 말에 기분이 나빠지지?’
복잡한 심경에 눈을 굴리던 해리가 결국 발끈해서 소리쳤다.
-왜 그게 세계 최고야? 이런 허접한 바람 가지고 세계 최고는 무슨. 내가 더 최고거든!
-해리는 이제 드라이어 안 한다면서요?
-아냐! 나 드라이어야! 드라이어 할래!
해리가 드라이어를 빼앗아 멀리 던져버리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니까 다른 거한테 세계 최고라고 하지 마. 응? 너한텐 내가 뭐든 세계 최고 할래!
하다 하다 이젠 기계한테까지 질투하는 건가. 이브리아는 황당하다는 듯 해리를 쳐다보다가 생각보다 그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곤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아주 많이 노력해야겠네요, 해리 오베론 씨. 이 세상에 대단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걸 전부 다 이기려고요?
-괜찮아. 내가 노력할게. 뭐든 열심히 할 수 있어!
-정말요?
-그렇다니까? 날 시험해봐도 좋아!
-그럼…….
의지에 가득 차 두 주먹을 불끈 쥐는 해리를 보고 말끝을 흐리던 이브리아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여기에 입부터 맞춰봐요.
-……어? 입을 맞추라고? 왜?
-아, 뭐든 세계 최고 하겠다면서요? 입맞춤은 얼마나 잘하나 어디 한번 보려고요. 시험이에요.
이브리아의 말에 해리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이브리아에게 입을 맞추는 일이야 수도 없이 많이 했다. 하지만 한 번의 시험으로 자신이 세계 최고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밀려왔다. 해리는 이브리아의 입술을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 할게.
-응. 해요. 눈 감아 줄까요?
-어…… 네가 편한 대로?
-그럼 안 감을래요. 해리가 얼마나 잘하나 제대로 봐야 하니까요.
제대로 지켜본다는 말대로 이브리아가 두 눈을 말갛게 뜨고 해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하는 두 눈동자에 해리는 더욱 부담스러워졌다. 그런 해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브리아가 그를 재촉했다.
-자, 해리 오베론 학생. 시험 시작입니다. 빨리 입을 맞춰보세요.
해리는 마음을 다잡고 눈앞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예전의 이브리아와 생김새는 다르지만 여전히 해리의 모든 것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입을 맞춘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간지러웠다. 해리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이브리아가 싱긋 웃으며 두 손을 뻗어 해리의 뺨을 감쌌다.
-땡. 시간 초과예요.
해리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어? 제한시간도 있었어?
-그럼요. 제한시간 없는 시험은 없다고요.
-미리 말해줬어야지!
해리가 거세게 항의했지만, 그걸 받아 줄 이브리아가 아니었다.
-다음부턴 말해줄게요. 그럼 이제 내 차례죠?
-뭐가 네 차례라는…….
불만에 가득 찬 해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브리아가 기습적으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깊게 맞닿았다가 천천히 멀어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뜬 해리를 보며 이브리아가 씩 웃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이건 해리가 아니라 내가 세계 최고인 것 같은데?
이브리아의 말에 해리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어…… 맞아……. 네가 최고야, 이브리아.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크흠!”
별안간 떠오른 기억에 해리가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했다. 그 사건이 있었던 것도 벌써 한 달 전의 일.
‘안타깝게도 입맞춤 세계 최고의 지위는 이브리아에게 빼앗기고 말았지만…….’
해리는 이제 어느 정도 이 세상에 익숙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세계 최고의 드라이어를 넘어 자신을 세계 최고의 식기세척기나 세계 최고의 청소기라고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이 세상에 익숙해지니 처음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브리아와 함께 지내고 있는 이 집부터가 문제였다.
‘집이 어떻게 이렇게 작을 수 있지?’
‘저쪽’ 세상의 저택 화장실보다 작은 공간에 주방과 거실도 모자라 침실까지 들어차 있지 않은가? 평생을 커다란 성이나 저택에서만 살아온 해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심지어 이쪽 세상의 이브리아는 하인도 없이 집안일을 모두 자신이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직접 노동까지 했다. 지금도 돈을 벌기 위해 회사라는 곳에 출근해 집을 비운 상태였다.
집안일을 제 손으로 하는 이브리아라니? 노동하는 이브리아라니? ‘저쪽’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족들은 직접 몸을 써서 일하는 걸 천하다고 여겨서, 그런 일은 전부 가난한 하층민들의 몫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상식을 모두 동원해 고민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브리아는 엄청나게 가난하다!
어째서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해리는 이제야 현실을 알아챈 자신의 멍청함을 자책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저쪽’ 세상에 살던 것처럼 살았다.
‘이젠 나도 달라져야 해.’
해리가 비장하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그렇게 결심하니 앞날이 막막했다. 엄청난 돈을 벌어와 이브리아에게 안겨주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저쪽’ 세상에서는 최고의 무기였던 그의 강력한 마법이 평화로운 ‘이쪽’ 세상에선 크게 의미가 없었다.
‘설마 나, 지금 엄청나게 무능한 상태인가……?’
이브리아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짐짝밖에 안 되는 처지라니. 해리는 침울하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떠올렸다.
‘……우선 먹는 거라도 좀 줄이자. 내 식비만 줄어도 큰 도움이 될 거야.’
해리는 모두가 인정하는 대식가였다. 식사량을 절반만, 아니 10분의 1만 줄여도 가계 사정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식사량을 줄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배가 고픈 기분이었지만, 해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할 수 있어. 해리 오베론! 전부 이브리아를 위해서잖아?’
이브리아를 위해서! 해리에게는 마법보다 강력한 주문이었다.